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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군(豐壤君) 조공(趙公) 신도비명



풍양군신도비
공의 휘(諱)는 경(儆)이요, 자(字)는 사척(士惕)이다. 성(姓)은 조씨(趙氏)요,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시조(始祖) 휘 맹(孟)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三國)을 통일하고, 벽상개국 공신(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가 되었다. 그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또 문하시중 평장사가 되었고, 평장사의 4대손인 휘 계팽(季砰)이 승지가 되엇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지진(之縝)은 공조참판으로 추증 받았고, 조부 휘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참판으로 추증 받았고, 고(考)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병사(咸鏡南道兵使)로 좌찬성을 추증받았다. 비(妣)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생원 세임(世任)의 딸이다.

공이 비록 무업(武業)를 닦긴 하였지만 사서(史書)에 널리 통하고 고사(古事)를 많이 알아서 유사(儒士)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늦은 나이에 등제(登第)하긴 하였지만 매우 성망(聲望)이 있어서 사람들 모두가 대장(大將)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즉시 선전관(宣傳官)과 비국랑(備局郞)에 선발되었으니, 이는 바로 신진(新進) 무신(武臣)의 현직(顯職)이었다.

외방으로 나가서 의주판관(義州判官)이 되었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감찰을 거쳐서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제수받았다.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승진하여 인산첨사(麟山僉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러 떠나기도 전에 다시 만포첨사(滿浦僉使)로 바뀌었으니, 이는 만포가 인산보다 중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을 떠나서 중로(中路)에 이르렀을 때 또 강계부사(江界府使)의 임명을 받았다.

공은 부임하는 곳마다 폐해를 고치고 비용을 절감하고 호강(豪强)을 억누르고 소민(小民)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그리고 공은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결백한 자세를 유지하고 관리를 엄정하게 어거하고 권귀(權貴)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상사(上司)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안정을 취하게 된 것이다. 강계(江界)에 있을 때에 정상(鄭相)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그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공이 고상(故相)의 예(禮)로 대우하였다고 시의(時議; 그 시대의 이론)가 노하면서 탄핵을 하고는 마침내 법사(法司)에 내려 치죄(治罪)하게 하여 관작을 삭탈하도록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상이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열읍(列邑)의 무비(武備)를 점검하도록 하였는데, 신립이 공을 임명하여 막하(幕下)의 도총제(都總制)로 삼았으므로 관서(關西)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왜적이 반드시 친입할 형세였으므로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4월에 왜적이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침략하자 조정이 장수를 선발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공이 영남우도방어사(嶺南友道防禦使)가 되어 그날 즉시 출발하였다. 그러나 창졸간에 많은 병력을 모으기가 어려워서 함께 내려간 인원이 단지 20여 인밖에 되지 않았으나, 공이 뜻은 이미 자기 한 몸을 잊었으므로 장계(狀啓)을 올리면서 “왜적과 싸우게 되면 결코 후퇴하지 않고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라고 하였다.

금산(金山)에 이르렀을 때 휘하의 병력이 겨우 100인에 불과하였다. 그때 왜적과 만나자 사졸(士卒)들이 모두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는데, 공이 독려하여 나아가 싸우게 하니 왜적이 마침내 달아났으므로 공이 기병(騎兵)에게 그 뒤를 쫓게 하였다. 공이 몇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뒤에 있다가 왜적 3명이 풀숲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는 공이 직접 2명의 왜적을 활로 쏘았는데, 왜적 1명이 뒤에서 튀어나와 칼로 쳤으므로 공이 허리와 겨드랑이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에 공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맨손으로 적을 붙잡아 땅에 쓰러뜨리고는 그의 가슴 위에 올라타고서 목을 졸랐으나 손가락이 또 칼날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바로 죽이지 못하였는데, 이때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달려와서 그 왜적을 찔렀다.

