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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神道碑銘)



1. 들어가며 2. 경세제민의 길 3. 포저의 성현지도
4. 포저의 의기지학 5. 포저의 가계 6. 명(銘)


2.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길

신해년(1611)에 비로소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수찬(修撰)과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이 문원(文元; 이언적(李彦迪))과 문순(文純;이황(李滉)) 두 선생을 추악하게 헐뜯자 공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변론했다가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이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공을 지기(知己)로 허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시사(時事)가 더욱 크게 변하면서 폐모(廢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공이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와서 1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빈사(賓使)가 조사(詔使)를 영접할 때 공을 제술관(製述官)으로 차출하였고 도원수(都元帥; 한준겸)가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지명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은 거주하는 곳이 경성과 가까운 만큼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하여 광주(廣州)에서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도고산(道高山) 아래에다 띳집을 얽어 만든 뒤에 경사(經史)에 침잠하며 스스로 즐기는 한편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 및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와 함께 끊임없이 학문을 강론하였다.

계해년에 인묘(仁廟)가 즉위하였다. 조의(朝議)가 “이제 새로 정사를 펼치게 된 때에 전조(銓曹)에는 일등(一等)의 인물을 등용해야만 한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으뜸으로 꼽혀 좌랑(佐郞)이 되고 나니 공평하고 합당하게 모든 일을 극진하게 처리하니 물론(物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공이 일찍이 윤대(輪對)할 적에 진언(進言)하기를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의 임금에게 미치지 못한 까닭은 학문의 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귀담아 들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산해(李山海)의 무함을 받아 관직을 추삭(追削)당한 일에 대해서 공이 극력 신설(伸雪)하며 변론하였다. 폐세자(廢世子) 지(지)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상태에서 도망쳐 나온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죽음을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그 의논에 동조하였다.

재생선혜청(裁省宣惠廳) 낭청(郎廳)을 겸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민간에 있으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재처(裁處)하고 구화(區畵)하는 것 모두가 시의(時宜)에 합당하였는데 이서(吏胥)들이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동요시켰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극론(極論)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정자(程子)의 말에 의하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아름다운 뜻을 지닌 뒤에야 《주관(周官)》의 법도를 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3 신이 삼가 우려하는 것은 전하의 뜻이 혹시라도 확고하게 세워지지 않아서 고대의 제왕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못하실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심술(心術)의 은미(隱微)한 사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일이 대부분 고식적(姑息的)이고 구차하게 된다면 성대한 정치와 교화가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뉘는 기틀을 깊이 살펴서 현인을 가까이하고 학문에 매진하여 날마다 정일(精一)4 •극복(克復)5 •격치(格致)•성정(誠正)6 의 공부에 힘쓰소서.”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반란이 평정된 뒤에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거쳐 응교(應敎)와 전한(典翰)을 역임한 뒤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진언하기를 “《대학(大學)》과《논어(論語)》야말로 만세토록 학문을 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속에 온축된 그 의리를 끝까지 연구하여 몸과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사이에 징험하면서 실천해 나간다면 은현(隱見)과 표리가 명백하고 순수해져서 정령(政令)을 베풀고 사업을 행하는 것 모두가 천지의 화육(化育)처럼 대공지정(大公至正)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언(正言) 홍호(洪鎬)가 박승종(朴承宗)을 추장(追奬)할 것을 청하자 헌부(憲府)가 망언을 했다고 탄핵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만약 그의 말이 망녕되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망녕되지 않은 말까지 나오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체직(遞職) 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들어와 승지(承旨)로 승진하면서 선혜청(宣惠廳)의 일을 겸관(兼管)하였다. 이때 진언하며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분명하게 조칙(詔勅)을 내려서 각 주(州)와 현(縣)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는 돈과 곡식의 총계를 빠짐없이 작성하게 한 뒤에 이를 대대적으로 균등하게 조절하도록 함으로써 각 주와 현마다 빈부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지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의 고락(苦樂)이 또한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7 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백성을 기르는 정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 오리(梧里) 이공(李工; 이원익(李元翼))이 대동법(大同法)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다시 쟁론하여 아뢰기를 “만약 뭇사람들의 말에 동요된다면 이는 작사도방(作舍道傍)8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국가의 안정된 정치를 이루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이공이 탄식하기를 “우리와 같은 사람은 참으로 조모(趙某)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또 승지의 신분으로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하였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궁리(窮理)하고 격물(格物)하는 학문을 힘쓰지 않으면 안 되고 관대하게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반드시 명선(明善)•성신(誠身)9 하는 공부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에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대궐에 들어가 위문하고 곧바로 돌아가려 하자 공이 극력 만류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오늘날의 숙덕(宿德)으로 그보다 나은 이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비록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응당 불러 들어야 할 것인데 지금 이미 올라온 터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야 어찌 될 일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도승지를 사직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공의 청검(淸儉)과 재학(才學)이야말로 이 직임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공이 승도(僧徒)를 환속시키되 연한을 정하여 군역(軍役)을 부담 지우지 않으며 기꺼이 따를 자가 분명히 많을 것이라고 청하였고 또 서쪽 변방의 모병(募兵)과 둔전(屯田)에 대한 바람직한 계책을 논하였으며 난리를 피해서 우리나라에 온 요동(遼東)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켜 중국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청하는 동시에 오랑캐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이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소를 올려 논하였으나 또 시행되지 않았다. 어버이 봉양을 위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정묘년(1627, 인조5)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이 선박을 거두어 모아 사녀(士女)를 모두 싣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 오랑캐가 물러가자 행조(行朝)에 달려가 위문하고는 소를 올려 서쪽 변방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어떤 이름 있는 재신(宰臣)이 훈적(勳籍)에 외람되게 참록(參錄) 되었으므로 이를 논하여 삭제시켰다.

