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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군(豐壤君) 조경(趙儆)

시 대 : 조선
생몰년 : 1541 ~ 1609(중종36 ~ 광해군1)
자 : 사척(士惕)
시호 : 장의(莊毅)
활동분야 : 무신

1541(중종 36)~1609(광해군 1). 자는 사척(士惕)이다.
남원공(南原公) 계팽(季砰)의 고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현범(賢範)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안국(安國)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생원 세임(世任)의 따님인데 공은 3남 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선조16년(158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비변사 낭청에 선임되었다. 외직으로는 의주판관(義州判官), 영암군수(靈巖郡守), 인산첨사(麟山僉事) 그리고 만포첨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중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다.

공은 임기 중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요구되는 덕목인 나라와 사회 안정을 위한 공익사업에 심열을 기울였지만 경비는 절약하고 지방의 호족 텃세와 횡포를 묵과하지 않았으며, 자기를 다스림에 늘 엄격하고 청염결백(淸廉潔白)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1591년 강계부사로 있을 때 그곳에 유배되어 온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우대하였다는 이유로 파직이 된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가 되어 군졸은 20여명뿐이었지만 공은 장계(狀啓)를 하기를 “전쟁을 하게 되면 후퇴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장군으로서 결연한 각오를 다진다. 금산(金山)에 이루어 부하가 겨우 100여명 이었지만 왜적과 처음으로 교전을 하게 된다. 이미 겁먹어 전진하려 하지 않는 사졸(士卒)들을 독려하며 싸우니 적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덤불 속에 적군 3명이 잠복하여 있었는데 2명은 곧 사살이 되고, 그 중 1명이 공에게 달려들어 옆구리와 머리에 상처를 입혔다. 선조25년 6월 25일 조선왕조실록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이 이달 3일에 금산(金山)에서 싸우다가 칼날에 부상하였으므로 종사관 정눌(鄭訥) 및 군관 등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수(金脺)에게 이속시켜 조전(助戰)하도록 하였습니다."

공은 상처가 심하여 군마(軍馬)를 다룰 수 없기에 호남의 구례현(求禮縣)에 가서 요양(療養)을 하고 있는데, 7월 4일 진주목사로 제수되니 아픈 몸을 이끌고 국사에 전념하게 된다. 8월 가평(加平)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이에 양사(兩司)가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시킬 것을 청하자 상은 윤허한다. 9월 경기 관찰사 심대(沈垈)가 공을 대장으로 삼았으나 곧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제수되었다.

그해 겨울 전라순찰사 권율이 독산성(禿山城; 수원남쪽에 있음)을 방어를 맡고 있을 때이다. 성은 적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여러 의병들과 관군들은 겁에 질려 싸우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공은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진하며 맹공을 퍼붓기를 재촉하니 의명과 관군의 사기는 되살아났고 적은 전세가 불리하자 성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행주대첩(幸州大捷)

가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광주(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로 물러가 상제노릇을 하려 했으나 권율의 간곡한 부탁으로 중군장(中軍將)이 된다.
이듬해 도원수 권율과 함께 한양을 탈환의 실마리가 되는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둔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 전투의 승리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지 되돌아보자.

포저공(浦渚公) 익(翼)이 찬한 신도비(神道碑)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명군(明軍)이 평양에서 이기니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권공은 서울 수복을 위한 명군과 합력할 방안을 의론하니, 공은 “우선 지형을 답사해야 합니다.” 하며 그날 밤으로 강을 건너 군대가 주둔시킬 만한 구능(丘陵)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찾은 곳이 행주였다. 계사년(癸巳年) 2월 권율 휘하의 정병 약 4천명은 둘로 나뉘어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 한 병력은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산(衿川山)에 주둔하여 측면 지원토록 하고, 권공은 2천3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고양(高陽)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권공이 말하기를, “명 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적병이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을 필요는 없다." 고 지시한다. 그러나 조방장(助防將)인 공은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 며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권공은 듣지 않는다. 마침 그때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양주(楊州)에서 권공과 상의할 일이 있다며 불렀다. 그 사이 이틀 동안에 공은 모든 군사를 시켜 성책을 완성한다. 이틀 후 권공은 돌아왔고, 목책(木柵)을 만든 지 사흘 만에 적의 대군이 쳐들어온다.