왜적이 육지로 올라온 지 열흘이 채 못 되어 경성(京城)까지 올라왔는데, 우리나라는 대소(大小)의 장리(將吏) 모두가 소문만 듣고도 흩어져 달아나기만 하였을 뿐 감히 왜적과 맞서서 싸우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공이 홀로 110인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을 거느리고 왜적과 육박전을 벌린 끝에 그들을 패주시켰으며 또 죽이고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공이 만난 왜적이 비록 큰 병력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왜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이 부상당한 상처가 심해서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호남(湖南)의 구례현(求禮縣)으로 가서 조섭(調攝)하였다. 그러다가 상처가 모두 아물기도 전에 병든 몸을 이끌고 국가를 위해서 다시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6월에 연천(漣川)에 이르렀을 때 대부인(大夫人; 모친)을 만나 열흘 정도 머물렀다. 이때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 권징(權徵)이 계청하여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 가을에 대부인이 별세하였는데, 순찰사가 기복(起復)을 청해서 공이 다시 대장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공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당시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독성(禿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용인(龍仁)의 왜적이 공격해 왔다. 그러나 여러 의병과 관군은 모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휘하의 수십 기병(騎兵)을 인솔하고 성원(聲援)하면서 왜적을 따라 진퇴(進退)하며 끝내 피하지 않자 왜적이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물러나 돌아갔다. 권공(權公)이 공의 의리에 감격한 나머지 상하게 아뢰기를 “신이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왜적 사이에 출입할 적에 기내(畿內)의 장교(將校) 중에 한 사람도 응원하는 자가 없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성원한 사람은 오직 조경(趙儆)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하면서, 공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아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였다.

당초 수원부사(水原府使)인 김취려(金就礪)의 소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이 부사의 일을 행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김취려가 스스로 나왔으므로 공이 사양하고는 물러나 광주(廣州)의 농사(農舍)로 돌아온 뒤에 상제(喪制)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권공이 공을 중군장(中軍將)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공이 의리상 감히 물러날 수 없어서 곧장 나아왔던 것이다.

계사년(1593) 정월에 중국 군대가 평양(平壤)과 개경(開京)의 왜적을 소탕하고는 머지않아 경성(京城)을 수복하려고 하자, 권공이 군영을 옮겨 중국 군대와 힘을 합치기로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먼저 지형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하고는 마침내 밤에 강을 건너 군대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 하나를 구했으니, 이곳이 바로 행주(幸州)이다. 그리하여 곧바로 돌아와서 보고하자 권공이 행군하여 그곳에 가서 진을 쳤다.

이때 권공이 말하기를 “중국군대가 대거 출동하였으니 왜적도 필시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목책(木柵)과 같은 것을 설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고립무원의 우리 군사가 왜적의 많은 군사와 가까이 있으니, 성에 목책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나, 권공은 이 건의를 듣지 않았다. 이때 마침 제찰사인 정공(鄭公; 정철(鄭澈))이 양천(陽川)에서 권공을 불러 상의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권공이 몇 칠 동안 돌아오지 않고 이었다. 이에 공이 제군(諸軍)에게 목책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도록 하였으나 제장(諸將)이 따르려 하지 않자. 공이 “군중(軍中)에서는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법도가 있다.”라고 설득을 하니 제장이 모두 공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이를 사이에 목책을 설치하는 일이 이루어지자 대중이 마음속으로 매우 든든하게 여겼으며 권공 역시 와서 보고는 기뻐하였다.

목책을 설치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왜적이 과연 무리를 총동원하여 쳐들어왔다. 그들의 병력은 7, 8만 명쯤 되었는데, 당시 행주에 주둔한 아군은 5, 6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활을 쏠 수 있는 자는 겨우 70여명에 불과하였다. 왜적이 새벽부터 행동을 개시하더니 조금 뒤에는 몇 리에 걸쳐 그들먹하였으며 해가 뜨자 칼 빛이 온 들판을 가득 메웠으므로, 군사와 백성들 모두가 겁에 질려서 핏기가 없었다. 왜적의 무리가 성책(城柵) 아래까지 다가왔으나 성책 안의 사람들 모두가 결사적으로 싸웠으므로 왜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가운데 달아났다. 그 뒤에는 왜적이 병력을 나누어 번갈아 공격을 하면서 전자(前者)가 물러나 휴식을 취하면 후자(後者)가 그 뒤를 이어 공격하곤 하였는데, 이와 같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면서 정오를 넘기는 동안 왜적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렸다.

