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행장 및 묘도문 >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증 의정부영의정행첨지중추부사 조공영중묘비명(贈 議政府領議政行僉知中樞府事 趙公瑩中墓碑銘)幷序


의정공 신도비
태재(太宰) 조공(趙公)이 그의 아들 복양(復陽)에게 가장(家狀)을 주어 나를 찾아와 말을 전하게 하기를, “당신께서 일찍이 나의 선친과 교분이 있었으니, 선친에 대해서 아는 사람으로는 당신만 한 분이 없습니다. 지금 불행히 돌아가시어 장차 장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법에 있어서 의당 신도(神道)에 쓸 명(銘)을 얻어야만 하는데, 불초(不肖)인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탓에 직접 청할 수가 없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을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겨 한 마디 써 주어 지하에 계신 분을 위로하고 또 영원토록 어리석은 후손들에게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우리 집안 대대로 당신의 은혜를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참으로 이미 붓을 잡고 글을 쓰는 일을 폐하였다. 그러나 늙고 병들어 능히 달려가서 곡할 수가 없고, 집이 가난하여 재물을 가지고 부의할 수도 없으니, 저버린 것이 많다. 그러니 지금 이 부탁을 차마 어찌 또다시 저버릴 수 있겠는가.

가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영중(瑩中)이고, 자는 군수(君粹)이며, 풍양인(豐壤人)이다.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 휘 안국(安國)의 손자이고,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휘 간(侃)의 아들이다. 상대(上代)에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맹(孟)이라는 분이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일해 맹부(盟府)에 공이 기록되었다. 이분으로부터 700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고관대작이 대를 이어 나와 마침내 명문대가가 되었다. 어머니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우리 조선조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정승(政丞) 남은(南誾)의 후손으로 가문이 세상에서 첫째 둘째로 치는 집안이다.

내가 젊어서 공과 함께 발해(發解)에 천거되어 함께 글을 짓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공이 나보다 열두 살이 위였다. 그런데도 나이를 잊고 교제를 하여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천부적으로 후덕하였으며, 속은 평탄하고 겉은 소박하였다. 집에 있으면서는 화순(和順)하고 근신(謹愼)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성신(誠信)으로써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공을 대하는 것도 역시 성신으로써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공은 여러 차례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39세 때 비로소 음보(蔭補)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가 되었다. 중국의 여러 장수들을 접대하면서 수고한 공로로 군자감 가설주부(軍資監加設主簿)로 승진하여 산질(散秩)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요로(要路)에는 자취를 끊었다. 한참 뒤에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한참 뒤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에 제수되었다. 5년 뒤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에 승진하였으며, 3년 뒤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개차되었다가 또다시 5년 뒤에 선공감으로 돌아왔다.

병자년(1636, 인조14)의 난리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호서(湖西)의 신창(新昌)에 붙어살았다. 무인년(1638)에 공의 나이가 81세가 되었으므로 국가의 전례(典禮)에 따라 당상관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태재로 있던 큰아들이 당시에 종백(宗伯)의 자리에서 면직되어 돌아와 슬하에서 모시면서 뜻과 물품의 봉양을 흠이 없게 하였고, 자손들이 앞에 가득히 있으면서 다방면으로 기쁘게 해 주었으며, 과거 시험에 잇달아 급제하여 인끈이 아름답게 빛났으므로 사대부의 집안에서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평소에 건강하여 비록 몹시 늙었으나 시력과 걸음걸이가 쇠하지 않았고 여전히 혼자서도 능히 숟가락질을 잘하였으며, 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마음대로 출입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술자리를 만나면 술잔 가득히 따라 마시고는 거나하게 취해 몹시 즐거워하였다. 평생토록 자산을 불리기를 일삼지 않았으며,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업(家業)이 쇠락해져 항상 곤핍을 면치 못하였는데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만년에 들어서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아 아전과 백성들을 집안사람들 대하듯이 돌보았다. 돌아올 때에는 고을 안에 있는 물품을 하나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윤춘수(尹春壽)의 따님이다. 아름다운 행실과 정숙한 덕은 별도의 묘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녀는 모두 여섯을 두었다. 아들 익(翼)은 바로 태재로,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딸은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망(李廷望)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태재는 군수 현덕량(玄德良)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을 두었다. 몽양(夢陽)은 홍산 현감(鴻山縣監)이고, 진양(進陽)은 청양 현감(靑陽縣監)이고, 복양(復陽)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고, 내양(來陽)은 진사이고, 현양(顯陽)은 생원시에 장원하였는바, 모두 아름다우면서도 재주가 있어 집안의 덕을 끊지 않았다. 청안 현감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이명담(李命聃)이다.

홍산 현감 몽양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강(持綱)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청양 현감 진양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직 모두 어리다. 헌납 복양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형(持衡)이고, 딸은 홍언경(洪彦慶)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모두 어리다. 진사 내양은 1남 2녀를 두었고, 생원 현양은 2남 □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冑)에게 시집갔다. 지강은 2녀를 두었고, 홍언경은 1녀를 두었고, 이명담은 1남 1녀를 두었다.

태재가 팔좌(八座)의 지위에 올랐으며, 또 정사(靖社)와 진무(振武) 두 공신에 원종훈(原從勳)으로 참여되어 여러 차례 추은(推恩)이 행해져 공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으며, 도사공(都事公)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절도사공(節度使公)은 앞서 막내아들 풍양군(豊壤君) 경(儆)이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인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공은 무오년(1558, 명종13) 7월 무신일에 태어나 병술년(1646, 인조24) 5월 19일에 졸하여 향년이 89세였다. 부인은 신미년(1631, 인조9) 3월 10일에 먼저 졸하여 광주(廣州) 하도(下道)의 북방리(北坊里)에 있는 찬성공의 산소 뒤쪽에 장사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서 묘지의 터가 비좁아서 아무 곳 아무 좌(坐) 아무 향(向)의 산등성이에 새로 묘 자리를 잡아 아무 달 아무 날에 부인의 묘를 옮겨 와 합장하였다.

아, 공의 숨은 덕과 숨겨진 공은 쌓이기만 하고 새지는 않아 후손들에게 베풀어져 울연하게 세상의 쓰임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반열에서 비호하는 바가 있었고 세대가 갈수록 더욱더 드러났으며, 장수하고 강녕하여 끝내는 그 아름다움을 누렸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노심초사 애태우고 돌아다니며 / 焦中騖外
영예롭길 도모함은 힘인 것이고 / 以圖榮者力歟
아름다운 광채 속에 깊이 숨기고 / 潛光伏耀
천성을 잘 보존함은 덕인 것이네 / 以全天者德歟
힘 믿으면 그 다리가 부러지지만 / 恃力者蹶其足
덕 온전히 하면 복의 바탕 된다네 / 全德者資之福
아아 진정 아름답다 우리 공께선 / 吁嗟乎公兮
저 하늘과 서로 같은 무리 되었네 / 天與爲徒
내가 지은 이 명에서 징험되리니 / 我銘可徵
거북 머리 새긴 비석 받침대 있네 / 有龜在趺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풍양조씨세보 상권
                2. 민족문화추진회번역 「청음집 3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