정오(正午)가 지나도록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고자 적병은 묘책으로 긴 나무[長木]를 가져다가 다락같은 모양의 높다란 가마[轎]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명을 싣고 수백 명이 메어 올려 우리 진영 안으로 집중 사격을 하였다. 이에 공이 지자포(地字砲)를 가져오게 하여, 큰 칼 두 개를 포(砲) 앞에 매어달고 적의 가마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포를 쏘니, 천둥ㆍ벼락을 맞은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가마는 모두 부서지고 가마 위에 있던 적병은 몸뚱이와 팔ㆍ다리가 흩어져 날아가 떨어졌다. 전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전투가 치열하자 공은 화살과 돌팔매가 쏘다지는 전선에 서서 장병들을 격려하기를 “우리는 지형상(地形上) 유리하고 인화(人和)도 되어 있으니 나는 필승을 자신한다. 후퇴해도 살아남을 길 없다. 후퇴해서 죽을 바에는 적을 죽이고 죽자”하니 병사들의 의기가 당당하였다. 이때 순찰사 권공이 몹시 피곤하다며 막사로 들어가자 병사들이 갑자기 의기소침하였으며 강변 쪽으로 도망치는 자들도 속출했다. 공은 곧바로 순찰사를 다시 모시고 “대장이 여기 계시다!”하니 동요되었던 군중들은 제자리로 돌라왔다.

드디어 적병은 전세(戰勢)가 불리하자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히 다시 진격하지 못했다. 이 싸움에서 적병 병력의 거의 반 정도가 사살되었다. 권공과 모든 장수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趙儆)의 힘이요." 하였으니 전투 전 목책의 설치가 대승의 결정적 요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주대첩은 사전의 치밀한 준비와 고도의 심리전술 그리고 전투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의 혼연일체가 엮어낸 전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쟁사를 기술할 때 역사가들은 지나치게 대장의 공적만 부각시킨다. 행주대첩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권공의 뜻은 아니겠으나 최립(崔岦)과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는 도원수 권율의 전적비(戰跡碑)라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행주대첩은 한사람만이 이룬 전과는 아닐 텐데?

여기서 12시간의 사투 끝에 절대적 병력차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는 행주대첩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璥)의 눈에 뛰는 두 가지 지략(智略)이다. 첫째는 진지의 선정이다. 공은 밤을 틈타 한강을 건너 지형을 살펴보고 행주산성을 주둔지로 최적임을 판단하고 돌아와서 권공에게 보고한다. 권공은 공과 함께 이 곳을 돌아본 후 서울에 더 가까운 안현(鞍峴)에 설진(設陣)할 것을 원한다. 그러나 공과 몇몇 부장들의 반대로 공이 물색한 행주에 진을 친다. 두 번째는 성책(城柵)의 수축이다. 권공은 명나라의 군사도 많고 적병이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니 성책(城柵)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공은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며 2일 동안에 급히 목책을 쌓아 산성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역사는 권율의 지시로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권율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趙儆)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다.


훈련도감(訓練都監)

서울이 수복되자 공은 도성서도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으로 임명된다. 포저 익(翼)이 찬한 신도비에서 “경성이 수복되자 유홍(兪泓)은 유도상신(留都相臣) 공은 유도대장(留都代將)이 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는 도성으로 돌아와 임진왜란의 참패에 대한 아픔을 추수이며 새로운 군사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상은 평양(平壤)이 수복되었을 때 도독(都督) 이여송을 찾아가 사례하고 명나라 군사의 전후(戰後) 승패가 다른 점을 묻는다. 도독은 말하기를 "전에 온 북방의 장수는 항상 호적(胡賊)을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싸움이 불리하였고, 지금 와서 사용하는 것은 바로 척 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인데, 곧 왜적을 방어하는 법이라서 전승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도성으로 돌아와 훈련도감의 설치를 명한다. 그리고 1596년 서애(西厓) 유성룡을 도제조로, 무재신(武宰臣)인 공을 훈련대장(大將)으로 삼는다. 때는 대란을 겪은 뒤라 굶주리는 백성들이 속출하여 병정(兵丁)이 되려는 사람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청탁이 분분하였다. 공(公)은 공정한 법을 만들어 정예병을 선발하는데, 큰 바위 하나를 들 수 있고 한 길 되는 담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로 한정을 한다. 10일에 걸쳐 수천 명을 뽑아 초관(哨官)을 두고 군사를 나눠 실제 척씨의 제도와 같이 연습시키니, 몇 달 만에 군용(軍容)이 갖추어졌다.