그러나 왜적이 이번에는 긴 나무를 모아 누대 모양의 높은 교자(轎子)를 만드는 뒤에 수백 인이 메고 올라와서는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 인을 태워 아군의 진중(陣中)에 사격하였다. 이에 공이 지자총통(地字銃筒)을 가져오게 하여 포전(炮箭; 장군전(將軍箭))마다 대도(大刀) 두 개씩을 묶게 한 뒤에 왜적의 교자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발사하게 하니, 마치 천둥이 진동하듯 포탄이 날아가면서 교자가 산산조각이 나고 교자 위에 있던 왜적의 지체(肢體)가 갈가리 찢겨 땅 위로 날아가 떨어졌으므로 왜적이 더 이상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를 못하였다. 그러다 때마침 날이 어두워지자 도망가기 시작하였는데, 공이 용감한 40명의 기병을 내보내 추격하게 하면서 명령을 내리기를 “우리의 용기만 보여 주면 되니 끝까지 추격하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에 기병이 몇 리까지 추격하다가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왜적의 태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도 모두 중상을 입어서 신음하는 소리가 며칠 동안이나 끊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대첩(大捷)을 거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 순찰사와 제장(諸將)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승리는 모두 공의 힘이다.” 하였으니, 이는 공이 성책을 설치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전투가 한창일 때에 공이 시석(矢石; 화살과 돌팔매) 가운데에 우뚝 서서 장사(將士)들을 독려하기를 “땅에 형세가 유리한 데다가 사람들이 또 화합하여 단결하였으니 우리는 필승을 거두리라고 확신한다. 또 승리하지 못한다고 하드라도 물러나서는 살아날 길이 없으니, 물러났다가 똑같이 죽기보다는 차라리 왜적을 죽이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사람들이 크게 분발하였다. 순찰사가 힘이 빠져서 막사(幕舍)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강변으로 내려가서 도주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므로, 공이 순찰사를 모시고나와서 군중(軍中)에 보이며 “대장이 여기에 계신다.”라고 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와 같은 공의 행동 모두가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왜적이 그 동안 팔도(八道)를 횡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는데, 그들이 대패한 전투로는 오직 평양(平壤) 전투와 이곳의 전투뿐이었다. 그런데 평양 전투로 말하면 용감무쌍한 6만의 병력을 가지고, 깊이 들어왔다가 고단해진 왜군을 섬멸한 것이니, 그 형세가 마치 바윗돌로 달걀을 눌러 으깨는 것과 같았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이곳의 전투로 말하면 수백 명의 병력을 가지고 7, 8만이나 되는 강대한 왜적을 상대하였는데도 그들을 크게 무찔러 퇴각하게 하였으니, 평양 전투와 비교하면 난이도에 있어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고 할것이다.

이때에 중국 장수인 이제독(李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바로 얼마 전에 벽제(碧蹄)에서 패하고는 하루 내내 달아나 봉산(鳳山)으로 회군(回軍)해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라 안의 사기가 모두 저상(沮喪)되어 있었음은 물론이요, 제독 역시 왜적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다시 군대를 출동시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는 처음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다가 노획한 수급(首級)과 기장(器仗)을 앞에 진열해 놓자 제독이 크게 기뻐하면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이에 왜적이 방금 패한 데다가 중국 군대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즉시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상이 이 일을 무척 가상하게 여겨 장려하는 뜻으로 순찰사에게 두 자급(資級)을 더해 주고 공에게는 하나의 자급을 더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삼았다. 그리고는 경성이 수복된 뒤에 유홍(兪泓)를 유도상신(留都相臣)으로 삼고, 공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았다. 대가(大駕)가 돌아오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국(局)을 하나 설치하고 병사를 모집한 뒤에 절강(浙江)의 진법(陣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그 국의 명칭을 훈련도감(訓鍊都監)이라고 하고는 공을 그 대장으로 삼았다.

당시에 큰 난리를 격은 뒤라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줄을 이었으므로 군병이 되어 급료를 받고 싶고 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뇌물을 주고 청탁하는 일이 분분하게 일어났는데, 공이 한 길 담장을 뛰어 넘거나 미곡 1석(石) 무게의 바위를 들어 올리는 자들만 들어오게 한 뒤에 하나하나 시험을 치르게 하고 사정(私情)을 두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병이 모두 나이 젊은 정예 군사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열심히 훈련시키면서 매달 교육과정을 설정하고는 반드시 직접 살펴보았으므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기예(技藝)가 정묘(精妙)해지고 융진(戎陣)이 정제(整齊)되기에 이르렀다. 상이 간혹 강습하는 것을 친림(親臨)하곤 하면서, “오합지졸을 훌륭한 장수에게 맡기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겠는가.”라고 하고는 전후에 걸쳐서 공에게 구마(廄馬)를 하사한 것이 매우 많았다.