이에 앞서 조의(朝議)가 사친(私親)에 대한 복제(服制) 문제로 의논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다가 천부(遷祔)10 할 때를 당하여 별도로 예묘(禰廟; 부친의 사당)를 세울 것을 청하는 자가 있자 공이 변론하기를 “제왕의 가문에서는 형의 신분으로 아우의 뒤를 계승했을지라도 부자(父子)라고 이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손자의 신분으로 조부의 뒤를 계승한 경우에만 유독 부자의 의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예위(禰位)가 없게 되는 것은 의심할 일이 아니니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의 뒤를 이은 경우11 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中興)한 것은 실로 창업(創業)한 것과 같은데도 위로 원제(元帝)를 계승했다고 하면서 별도로 사친(四親)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朱子)는 백승(伯升)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서 사묘(私廟)를 받들게 하는 것이 더 좋았다고 하였습니다.12 지금 이렇게 큰 전례(典禮)에 대해서 어찌 황당무계한 한두 사람의 말만 믿고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능원군(綾原君; 인조의 아우) 보(俌)가 주재하게 되었는데 그 부제(祔祭)를 행할 적에 상이 직접 주재하려고 하자 공이 또 쟁집(爭執)하였다.

얼마 뒤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기사년(1629,인조7)에 사체(辭遞)된 뒤에 국자(國子)와 삼사(三司)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연평(延平) 이귀(李貴)가 붕당을 논하면서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서한13 을 인용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에도 폐단이 없을 수 없다.”라고 하니 공이 부제학의 신분으로 차자을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현이 그렇게 말한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궁구해 보지도 않고서 무작정 폐단이 있다고 단정하시니 이는 이치를 살피는 것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성현을 경시한 잘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왕자(王子)의 사전(私田)에 세금을 면제해 주면 안 된다고 논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는 일에 깊이 유의하지 못하시는 일이 혹 있지 않나 삼가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일찍이 죄가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나공만갑(羅公萬甲)을 유배 보내고 또 장공 유(張公維)를 외직(外職)으로 좌천시켰으므로 공이 간쟁하였으나 상이 무시하였다. 사체(辭遞)하여 대사성이 된 뒤에 관학(館學)의 제생(諸生)에게 글로 타이르면서 먼저 《근사록》을 읽어 문로(門路)를 바르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학제(學制)에 대해서 논계(論啓)하니 상이 모두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경오년(1630) 봄에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하면서 민생의 고통스러운 정상을 극론(極論)하고는 그 기회에 풍정(豐呈)과 묘향(廟享)에 관한 일을 논하니 상이 많이 채납(採納)하였다. 윤공 황(尹公煌)이 어떤 일을 말하다가 상의 미움을 받자 공이 아뢰기를 “궁금(宮禁)에 관한 일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바인데 감히 말하였으니 그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이 여악(女樂)을 교습시킬 것을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초(楚) 나라는 쇠칼이 날카롭고 광대의 솜씨는 졸렬하다는 말을 듣고서 진왕(秦王)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습니다."14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민생이 곤고한 데다 하늘이 경고하고 있는 때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황성(皇城)이 적에게 포위되어 계엄(戒嚴)을 풀지 않고 있다 하니 오늘날의 일을 보면 모두가 통곡해야 할 일들뿐입니다. 따라서 군신(君臣) 상하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오직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기악을 한데 모아 놓고 시끄럽게 떠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름에 가도(椵島)의 비장(裨將) 유흥치(劉興治)가 그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살해하자 상이 우리나라 경내에서 왕인 (王人; 중국 조정이 파견한 사람)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듣건대 유흥치가 중국 조정에 주품(奏稟)해서 한 일이지 제멋대로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파병(罷兵)할 것을 청하였다.

