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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수조공묘표(丹陽郡守趙公墓表)



단양공묘표
부군(府君)의 휘는 진양(進陽), 자는 여명(汝明)이고, 성은 조씨(趙氏)이다. 풍양(豐壤) 사람이다. 고려시대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휘(諱) 맹(孟)의 후손이다. 높은 관직을 세습하였다. 고조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를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된 한풍군(漢豐君)이다. 증조는 휘가 간(侃)이고 의빈부 도사[儀賓都事]를 지냈고 좌찬성으로 추증되셨다. 조는 휘가 영중(瑩中)이고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을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셨다. 휘가 익(翼)인 고(考)는 좌의정(左議政) 문효공(文孝公) 포저선생(浦渚先生)이다. 비(妣)는 성주(星州) 현씨(玄氏)로 군수 덕량(德良)의 따님이다.

부군은 병오년(1606 선조39) 7월 28일에 태어나셨다. 일찍부터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나셨다. 계유년(1633 인조11)의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셨다. 바로 서사(筮仕)하고, 제사(諸司)를 역임하셨다. 지방으로 나와 금천(衿川), 청양(靑陽), 덕산(德山), 단양(丹陽) 등 고을을 맡아 다스리셨다. 기해년(1659 효종10) 10월 23일에 단양 관아에서 돌아가셨다.

부군의 성품은 어질고 후덕하였으며 간결하고 중엄하셨다. 학술과 행의(行誼)는 가정에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평소의 몸가짐이 보통의 유생들에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사우(士友)들이 모두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여 중하게 여겼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 이후에 과거공부를 폐하셨다. 뒤에 조부인 첨정공의 명으로 비로소 정시(庭試)에 응해 아우 도산공(道山公) 내양(來陽)과 함께 합격하셨는데 도산공은 문예(文藝) 수준이 평소 매우 높았다. 글제[試題]가 나왔을 때 미리 지어 놓은 것이 있었으므로 도산공이 부군에게 청하기를,

“저는 마땅히 다시 짓겠습니다. 이것은 형님이 써서 올리시지요.”
하였다. 부군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네가 하지 않는 것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
하셨다.

부군이 평소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인재 선발하는 일을 맡고 있을 때에, 대헌(臺憲)에 공을 의통(擬通)하였다. 비망(備望)을 끝내고 개정(開政)하기 전에 부군이 돌아가셨다.

대개 부군의 천성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문효공의 상을 지낼 때 삼년 동안 채소만 먹어 몸이 상해 병이 나 54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아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전처[前配]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학생(學生) 익평(翼平)의 따님이다. 1녀를 낳으셨는데, 사인(士人) 유원(柳源)에게 시집가셨다. 후처[後配]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첨지중추(僉知中樞) 대항(大恒)의 따님이다. 1남 3녀를 낳으셨다. 아드님의 이름은 지한(持韓)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장녀는 장령(掌令) 윤추(尹推)에게 시집가셨으니, 바로 나의 할아버지[祖考]이시다. 차녀는 직장(直長) 윤징주(尹徵周)에게 시집가셨다. 막내 따님은 현감(縣監) 윤이수(尹以壽)에게 시집가셨다. 통덕공은 관찰사(觀察使) 김홍욱(金弘郁)의 따님에게 장가드셔서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명적(命迪)이고 진사(進士)이다. 1녀의 사위는 현령(縣令) 김태수(金泰壽)이다. 장령 부군(掌令府君)은 두 아드님을 두셨다. 장남은 자교(自敎)인데, 1남을 두셨으니 동수(東洙)이고, 4녀는 이사제(李思齊), 이보원(李普元), 권재형(權在衡), 이필성(李?聖)에게 시집가셨다. 차남은 가교(可敎)인데, 1녀를 두셨으니 사위는 김시제(金時濟)이다. 소후자(所後子)는 동준(東浚)인데 전(前) 정언(正言)이다. 직장의 1남은 진(晉)인데 헌납(獻納)이다. 세 명의 사위는 각각 심담(沈湛), 한유(韓瑜), 한감(韓堪)이다. 현감(縣監)의 두 아들은 준(寯)과 성(宬)이다. 진사의 6남은, 한규(漢規), 한사(漢師), 한모(漢模),한유(漢儒),한정(漢鼎),한좌(漢佐)인데, 한사는 생원이다. 3녀의 사위는 각각 홍계일(洪啓一),황상관(黃尙寬),박사질(朴師質)이다. 내외 증현손이 20인인데, 많아서 다 적을 수 없다.

부군의 묘는 단양군(丹陽郡) 서쪽 구담(龜潭) 가 을좌(乙坐)를 등진 언덕에 있다. 홍 숙인(洪淑人)의 묘는 남양(南陽) 소교(小橋) 정좌(丁坐) 언덕에 있다. 안 숙인(安淑人)의 묘는 광주(廣州) 송동리(松洞里) 병곡(丙谷) 진좌(辰坐) 언덕에 있다. 부군의 아름다운 덕과 순수한 행실이 필시 전해질만한 것이 많을 것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된 데다 고징(考徵)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할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들은 적이 있다.

“부군이 덕산 현감(德山縣監)이 되었을 때 가서 여러 달을 모시면서 그 정치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인(仁)을 근본으로 삼으시고 서(恕)를 행하시고 너그러움과 믿음으로 하리(下吏)들을 대하셨고 은혜와 사랑으로 백성을 다스리셨다. 이 때문에 하리와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였고, 다스림과 교화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하셨다.

이 부분에서도 그분이 처신하셨던 대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근본이 있지 않고서 이와 같이 하실 수 있었겠는가.

한사(漢師)가 행록(行錄)을 대략 적어 나에게 보여주며,

“우리 아버지[先子]께서 부군의 묘를 깊은 골짜기에 썼는데 내외분의 산소를 따로 하였습니다. 항상 개복(改卜)하여 합묘(合墓)를 하고 명재선생(明齋先生 윤증(尹拯))에게서 글을 받아 비석을 세우고 싶어 하셨는데, 성사되기 전에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이어서 우리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세월이 점점 흘러 마침내 못하게 되고 말까 두렵습니다. 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기록하여 가지고 와서 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실로 내외 자손들의 책임입니다.” 하였다.

나는 감히 글재주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행록에 대략 은괄(櫽括)을 가하였다. 또 전날에 가정(家庭)에서 얻어들은 것을 위와 같이 말하였다.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노성두]



후기(後記)



공(公)은 임지인 단양 관아(官衙)에서 돌아가셔 그곳 구담(龜潭)언덕 을좌(乙坐)로 묻혀 계시다. 손자인 명적(命迪)과 증손자인 한사(漢師)가 고향으로 몇 번의 합묘(合墓)를 시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그 후 묘소는 후손들의 보살핌이 소홀하여 실전(失傳)되고 1979년(一九七九年) 충주댐공사로 그마저 수몰되어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이에 문중에서는 죄스러운 마음 지울 수 없지만 1992년(一九九二年) 홍숙인(洪淑人) 산소에 위패를 안치하여 유혼(幽魂)의 안식(安息)을 빌었다. 그리고 삼백여년전 경암공(敬菴公)이 찬한 묘표를 이제야 받아 빗돌에 새겨 여기에 세우니 이 비(碑)에 참판공파(叅判公派) 종인(宗人)들의 송구스러운 마음을 담았다. 그립고 안타깝게 가슴 조이던 멀고 먼 단양 땅에서 이제야 부인(夫人)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만세(萬世)토록 이곳에서 편안히 영면(永眠)하옵소서.

西紀 二◯◯九年 四月 日

豐壤趙氏 叅判公派宗親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