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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공휘내양묘갈명(道山公諱來陽墓碣銘)


조문효공(趙文孝公)은 훌륭한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내양(來陽)이여 자(字)는 장길(長吉)이다. 군(君)은 나이 35세로 작고한다. 문효공은 자식이 잠재된 뛰어난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夭折)하였다며, 그 애절한 사연을 묘지문(墓誌文)으로 남긴다. 그 후 47년만에 군의 외손인 김군 주신(柱臣)이 지문(誌文)과 군이 생전에 지은 시(詩) 수 십편을 세당(世堂)에게 가지고 와 군의 묘도(墓道)를 위한 갈명(碣銘)을 요청하였다.

도산공묘표
세당이 묘갈명을 지으며 마음 한편 가슴 뭉클해지는 것이 있다. 세당의 큰형인 세규(世圭) 자(字) 백승(伯承)과 막내 외숙인 윤군징(尹君徵) 자(字) 유원(孺遠)은 군과 유년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었다. 3인은 각각 한 살 차이로 출생을 하는데 군이 가장 어렸다. 그리고 모두 젊어서 요절하였는데 군이 가장 늦게 작고하였다. 나의 큰형이 돌아갔을 때 군은 통곡하며 가슴을 저미는 애통한 아픔을 제문으로 표했으나 유고(遺稿)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만시(挽詩)만 남아있으니 가히 그 도타운 우정을 알만하다. 세당이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지만 외숙부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친구가 많지 않으나 있다면 조장길(趙長吉)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서로의 생각과 취미가 일치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찍이 외숙을 모시고 군을 뵌 적이 있는데 지조(志操)를 더럽힘이 없으며 깨끗함 인품(人品)은 깊은 산중 계곡을 따라 흐르는 청정(淸淨)한 물과도 같고, 세파(世波)를 벗어난 고독한 학(鶴)과도 같아서 비록 어렸을 때일망정 마음속으로 매우 경외(敬畏)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 회상하지만 세월은 이미 많이 지났고, 나의 몸 또한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따를 수 없는 아득함이 있다. 군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바 있는 문효공 익(翼)의 넷째 아들이며 증영의정(贈領議政) 영중(瑩中)의 손자이고 증좌찬성(贈左贊成) 간(侃)의 증손인데 조씨는 본래 풍양에서 나왔으니 고려 시중(侍中) 맹(孟)의 후손이다. 군은 광해6년(1614) 6월 14일에 태어나 인조26년(1648) 6월 14일에 돌아갔다. 군은 나이 20살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지만 그당시 청나라와 화친(和親)에 대한 불만으로 과거응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호해(湖海)로 방랑을 하다 신창(현 충남 도고부근)에 우거(寓居)했다. 조정에서는 등용(登庸)하려 했지만 벼슬길에 오르기를 거부하며 “나는 본래 벼슬 할 뜻이 없다.”하였다.

도산공묘표음기 서계박세당찬
군은 당대의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어쩌다 서울에 오면 늘 내방(來訪)한 선비들이 방안 가득하였고, 시골로 돌아갈 때는 강나루까지 나와 작별의 정을 나누는 벗들이 붐볐으며, 그때 나눈 송별(送別)의 시(詩)가 더러 구전으로 전해지곤 했다.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과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은 “뒤이어 오는 수재(秀才)이니 앞선 세대(世代)들은 양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군은 인간관계가 늘 신중하였고 악을 미워하기를 끓는 물을 더듬을 때 같이 하였으며(바로 버린다는 뜻), 영리(營利)는 하찮은 것으로 여겼고, 주고 받기를 의(義)로서 하고 구차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효(孝)와 우애(友愛)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정성으로 임하니 어버이가 질고(疾苦)라도 있으면 식음을 폐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동기간(同氣間)에 상사(喪事)가 있기라도 하면 슬픔의 정을 나눔이 극진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집상(執喪)을 함에 몸에 너무 무리가 갔으며, 3년 동안이나 나물과 장을 먹지 않았으니 마침내는 병이 되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한다.

배(配) 유인(孺人) 이씨(李氏)는 연안부원군 시백(時白)의 딸이다. 1남2녀를 낳았으니 아들 지헌(持憲)은 공조정랑(工曹正郞)이고, 장녀는 생원 김일진(金一振)에게 출가를 했고 동생은 군수(郡守) 박태두(朴泰斗)에게 출가를 했다. 정랑은 4남2년이니 아들은 명인(命仁), 명형(命亨), 명정(命禎;司評), 명재(命才)이고, 딸은 이근(李根)과 심부(沈溥)에게 출가했다. 명인의 아들은 한위(漢緯)이고 명정의 아들은 한보(漢輔)이다. 생원 김일진은 2남2녀을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 성신(聖臣)과 현령 주신(柱臣)이며, 딸은 이진악(李鎭岳)과 한배도(韓配道)에게 출가했다. 군수 박태두는 1남3녀이니 아들은 필하(弼夏)이고, 딸은 이명진(李明晉)과 진사 유복기(兪復基) 그리고 별검(別檢) 윤택(尹澤)에게 출가했다. 이유인(李孺人)은 성품이 어질고 행실은 단아(端雅)하였으나 군이 돌아가시자 슬픔과 서러움으로 곡기를 끊으시니 그 해 8월 23일 뒤이어 운명하셨다. 처음에는 좋은 묘터를 찾기 위해 광주 북방리(현 반월 직동) 선영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10년 후 효종 8년(1657) 겨울에 찬성공 간(侃)의 유택 밑으로 북방 능선에 이장을 하며 유인 이씨와 합장을 하였다. 빗돌에 글을 지으며 가로되…

천년이라는 세월이 앞에 있었고千歲在前
만년과 억년이 뒤에 있겠지마는在後萬億
이 한 무더기의 흙이야 말로此一堆土
오직 군이 잠든 유택이로다惟君所宅
어찌 재주는 많은데何才之長
어찌 수명은 재촉했던고何命之促
빗돌에 지은 나의 시가 심히 슬프구나我銘甚悲
그 누군가 찾아와 울어 주려나其誰來哭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서계선생집 권13 갈명(碣銘)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1박세당 [朴世堂, 1629~1703]
본관 반남, 자 계긍(季肯), 호 서계(西溪)•잠수(潛叟). 시호 문정(文貞), 참판 정(炡)의 아들이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 16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수찬에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해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反朱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사직(司直)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사변록》 외에 《색경(穡經)》 《서계집》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