헌부(憲府)가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을 논하자 상이 노하여 문책하니 공이 간하기를 “전하께서는 남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고 용인하여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합니다. 정치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실로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궁중의 외간의 여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온 일이 있자 공이 진언하기를 “전하께서는 자기 몸을 엄하게 단속하고 계시니 여색에 빠져서 미혹될 걱정은 물론 없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군자가 기미를 살펴서 점차 확대되지 않도록 미리 걱정을 해야 하는 것처럼 신하 역시 임금을 사랑하면서 그 기미가 보일 때에 예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고 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겁을 낼 줄 아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화공(畵工)이 대궐 안에 들어와서 몇 달 동안이나 나가지 않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어찌 완물상지(玩物喪志)15 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한결같이 성인을 모범으로 삼아 이 마음에 해를 끼치는 편파적인 기호(嗜好)를 일체 끊어 버리시고 그리하여 본원(本源)의 바탕이 청명하고 순수하게 되어 티끌만큼이라도 가려지는 바가 없게 함으로써 온갖 교화가 이로부터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떤 일이든지 노여움 때문에 촉발되는 경우는 반드시 그 바름을 잃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빈어(嬪御)를 두지 않으신 것은 바로 제왕의 훌륭한 절행(節行)이라고 할 것인데 지금 신하가 아뢴 말 때문에 갑자기 간택하라는 명이 내리셨으니 이는 노여움으로 인한 충동을 면치 못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이 병 때문에 누차 직명(職名)을 사양하곤 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치고 다시 옛 관직으로 복귀한 뒤에 천변(天變)을 인하여 더욱 절실하게 경계하는 말씀을 올렸다. 상이 예조 판서로 승진시키면서 이르기를 “경은 재질과 덕망이 모두 우수하니 직무에 마음을 다하라.”라고 하였다. 명(明)나라의 반장(叛將)16 이 오랑캐에 투항하여 사기(事機)가 걱정스럽게 되자 공이 은밀히 계책을 진달하였으며 또 과거 제도를 변통할 것과 사유(師儒)를 잘 가려서 인재를 양성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삼사(三司)가 사친(私親)을 부묘(祔廟)하는 일과 관련하여 쟁론하다가 모두 멀리 유배당하자 공이 대사헌의 신분으로 극력 변호하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서 체직되었다. 전조(銓曹)가 부제학(副提學)은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관례(慣例)를 무시하고 제수할 것을 청한 결과 다시 임명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된 뒤에 전결(田結)과 조세(租稅)에 대한 폐단을 논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을 겸임하게 하자 공이 사장학(詞章學)을 익히지 못했다고 사양하니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사양했어도 허락하지 않았던 고사를 상이 인용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인(正人)을 헐뜯는 한 패의 무리가 또 투소(投疏)하여 무함하였다. 공이 당시에 학직(學職;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으로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깊이 걱정한 나머지 상소하여 극론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자 학직을 사체(辭遞)하였다. 이때 제멋대로 주장하는 일이 마구 발생하여 사태를 안정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공이 재차 상소하는 한편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매우 자세히 논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이는 말할 것도 없이 현인이다. 