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행장 및 묘도문 >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신도비명(神道碑銘)



1. 들어가며 2. 경세제민의 길 3. 포저의 성현지도
4. 포저의 의기지학 5. 포저의 가계 6. 명(銘)


4. 포저의 위기지학(爲己之學)

공은 총명함이 뛰어난 데다 덕성이 천연적으로 갖추어져서 순수(純粹)•혼후(渾厚)하고 화락(和樂) 통철(洞徹) 하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상운(祥雲)이요 서일(瑞日)과 같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첨추공(僉樞公)이 기거(起去)를 잘 하지 못하자 공이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앉고 눕고 용변을 보는 일 등을 모두 직접 시중들었다. 그러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나이가 70에 가까웠는데도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삼년 동안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서 밤낮으로 하루같이 호곡(號哭)하였으므로 침석(枕席)이 모두 젖었으며 상복을 벗고 나서도 그대로 외침(外寢)에 거하였다. 그 뒤에 선부인(先夫人)을 천장(遷葬)할 때에도 그지없이 애통해하는 것이 초상(初喪)을 당했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공은 술을 좋아하였으나 뒤에 어버이의 경계를 듣고 나서는 다시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즐기던 음식은 종신토록 차마 먹지 못하였으며 그 일에 말이 미치면 언제나 눈물을 보이곤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의 생신이나 기신(忌辰)이 돌아올 때면 자신을 가누지 못한 채 슬피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제사를 올릴 때에는 엄동설한에도 반드시 목욕을 하였는데 매우 노쇠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친척이나 고구(故舊)의 상을 당했을 때에도 며칠 동안 소식(素食)을 하였고 복례(僕隷)와 같은 미천한 아랫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공은 항상 정자(程子)의 ‘망생순욕(忘生徇欲)’이라는 말29 을 더없이 경계해야 할 격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비록 성려(盛麗)30 와 함께 방 안에 있을지라도 가까이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의복은 몸을 가리면 되었고 식사는 두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으며 조정에 몸담은 50여 년 동안 전택(田宅)을 늘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평소의 음식을 줄이거나 죽을 끓여 먹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때에 무슨 마음으로 나만 잘 먹겠는가.”라고 말하곤 하였다.

대개 공의 충군(忠君)하고 우국(憂國)하는 정신은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공은 과거에 급제했을 때부터 이미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예컨대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려고 한 것과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군병을 양성하려고 한 것과 과거제도를 변통하여 사습(士習)을 바로 잡으려고 한 것 등은 모두 옛 제도를 고증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한 것으로서 공이 있는 힘을 다해 주장하며 시행하기를 요청해 마지않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인조대왕은 공의 학술과 충성심을 알고서 매우 공경하며 존중하였으나 국정(國政)을 담당한 신하들은 실제로 원대한 계책이 없었으므로 공이 주장하며 건의한 것들이 대부분 저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뒤 효묘(孝廟)가 즉위한 초기에 이르러서도 미처 시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이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치도(治道)는 오직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이치를 궁구한 사람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치도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임금이 덕을 닦는 것이 첫째요 그 다음은 현인을 임용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법도대로 수치(修治)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공은 종족(宗族)을 어루만져 아끼면서 빠짐없이 거두어 구휼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매우 엄격해서 잘못을 저지르기만 하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너그럽고 온화하였으므로 누구나 심취(心醉)하여 진정으로 열복(悅服)하였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엄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였다. 사설(邪說)을 배격하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는 일에 의연(毅然)히 몸을 바쳐 따르면서 득실(得失)이나 영욕(榮辱) 따위에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뜻이 전혀 없이 진퇴(進退)와 출처(出處)가 정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아 비난할 수가 없었다.

공은 소싯적에 장공 유(張公維) 최공 명길(崔公鳴吉) 이공 시백(李公時白)고 가장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사우(四友)라고 일컬을 정도로 정분이 매우 두터웠으나 언론(言論)과 심사(心事)면에서는 모두 꼭 같지는 않았다. 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공(金公)에 대해서는 경애(敬愛)함이 매우 지극하였으나 일을 논할 때면 또한 구차하게 영합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이공(李公)과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 한공(韓公)으로 말하면 공과 비교해서 연배가 매우 현격하였으나 공을 특별히 친애하면서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는데 완평은 항상 “조모(趙某)는 지금의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성현을 배우려 한다면 사서(四書)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말하기를 “공자(孔子) 이후로 제유(諸儒)를 집대성한 이는 주자(朱子)이다. 그의 공은 맹자보다도 크다.”라고 하였다. 공은 언제나 지경(持敬)과 존심(存心)을 일생에 걸쳐 행해야 할 근본 공부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경은 수렴(收斂)과 조존(操存)을 요체로 삼는데 정신이 담연(湛然)히 그 속에 있으면 그 공부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목적은 단지 사욕을 모조리 없애고 천리(天理)가 순전(純全)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광명하고 쇄락하여 천지와 귀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이요 단지 천하의 일을 담당하면서 천지의 일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 따름인데 그 근본은 단지 마음을 보존하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을 보존하고 있을 때에는 신명(神明)이 어둡지 않아 만 가지 이치가 온전히 갖춰지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성현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다. 다만 성현은 이런 마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데에 반해 학자는 그렇게 하지 못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참배한 뒤에 서실(書室)로 물러나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곤 하였다. 진대(進對)할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재계(齋戒)하여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공경히 하였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해서 명을 받들고 제사를 지낼 때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단지 사리(事理)가 통하게만 하였을 뿐이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일삼지 않았는데 붓 가는 대로 내맡긴 채 자유자재로 써 내려가면서도 그 의미가 막힘 없이 도도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계곡(谿谷; 장유(張維))이 매양 말하기를 “의리(義理)에 관한 글은 우리들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문집 15권이 있고 그 밖에 수십 책(冊)의 저술이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더러 간행되기도 하였다. 공이 일찍이 경서(經書)의 해설서인 각종 《곤득(困得)》과 《천설(淺說)》등 몇 편을 상소하면서 함께 올렸는데 그때마다 양조(兩朝)에서 모두 총장(寵奬)하는 은혜를 내렸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