갑오년(1594) 가을에 서쪽 변방의 사태가 걱정스러웠으므로 특명을 내려 공을 순변사(巡邊使)로 삼고는 경보(警報)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파견하려고 하였는데 끝내 경보가 없었으므로 가지 않았다. 북방의 번호(藩胡)가 배반하고 심처호(深處胡) 쪽으로 들어갔으므로, 조정이 변고를 걱정하여 북병사(北兵使)을 뽑아서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때 공이 으뜸으로 의망(擬望)되었는데, 유상(柳相)이 아뢰기를 “군병을 훈련시키는 일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 변동시키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로 곤수(閫帥)에 결원이 생길 때에도 병조에서는 감히 공을 의망하지 못하였다.

을미년(1595)에 강도가 연서(延曙)와 벽제(碧蹄) 사이에 출몰하면서 길을 가는 중국군사를 죽이곤 하였는데 군현(郡縣)에서 잡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계책을 세워서 강도를 체포하니 중국 장수가 크게 기뻐하였다. 상이 공에게 하나의 자급을 더해 주도록 명하자 대관(臺官)이 지나치다고 논하였는데, 대관이 누차 아뢴 뒤에야 윤허하고는 공에게 구마를 하사하였다.

병신년(1596)에 7월에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한산(韓山)과 홍산(鴻山) 사이에서 기병(起兵)하였는데, 며칠 사이에 그 무리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일이 보고되자 도성의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조정에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빈청(賓廳)에 나아가서 정예 군사 5, 6백명을 데리고 가서 사로잡아 오겠다고 청하였다. 대신들이 즉시 공의 말을 아뢰며 공을 보내자고 청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공을 위유(慰諭)하면서 술을 하사하고 보내었다. 공이 길을 떠나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이몽학이 패사(敗死)했다는 말을 듣고는 경성으로 돌아왔다.

정유년(1597) 가을에 왜적이 다시 침입하였는데 호남 지방을 거쳐 올라오면서 장차 기전(畿甸)을 육박할 형세였다. 이때 좌상 김응남(金應南)이 영상 유성룡(柳成龍)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훈련도감은 본디 영상이 만든 것이었고 또 영상이 그 도감의 제조(提調)로 있었으므로, 영상이 정고(呈告; 휴가신청)한 틈을 타서 좌상이 중국 장수의 뜻을 빙자하며 도감의 군병을 출동시켜 왜적을 막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도감의 일을 잘못되게 함으로써 영상을 밀어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래 도감이 설치된 이래로 상을 시위(侍衛)하는 일은 전적으로 도감의 군병을 활용하였는데, 왜적이 이미 침입한 상황에서 상이 경성을 떠나야 할 일이 혹시라도 생길 경우에는 시위하는 이을 허술하게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영상이 강력하게 그 일을 반대하며 쟁집(爭執)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좌상의 주장을 따라서 공을 보내며 도감의 군병을 출동시켰다가, 영상의 말을 듣고는 그 군병을 나누어 절반의 병력은 서울로 돌아와 시위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공이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간 군병의 숫자는 400명에도 차지 않았다.

그런데 공이 행군하여 용인(龍仁)에 도착했을 때에, 도원수(都元帥) 권공(權公; 권율(權慄))이 입조(入朝)하여 공을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가 그와 함께 진격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그곳에 며칠 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다. 때마침 왜적이 소사(所沙)에 이르렀다가 중국 장수 마귀(麻貴)에게 패하여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상(金相)의 당인(黨人)들이 공이 두류(逗留)했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중로(中路)에서 공이 머물러 있었던 것은 권공의 뜻이었던 만큼 공의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행해지지 않아서 공이 예전과 같이 직책을 수행할 수가 있었다.