내가 그의 도덕을 부족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중한 전례(典禮)이기 때문에 감히 섣불리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 봄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체직된 뒤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오랑캐와 이미 틈이 벌어졌으므로 공이 조목별로 여덟 가지의 계책을 올렸는데 그것은 즉 첫째 대중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것과 둘째 아랫사람의 의견을 위에 통하게 하는 것과 셋째 무사(武士)들을 광범위하게 시취(試取)하는 것과 넷째 장수가 될 인재를 가려 뽑는 것과 다섯째 토병(土兵)을 쓰는 것과 여섯째 성지(城池)를 견고하게 하는 것과 일곱째 활의 제도를 간편하게 고치는 것과 여덟째 인민을 교도(敎導)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 계책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공이 윤상 방(尹相昉)에게 극언하기를 “지금 화란(禍亂)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사람들의 계책이 이와 같을 뿐이니 반드시 가만히 앉아서 위욕(危辱)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도(江都)에 먼저 들어가서 스스로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상이 이 말에 동의하여 상에게 아뢰었으나 또 시의(時議)에 저지되고 말았다. 가을에 또 예조 판서가 되었다. 명(明)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을 때에 공이 성신(誠信)으로 대하고 속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였다. 상이 강도로 행행(行幸)하려 하였으나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이미 도성에 육박하였으므로 어찌할 겨를 없이 방향을 바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이때 공은 첨추공(僉樞公; 포저의 부친)의 행방을 몰랐으므로 호곡(號哭)하여 동분서주하다가 일단 소재를 파악하고 나서 행재(行在)로 급히 달려가려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오랑캐가 사방에 그득한 상태였다. 이에 공이 통곡하며 물러 나와 남양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와 참의(參議) 심지원(沈之源)과 승지 김상(金尙)과 태상(太常) 이시직(李時稷)과 교리(校理) 윤명은(尹鳴殷)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할 계획을 세우고는 공이 대장이 되었는데 윤계가 갑자기 오랑캐에게 살해되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강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강도로 들어왔는데도 공이 강기슭에 앉아서 떠나려 하지 않자 두 아들이 공을 부둥켜안고 아래로 굴러 떨어진 뒤에 조그마한 배에 공을 끌어올리고 출발하였다. 대개 공은 행재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뒤로는 밤낮으로 통곡만 할 뿐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리가 안정된 뒤에 공을 탄핵한 자가 있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상이 그 전말을 살펴보고는 단지 파직만을 명하였다. 뒤에 대론(臺論)이 다시 일어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독서인(讀書人)이 아닌가. 나는 원래 그가 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재차 상소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조정에 들어가서 다시 두 번이나 사양하니 비로소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허락하였다. 을유년(1645)에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또 간절히 사양하였다. 가을에 세자를 책립(冊立)하자 상소하여 세자를 교도하는 방도에 대해서 극론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이와 함께 전하께서도 학문에 힘쓰고 덕을 발전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에 또 전에 했던 말을 거듭 아뢰니 상이 표창하여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 참찬(參贊)의 임명을 받자 조정에 들어가서 사은(謝恩)하고는 나이가 많다고 인혐(引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잇따라 관직을 제수하자 공이 마지못해 직무를 수행하면서 때때로 격언(格言)을 진달하였다.