훈련도감의 신분구성은 사대부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생계유지를 위해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 중 무예가 뛰어나면 양인에게는 금군(禁軍), 노(奴)에게는 면천(免賤), 서얼에게는 허통사로(許通仕路)의 길을 열어주었다.

훈련도감은 국가에 커다란 경제적 부담이 되었지만 이부서의 창설로 직업군인제도가 정착되었으며, 병(兵)과 농(農)을 분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 28년 6월에 도제조 유성룡, 제조 이덕형, 조경 등은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편집한 촬요(撮要) 1권, 조련하고 변진(變陣)하는 법을 뽑아 1권, 그리고 조목조목 그림을 그려서 일목요연하게 하고 따로 각종 기계를 그리고 그 아래에 행용(行用)하는 세보(勢譜)를 상세히 풀이하여 3권으로 병법서를 편찬한다. 훈련도감은 기민구제(飢民救濟)을 통한 군사력 강화도 있지만 포수 중심의 삼수병(三手兵) 인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의 정병(精兵) 육성에 있다. 일본군 조총의 뼈저린 패배의 아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치당시에는 포수 중심으로 훈련시켰다. 공은 주로 이일을 전담하며 포 쏘는 방법을 가르쳤다. 선조27 4월 병조에서 군대를 조련하는 초관과 장관들에 대한 포상을 상신한다. 포 쏘는 법을 전담한 공에게 선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가르치고 있으니 가상하다며 사간(司諫)들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가자(加資)할 것을 하교한다. 그리고 선조28년 9월 임금은 서교에 거둥하여 강무(講武) 시재(試才)하고 대장이하 장관(將官)들에 차등 있게 상을 내렸는데 대장인 공에게는 아마(兒馬) 1필을 내렸다.

공은 제조 및 훈련대장의 직을 맡고 있는 중에도 전란을 계속되었고 따라서 조정에서는 몇 차례 외임출사(外任出仕)가 거론되지만 그때마다 훈련도감 일을 막길 사람이 없다며 무산된다. 선조28년 9월에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하나 3일 만에 이일(李鎰)로 교체하고 첨지중추부사로 내직근무를 명한다. 훈련도감 내에서 공의 위상을 가늠할만한 일들이다. 공은 그 후에도 외임을 마치고 돌아오면 으레 훈련대장이 되곤 하였다.


붕당정치(朋黨政治)에 휘말리며....

조선 중기이후의 고질적인 병폐인 관료들 특히 동문수학한 무리들 간의 파벌을 이루어 정권다툼을 하는 반목과 대립의 당쟁을 붕당정치라고 한다. 선조 초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붕당정치는 선조 말년에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뉜다. 반면 서인계가 주도한 기축옥사(己丑獄事)에서 북인계가 큰 피해를 입으며, 그 이후 북인의 서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 굳어진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과 남인은 임진왜란의 발발과 초반 패배에 책임이 있는 반면, 북인은 의병활동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를 기반으로 북인은 종전(終戰)과 함께 임진왜란중의 정책실패와 왜군과의 화의가 정유재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 서예 유성룡(柳成龍)의 남인정권을 퇴진시키고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선조30년(1597) 가을에 왜병들이 쳐들어와 호남을 거처 경기지방까지 위협을 하게 된다. 그 당시 김응남(金應南)은 서애(西厓)가 사임원을 낸 시기를 틈타 명나라 장수의 뜻이라며 훈련도감의 병력을 출동시킬 것을 상께 간청한다. 그러나 훈련도감은 임금을 호의하는 역할도 맡는 부서로 그곳의 병력들은 만에 하나 상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며 빈틈없는 경호를 하는 요원이라며, 서애는 반대를 한다.