무술년(1598) 봄에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특명으로 판윤에 제수되었는데, 예전에 공을 논핵(論劾)했던 자가 다시 논하면서 “사람과 직책이 서로 걸맞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상이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또 이르기를 “사람과 직책이 서로 걸맞지 않는 현상은 온정이 모두 그러한데, 인재를 다른 시대에서 빌려 올 수는 없는 일이다. 조경(趙儆)은 참으로 이 직책에 합당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23 동안 논핵하는 일이 계속되자 상이 윤허하였다.

기해년(1599)에 충청병사(忠淸兵使)로 옮겼다. 그로부터 6일째 되는 날에 회령부사(會寧府使)의 자리가 비게 되자 근도(近道)의 병사(兵使)로 비의(備擬)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마침내 공이 낙점을 받고서 회령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회령부는 번호(藩胡)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부사로 취임한 자들이 대부분 염가(廉價)로 통사(通事)에게 주어 돈피(獤皮; 담비 가죽) 무역을 하게 하였고, 통사는 또 그 값을 깎아서 번호에게 나누어 주고는 정수(定數)를 바치도록 요구하였으므로 번호가 통곡하고 원망하여 배반하고 떠나가는 자들이 많았다. 공이 부임하자 곧바로 통사를 파직시키고 단지 통역하는 한 사람만을 남겨 두고는 돈피 무역을 마침내 근절시켰으므로 번호가 모두 열복(悅服)하면서 칭송해 마지않았다.

경자년(1600)에 노추(奴酋; 누루하치)의 역을 토벌할 적에 공이 좌영대장(左營大將)이 되었는데 급기야 오랑캐의 소굴에 이르렀을 때 남녀가 모두 도망가 숨고 부락이 텅 비어 있었다. 병사(兵使)가 야음(夜陰)을 틈타 오랑캐들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서둘러 군대를 돌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대군이 국경 밖으로 나왔으니 오랑캐에게 위엄을 떨쳐 보여야 마땅하다. 그리고 지금 서둘러서 돌아간다면 날이 어두워진 산골에서 무슨 화란을 당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나 병사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단기(單騎)로 먼저 빠져나가면서 공에게 후위(後衛)를 맡게 하였다. 그런데 오랑캐가 돌아가는 길을 차단한 결과 아군 가운데 오랑캐 수중에 떨어진 자가 많았고 병사 역시 하마터면 적에게 잡힐 뻔했다가 간신히 면하였는데, 공이 후위를 맡아 서행하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행군을 하여 공이 거느린 부대만 유일하게 온전하였다. 우리나라의 경내로 들어와서 군대를 점검해 보니 태반이 따라오지 못하였으므로, 병사가 우독(牛犢) 100여 두를 오랑캐에게 주고 군사들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는 승리했다고 보고하며 공로를 논하였다. 그리고는 감사가 공에게 말하기를 “병사의 공로도 공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번의 전투는 패한 것이요 이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공로를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공로를 보고할 적에 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감사와 병사는 모두 가자(加資)되었지만, 공에게는 상이 없었다.

신축년(1601)에 병으로 체직(遞職)되어 돌아갔다가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탐라(耽羅)는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서 준마(駿馬)를 생산하는 것으로 온 나라에 이름이 났으며, 또 공장(工匠)이 많아서 본부(本府)에 소속된 자들이 5, 6백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섬안의 토지가 척박하여 곡식이 귀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말을 기르는 한편으로 가죽 신발과 같은 종류의 피혁(皮革) 제품들도 만들기도 하여 의식을 해결하였다. 그런데 관리들이 으레 말을 많이 취하고 잡물(雜物)을 만들게 해서 한편으론 권귀(權貴)를 섬기며 한편으론 자신을 살찌웠으므로 사람들이 이곳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땅으로 여겼다.