기축년(1649)에 인묘(仁廟)가 승하(昇遐)하였다. 이때 초상(初喪)에 관한 의절(儀節)중에는 공이 정한 것이 많았다. 또 공이 장릉(長陵)대신 다른 길지(吉地)를 선정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엇갈려서 저지되었다. 우의정에 임명되고 다시 좌의정으로 옮겨진 뒤에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장례를 마쳤다. 그리고는 차자를 올려 학문에 힘쓰며 좋은 정치를 이루는 방도와 현인을 존중하며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에 대해서 논하는 한편 10여인의 인물을 논하며 천거하였다.

이때 효묘(孝廟)가 바야흐로 뜻을 가다듬고 좋은 정치를 행하려고 하였으므로 공도 정성을 다해서 보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전후로 진언한 것을 보면 모두 《서경》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해야 한다〔危徵精一〕’는 것으로 성학(聖學)의 요체를 삼고《맹자(孟子)》의 ‘사람이게 차마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어진 정사〔不忍人之政〕’로 정치의 근본을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전부(田賦)와 병제(兵制)에 이르기까지 모두 철저히 대책을 강구하여 본말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건의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 것을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불량한 무리가 몰래 청국(淸國)과 내통하여 화단(禍端)이 이미 싹튼 것을 공이 간파하고는 사변(事變)이 발생하기 전에 주도 면밀하게 방비할 것을 청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에 오랑캐의 사자 6, 7명이 우리나라에 오고 또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국경을 위협하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경악하였는데 공이 지성으로 주선한 결과 사태가 역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말미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모부인(母夫人)을 천장(遷葬)하니 상이 특별히 은례(恩例)를 베풀었다.

학사(學士)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가 인묘(仁廟)의 시호를 논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미움을 받자 공이 그들을 변호하는 말을 하니 상이 더욱 노여워하여 두 사람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대죄(待罪)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충실(忠實)한 것이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과 부제학(副提學) 조석윤(趙錫胤)이 또 심대부와 유계의 일을 논하다가 파직되니 공이 물러나겠다고 청하여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심대부와 유계가 마침내 풀려났으나 공은 떠나게 해 줄 것을 더욱 강력히 청하였다.

인묘의 소상(小祥) 때에 공이 연복(練服)의 제도에 대해서 논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상이 사직(社稷)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적에 음악의 사용여부를 의논하게 하니 공이 월불(越紼)17 의 일을 예로 들며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또 진언하기를 “선(善)을 분명히 알아서 자기 몸을 참되게 하고 인(仁)을 추구하면서 덕(德)을 발전시키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사서(四書)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모쪼록 반복해서 깊이 음미하며 일생의 공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의리(義理)가 무궁한 것을 알 수 있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덕이 성대하게 발전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정 성인(聖人)이 되려고 추구하는 뜻이 있으시다면 글을 읽을 적에 반드시 그 의미를 찾고 행동으로 옮길 적에 반드시 그 법도를 따르려고 해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천리(天理)를 반드시 완전히 회복하고 자기의 사욕을 반드시 말끔히 제거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민(生民)들이 자연히 모두 제자리를 얻게 되어 만세토록 성인이라고 일컬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을 하자 공이 긴요한 것을 뽑아내어 조목별로 나열한 뒤에 그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조신(朝臣)의 붕당(朋黨)을 의심하자 공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치를 살필 것을 청하였다. 또 영아(嬰兒)에게 군역(軍役)을 배정하는 것과 양녀(良女)가 낳은 자식을 사노(私奴)가 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하였다. 또 한집안에 군역을 배정받는 자가 3인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은 다시 배정하지 못하게 할 것과 승려가 된 자에게는 미곡 3석을 납부하게 할 것과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서얼(庶孼)에 이르기까지 군역이 없는 자들 모두를 대상으로 포목 1필(匹)씩 내게 하여 군병을 양성하는 자본으로 삼을 것을 아뢰었다. 이 모두는 공이 시의(時宜)를 헤아려 판단해서 시행하려고 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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