그 당시 좌상(左相)인 김응남은 영상(領相)인 유성용과 알력이 있었고, 김응남의 당여(黨與)들은 북인계 사람들이 많았다.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李山海) 역시 김공의 처남이 된다.

상은 처음에는 김응남 의견에 동조하다가 절반은 시형(侍衡)하고 절반 병력만 출동하라고 하며, 공(公)을 출사(出師)시킬 것을 명한다. 이때 공이 인솔한 병력은 4백명 미만이었다.

공이 행군하여 용인에 도착했을 때였다. 도원사(都元師) 권율은 함께 진군할 것을 요청하고 대궐에 들어갔다. 몇 칠을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왜병은 소사부근에서 명나라 장군 마귀(麻貴)에게 패전하고 돌아갔다. 이 일로 김응남의 당여(黨與)들인 사간(司諫)들은 권율과 조경의 무책(無策)과 무능(無能)을 몇 차례에 걸쳐 탄핵을 한다. 그러나 상은 “지체한 폐단은 경계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대장(大將)을 부당하게 벌하는 것은 군율을 진작시킬 수 있는 일이 못된다.”며 따르지 않는다.

공은 선조31년(1598) 7월에 한성우윤에 임명되고 몇 칠 안되어 특명으로 판윤으로 제수된다. 그러나 공을 탄핵하던 대간(臺諫)들이 다시 이를 논하기 시작한다. 선조31년 7월27과 8월15일 사이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이첨을 비롯한 사간들이 17번이나 간언(諫言)한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대략 이러하다.
“한성부 판윤 조경(趙儆)은 지난해 가을 전장에 나가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쳤으니 군율을 면하고 오늘에 이른 것만도 다행인데 품계를 올려 발탁하는 명이 내려졌으며, ‘훈련도감에서 노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직임(職任)을 맡은 지 몇 년이 되도록 이렇다 할 공적(功績)이 없었으며, 상께서는 조경이 고생을 많이 하여서 '외임(外任)을 맡길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신하로서 편히 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답하기를

"조경에게 진실로 머뭇거린 죄가 있다면 어찌 계사(啓辭)를 기다려서 죄를 다스리겠는가. 그때에 참작하여 분간(分揀)했으니 지금에 와서 머뭇거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자(加資)한 것이니 바꿀 수 없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라고 하교한다.

공은 선조32년 4월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는데 대간들은 다시 정유년(丁酉年) 가을 행군지체의 일을 다시 거론하며, 겁쟁인 그가 변방 오랑캐를 막을 수 없다며 체차(遞差)를 것을 간한다. 이에 선조는 답을 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극진하며 붕당의 병폐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추측케 하는 내용이기에 여기 선조실록(32년 4월 8일)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조경(趙儆)의 일은 적합한 인물이 있는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고 오직 논체(論遞)만을 일삼으니 모르겠다만 그 일을 감당할만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올 것인가, 땅에서 솟아날 것인가. 전대(前代)에서 구해올 것인가, 다른 나라에서 얻어올 것인가. 이와 같이 체직시킬 것을 논의하다가는 끝내는 필시 그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 차출될 것이니, 심히 염려가 된다. 서성대고 있었다는 일은 필시 실상과 다른 말일 것이다. 그런데 매번 이것을 가지고 논박하면서 용납하지 않는다면 불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을 쓰는 방도는 그 사람의 단점은 생략하고 장점만을 취할 뿐이다. 만일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갖추어지길 요구하여 하자가 없기를 기대한다면 아무리 옛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조경은 체차할 수 없다”

