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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神道碑銘)



1. 들어가며 2. 경세제민의 길 3. 포저의 성현지도
4. 포저의 의기지학 5. 포저의 가계 6. 명(銘)


3. 포저의 성현지도(聖賢之道)

관학(官學) 유생들이 또 양현(兩賢; 이이(李珥)와 성혼(城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자 이상진 (李像震)과 유직(柳㮨)등이 서로 잇따라 투소(投疏)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나도 추악하고 패려(悖戾)하였다. 관학 유생들이 상이 이 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좌지우지한다고 여기고는 권당(捲堂)18 을 하고 나가니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이(李珥)는 천품이 고매하고 학문이 정대한 데다 식견이 탁월하고 덕행이 순전(純全)하니 백세(百世)와 사표(師表)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은 단장(端莊)하고 엄중(嚴重)하여 출처(出處)와 행사(行事)모두 옛 성현의 법도를 따랐으니 참으로 유자(儒者) 중의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실로 시대가 변하여도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성현은 반드시 천지의 순수한 기운을 품부 받고 태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후로 1천 수백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왔습니다. 우리 동방의 경우는 본조(本朝)에 이르러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이 성현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서 혹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를 하기도 하고 혹은 초야에 물러나 자기 몸을 닦기도 하였는데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이이와 성혼입니다. 그래서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유독 양현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당류(黨類)의 자손들이 나와서 배척하며 헐뜯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직이 상소한 것을 보면 너무도 무함하며 기망(欺罔)하고 있습니다. 이황이 이이를 애지중지하며 권장하고 허여한 것은 그의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데 유직은 이황이 이이를 매우 미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이 육씨(陸氏)와는 결코 근사하지도 않은데 유직은 육가(陸家)19 에게서 나온 학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학문을 논하면서 이이의 설을 많이 따른 사실은 《성학십도(聖學十圖)》나 《중용(中庸)》소주(小註)같은 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데 유직은 털끝만큼도 계오(契悟)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홀로 그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유직은 이이가 이황을 있는 힘을 다해서 공격했다고 하였습니다. 성혼의 소를 보면 맨 먼저 강학(講學)과 궁리(窮理)를 요체로 삼았는데 유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고 성혼이 ‘마음과 몸을 수습하고 정신을 아껴 보존한다〔收拾身心 保惜精神〕'20 는 주자(朱子)의 설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 유직은 도가(道家)의 학설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유직은 또 이이가 사단칠정(四端七情)21 에 대해서 논한 것은 이황과 다르다고 헐뜯었습니다. 대저 《맹자》에서 사단을 말한 것은 단지 정(情) 중에서 선(善)한 한쪽만을 거론하여 말한 것이고,22 《예기(禮記)》에서 칠정을 말한 것은 선하고 악한 감정을 모두 거론하여 말한 것입니다.23 이황이 이단과 칠정을 상대(相對)해서 논한 것이 비록 권근(權近)의 구설(舊說; 입학도설(入學圖說))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이가 일찍이 이에 대해 변론하여 말하기를 ‘대저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유물이다. 만약 의심만 쌓아 두고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 의리는 끝내 어두워진 채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지은 《주역(周易)》의 전(傳)으로 말하면 일생의 정력을 모두 바친 역작이라고 할 것인데 주자가 잘못된 곳을 지적한 곳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주자의 말에 대해서도 요로(饒魯)가 잘못을 지적한 곳이 많았고 진력(陳櫟)은 ‘주자에게 아첨하는 신하가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24

그런데 더구나 이이의 학문으로 말하면 식견이 월등하게 고매할뿐더러 언론이 정밀하고 타당하여 백세(百世) 뒤에까지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통기국(理通氣局)25 과 같은 하나의 구(句)로 말하면 선현(先賢)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인데 유직은 그만 그 학문이 이기(理氣)를 일물(一物)로 여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설(邪說)이 횡행하게 되면 그 화는 홍수나 맹수의 해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신은 삼가 이 점을 걱정하는 바 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관학(館學)이 유생들이 권당(捲堂)할 경우에는 열성(列聖)이 반드시 선유(宣諭)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로 볼 때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들이 망녕된 말을 했다고 하여 노하신 나머지 선유하지 않는다면 인재를 대우하는 도리가 되지 못할 듯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함경도의 유생들이 양현(兩賢)을 위해 상소하니 상이 엄한 유지(宥旨)를 내렸다. 또 영남의 유생들이 유직이 처벌받았다는 이유로 과장(科場)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관북(關北)지방이 비록 궁벽(窮僻)한 곳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본성을 그 사람들도 모두 평등하게 품부받았으므로 지금 두 신하의 도덕을 흠모한 나머지 서로들 자발적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 유생들이 과연 유직이 바른 도리를 행하다가 처벌받았다고 여긴다면 스스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과거 시험장에 떼로 몰려와서 공공연히 멋대로 난돌을 부렸으니 이는 바로 요군자무상(要君者無上)26 의 죄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의 비답 중에 언짢게 여기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공이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공이 더욱 강력히 청하자 마침내 체직(遞職)을 명하였다. 공이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말을 상이 듣고는 재차 사관(史官)을 보내어 만류하였으나 공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 뒤에 또 어떤 일로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의 산직(散職)이 삭직(削職)되었다. 그러나 상이 공을 생각하는 마음은 끝이 없었다. 계사년(1653 효종4)에 공의 아들 복양(復陽)이 입시(入侍)했을 때 상이 그를 불러 앞으로 나아오게 한 뒤에 공의 기거(起居)를 물어보고는 유지(有旨)를 내려 복양으로 하여금 공에게 가서 유고(諭告)하게 하니 공이 상소하여 감사의 뜻을 진달하였다.

갑오년(1654)에 도성(都城)에 큰물이 졌다는 말을 듣고는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변경(汴京)에 큰물이 지자 이강(李綱)이 이적(夷狄)의 침입으로 병란(兵亂)을 당할 조짐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정강(靖康)의 화(禍)27 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병자년에 본조(本朝)의 경우도 그러하였는데 이번의 수재(水災)는 병자년보다 더 심하다고 합니다. 마약 전일과 같은 환란이 다시 있게 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옛날에 맹자가 등 문공(滕文公)에게 ‘임금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선행에 힘쓸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28 그런데 힘을 쓰는 방도로 말하면 방책(方冊)에 실려 있는 이제(二帝; 요(堯)와 순(舜))와 삼왕(三王; 하우(夏禹)와 상탕(商湯)과 주(周)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군신(君臣)이 논한 것 및 공자(孔子)와 맹자의 말을 보면 알수 있으니 오직 이를 성심껏 믿고 따르면서 힘써 행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렸다.

그 뒤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조복양(趙復陽)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조상(趙相)에게 유고(諭告)하게 하였는데도 조상이 오지 않고 있다.”라고 하고는 다시 하유(下諭)하여 불렀으나 공이 또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을미년(1655 효종6) 2월에 병이 들자 상이 재차 내의(內醫)를 파견하고 약물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힘을 내어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다가 3월 10일에 이르러 고종(考終)하니 춘추 77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애도하며 철조(輟朝)하고 조문과 부의(賻儀)를 의례(儀禮)대로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 드렸다. 그해 6월 계해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건향(乾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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