하지만 공은 부임한 뒤로 몇 개월이 지나도록 말 한 필도 취하지 안았다. 정의(旌義)의 백성 중에 거의 1000필 가량의 말을 기르는 자가 이었는데, 양마(良馬) 1필을 끌고 와서 공에게 바쳤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백성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목사가 부임하는 그날에 바로 말을 잡아 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말을 구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와서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그 말을 받지 않고는 군관 등을 단속하여 겁매(劫買)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부(府)의 장부를 즉시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공장에게는 단지 상공(上供)하는 물품만 제작하도록 하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부역을 시키지 않았다. 제주에서는 녹피(鹿皮)를 상공하였는데, 그 숫자가 1년에 50령(領)이었다. 그리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사냥을 크게 하였는데, 그 이름을 진상렵(進上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목사가 그 틈에 사리(私利)를 꾀할 목적으로 사냥을 하여 간혹 한 달을 넘기기도 하였으므로, 군민(軍民)과 노약자들이 기아에 시달리며 피곤에 지친 나머지 한차례의 사량에 사망에 이르는 자가 수십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에 공이 8월에 한 번 사냥을 하되 그 숫자가 채워지기만 하면 곧바로 중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흉년을 맞아 기근이 들자 공이 아침저녁으로 제공하는 식사의 양을 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달에 감한 곡식이 10석(石)이 넘었는데, 이 곡식으로 제주의 기민(飢民)꽈 입번(入番)한 군사들을 진휼하게 하는 한편, 양 현(縣)에 명하여 기민을 지휼하도록 하였다. 공이 비병(痞病)으로 사직을 하자,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온 경내에서 성안으로 모여들어 공에게 머물러 있어 줄 것을 청한 이들이 하루에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또 수십 인이 바다를 건너가서 제찰사에게 정장(呈狀)을 하여 머물러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체부(體府)가 위에 보고하니, 백성의 소원대로 공을 머물러 있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공이 병이 매우 고질화되었다고 말하면서 파직을 청하여 돌아왔다.

계묘년(1603)에 황해병사(黃海兵使)에 임명되었다. 본영(本營)에서는 예전부터 군인에게 목면(木綿)을 징수하였는데, 사람마다 5필씩 내게 하면서 조량목(助糧木)이라고 이름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3필을 감하여 2필만 납부하게 하고는 모두 무미(貿米)를 가지고 군향(軍餉)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체직되어 돌아갈 무렵에는 비축한 미곡이 무려 5000여 석에 이르렀다. 유영경(柳永慶)이 수상(首相)으로서 국혼(國婚)을 계기로 팔도에 뇌물을 바치도록 요구하자 제도(諸道)에서 대부분 바리로 실어다 주며 그 요구에 응했는데, 공이 보낸 것은 유독 보잘것없었다. 대개 공이 남에게 선물을 많이 주지 않는 것은 평생 늘 행해 온 일로서, 유영경에게만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뒤에 비국(備局)의 평안병사(平安兵使)를 천거할 때 공이 으뜸으로 꼽혔는데, 유영경이 공의 이름을 붓으로 지워 버렸다.

갑진년(1604) 겨울에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했으며 자헌(資憲)의 품계로 올렸다. 병오년(1606)에 북방에 번호(藩胡)가 보고하기를, 심처호(深處胡)가 삼수(三水)를 경유해서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다. 대신(大臣)이 의논하여 공을 남도방어사겸영흥부사(南道防禦使兼永興府使)로 삼았으니, 이는 심처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영흥부는 인삼을 상공(上供)하는 일과 관련한 고질적인 폐단을 안고 있었는데, 공은 응당 상공할 액수를 헤아려서 받아들이고 폐해가 있는 것은 곧바로 없애 버렸다. 8개월이 지난 뒤에 병으로 돌아왔다. 공이 외임(外任)에서 체차되어 돌아오면 그때마다 다시 훈련대장의 직책을 맡곤하였다.