그 다음날 다시 사간원에서 곤수(梱帥; 병마절도사의 예사로운 말) 직분이 부적합하다고 하니 왕도 헐 수 없이 따른다. 그리고 8일 후인 선조32년 4월 18일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제수하였으며, 두 달 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제수를 하며 재촉하여 내려 보내라고 전교를 한다. 포저공의 신도비에 의하면 “근도(近道)의 병사(兵使)로 비의(備擬)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드디어 회령부사로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함경북도병사가 사간(司諫)들에 의해 좌절되자 회령부사를 통해 임금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던 사건이다. 공에 대한 선조의 총애가 얼마나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조 34년(1601) 병으로 돌아 왔으나 그해 6월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으며, 선조36년(1603)에는 황해병사(黃海兵使)에 임명된다. 선조 39년(1606)에는 북간도의 오지(奧地)에 있는 오랑캐들이 삼수(三水)를 거쳐 쳐들어온다고 하여 이를 방비하기 위하여 남도방어사 겸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 부사로 재직기간 중에는 평안도의 강계지방에서 공물로 바치던 산삼인 공삼제도(貢蔘制度)의 폐단을 개선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8개월 만에 병으로 돌아와 잠시 훈련대장이 되었다가 선조41년(1608) 2월에 선조의 국상으로 대궐 호위를 하였고, 6월에 수원방어사가 되었다. 그러나 광해 즉위년(1608) 8월 정사호(鄭賜湖)의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니 이것이 공의 이력의 전부이다. 포저공은 신도비에서 비록 섭섭한 감정이 있다고 하지만 공의 청빈함은 세상이 다 아는데 어찌 감히 탐욕스럽다는 죄목으로 무함(誣陷) 할 수가 있는가! 기천망인(欺天罔人)한 자라고 개탄을 하고 있다.

공은 무신으로 사서(史書)를 두루 통하여 고사(古事)에 밝았고 늦게 급제하였지만 명망이 높아 사람들이 모두 대장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공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찬란한 전과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 후 비변사 당상으로 군사력 증진을 위해 훈련도감 일에 전력(全力)을 다했다.

공은 평생 동안 큰 꿈을 펼친 사람답게 몸가짐이 평범하지 않았다. 일찍이 권문(權門)과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을 섬기기를 꺼렸고, 그들 주위를 맴도는 부류들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오랜 관직생활을 하였지만 공은 늘 청렴결백하였으며,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이 투철했다. 영월과 제주에는 목민관(牧民官)으로의 치적(治績)을 칭송하기 위한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집은 항상 궁핍하여 높은 벼슬을 한집 같지 않았고, 집의 규모는 작으니 매우 소박하고 누추했다. 그러나 집에서 어머니를 모실 때는 효성이 지극했다. 임진난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수(將帥)로서 적진(敵陣) 속을 뛰어다는 몸이라 상중 복제(服制)는 할 수 없더라도 3년간 소식(素食)으로 상제(喪制) 예(禮)를 지켰다.

공은 선조 37년(1604)행주에서 승전한 공훈(功勳)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봉되어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는 훈호를 하사받고 풍양군(豐壤君)에 봉(封)해진다. 왕의 교시(敎示)로 후세(後世)에 전하기 위해 그린 영정(影幀)은 국립박물관 문화재로 보관되어 있다.

배위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영월엄씨(寧越嚴氏)로 부정(副正) 증참의(贈參議) 서(曙)의 따님이다. 슬하에는 5자를 두었으니 맏이는 굉중(閎中)으로 생원이며,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고, 둘째는 치중(致中)이며, 셋째는 극중(克中)이며, 넷째는 상중(尙中)이며, 다섯째는 시중(時中)으로 화순현감(和順縣監)을 지냈다.

공은 국상(國喪)으로 채식(菜食)만 하다가 위장병이 생기고 악성 종기로 광해 원년(1609) 3월 8일 동문(東門) 밖 자택에서 돌아갔으니 향년 69세이다. 조정에서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祭祀)와 부의(賻儀)를 하사했다. 그해 4월 21일 조정의 지원으로 광주군 하도면 동천촌에 장사지냈으니 현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 양좌(良坐) 쌍분이다. 시호는 장의(莊毅)이다. 그 후 경기도 안산시 반월면 직동 선영(先塋)으로 이장하였으며, 이 때 복식유물(服飾遺物) 다수가 출토되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도비는 종손(從孫) 좌의정 익(翼)이 찬(撰)하였으며, 묘표는 후대에 13대손 돈호(敦浩)가 지었으며, 전(篆)과 서(書)는 돈귀(敦貴)가 썼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 趙儆神道碑(浦渚 趙翼撰), 宣祖實錄, 宣祖改修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國朝寶鑑, 權慄神道碑(象村 申欽撰), 풍양조씨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