무신년(1608) 2월에 국상(國喪)을 당하자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호위(扈衛)하였다. 6월에 수원방어사(水原防禦使)에 임명되었다. 호위한 공로를 인정하여 공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대간(臺諫)이 논하여 개정하였다. 그리고 뒤에 다시 공을 탐람(貪濫)하다고 탄핵하여 파직하였는데, 여기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공이 황해병사(黃海兵使)로 재직할 당시에 보장(堡將)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후궁(後宮)의 친족이었다. 그가 죄를 지었으므로 추출해야 마땅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궁금(宮禁)과 깊이 교분을 맺고 있으니, 절도사(節度使)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서 마침내 그를 축출하였는데, 당시의 감사는 바로 정사호(鄭賜湖)였다. 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상 정공(鄭公)을 존경할 만한 인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다고 들었으니, 사람이란 참으로 쉽게 알 수 없는 점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곧장 정(鄭)의 귀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와서 그가 마침 대사헌으로 있었기 때문에 공을 탄핵한 것이었다. 공의 청근(淸謹)함에 대해서는 온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 정(鄭)이 비록 옛날에 유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탐람하다고 무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늘을 기만하고 사람을 속이면서 기탄없이 행하는 자’라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공이 국상을 당한 이래로 소식(蔬食)을 하면서 오랫동안 위장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제옹(臍癰)의 병을 얻어 기유년(1609, 광해군1)3월 8일에 동문(東門) 밖의 자택에서 작고하였으니,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3일 동안 철조(輟朝)와 철시(輟市)를 하였다.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부의(賻儀)를 하였으며, 관에서 장례에 곤한 일을 돕게 하였다. 이해 4월 21일에 광주(廣州) 하도(下道) 동천촌(凍川村)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평생토록 뜻을 면하려고 몸을 단속하면서 다른 범인들과는 다르다고 자처하였다. 크고 작은 외직(外職)을 모두 6, 7회나 거치는 동안 모두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영암과 제주 같은 곳에서는 비석을 세워서 공의 덕을 기리기도 하였다. 공은 소싯적부터 권세 있는 자들을 섬긴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잘 섬겨서 승진한 자들을 보면 비루하게 여기면서 그들과 함께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일찍이 외방의 직책을 맡고 있을 적에 후궁(後宮)이 사람을 보내 귀하지도 않은 기물을 요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지극히 구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인신(人臣)의 신분으로 궁금(宮禁)과 통하는 것은 감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집안은 항상 빈한해서 현달한 벼슬아치의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이라고 해야 단지 몇 칸에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누추하기 그지없었다. 공이 집무를 수행할 때에는 어느 것이나 모두 마음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책임만 메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대부인(大夫人)을 보양하며 효순(孝順)한 것이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친상을 당했을 적에 비록 대란(大亂)을 만난 탓으로 말을 타고서 전쟁터를 분주히 누비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삼년상의 기한 안에는 변함없이 소식(素食)을 하였다. 그 당시로 말하면 난리를 당했기 때문에 비록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제(喪制)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때였다. 이처럼 공의 지조(志操)와 환업(宦業)과 행검(行檢)은 도두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공의 형제는 3인이다. 백씨(伯氏)인 휘(諱) 엄(儼)은 일찍 죽어서 후사(後嗣)가 없고, 중씨(仲氏)인 휘 간(侃)은 나의 조고(祖考)이니 공이 막내이다. 부인 영월엄씨(寧越嚴氏)는 부정(副正) 증참의(贈叅義) 서(曙)의 딸이다. 아들은 5인이다. 장남 굉중(閎中)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군수를 지냈고, 다음은 치중(致中)이고, 다음은 극중(克中)이고, 다음은 상중(尙中)이고, 다음 시중(時中)은 현감이다. 손자와 증손으로 남녀가 모두 몇 사람이다.

공이 작고할 때 나의 나이도 이미 삼십을 넘었는데, 어려서부터 공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에 공의 음성과 모습이 아직도 귀와 눈에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 공의 사적(事蹟)을 기록하려니 비감을 금하지 못하겠는데, 어찌 감히 한마디 말이라도 과장되게 수식하여 후세를 속이려고 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위대하도다 공의 공훈이여 / 偉哉厥勳
사직이 이 때문에 안정되었도다 / 社稷以安
외물에 응할 때는 정대하였고 / 應物之正
자기를 지킬 때는 엄격하였으며 / 守己之寒
집안에서는 효성스러웠고 / 孝修於家
관청에서는 성실하였나니 / 勤著于官
이와 같은 미행 모두에 대해 / 凡此美行
사람들이 흠잡지 못했나니라 / 人莫之間
묘비에 이런 사실을 새겨서 / 刻茲墓碑
후세에 길이 보이려 하노니 / 以示無極
공의 모든 자손들이여 / 凡公子孫
이것을 보고서 본받을지어다 / 視此爲則


[참고문헌] 1. 浦渚先生集 墓碑銘
             2. 이상현번역,「포저집 6권」민족문화추진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