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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祖考) 의빈부도사증좌찬성부군묘표



찬성공묘소전경
아, 조고인 의빈부 도사 증의정부 좌찬성 부군이 작고하신 지 지금 49년이 되었는데도 묘도(墓道)의 글을 아직도 기술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비록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려서 그랬다고는 하더라도 이 일을 지체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돌이켜 보건대 부끄럽고 한스러운 심정을 가눌 수가 없다. 그런데 불초 손자 익(翼)이 지금 나이가 73세나 되었으니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이 일이 끝내는 잘못되고 말 것이다. 이에 삼가 이전 3세의 관봉(官封)과 역임한 관직과 평생의 인덕(仁德) 중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익히 보아 왔던 것들을 서술하여 이를 묘비로 세움으로써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 그리고 고조 증조 2대의 묘문도 이번 기회에 함께 서술하기로 하였다.

부군의 휘(諱)는 간(侃)이요 자(字)는 사행(士行)이다. 증조 휘 지진(之縝)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참판을 추증받았다. 비(妣) 정부인(貞夫人)은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조부 휘 현범(賢範)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참판으로 추증받았다. 부인은 파병윤씨(坡平尹氏)이다. 고(考)의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 받았으며,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조씨의 선세(先世)의 일은 참판부군의 묘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군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태어났다. 갑자년(1564, 명종19)에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을 하였는데, 이때 율곡(栗谷) 이문성공(李文成公)이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송라찰방(松蘿察訪)에 부임되였다가 기사년에 와서별좌(瓦署別坐)로 바뀌었으며, 경오년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겨졌다가 임신년(1572)에 또 예빈사별제(禮賓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계유년에 찬성부군의 상을 당하였다. 복을 마친 뒤에 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가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으로 승진하였으며, 기묘년(1579)에 중부주부(中部主簿)로 다시 승진한 뒤에 사헌부 감찰로 옮겨졌다.

임오년(1582)에 음성현감(陰城縣監)에 임명되었으며, 신묘년(1591)에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강서현령(江西縣令)에 임명되었는데 임진년(1592) 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왜란이 일어나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피난길에 나섰는데, 대부인이 양주(楊州) 산골의 촌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왜적이 물러간 뒤에 광주(廣州) 찬성부군의 묘소 아래에 반장(返葬)하였다.

조고(祖考)는 천성이 인애(仁愛)하였다. 남의 위급한 사정을 반드시 구해 주려고 하면서 간절히 잊지 못하였으며, 비록 미세한 물건이라도 항상 사람들에게 주기를 좋아하였다. 집안의 생활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서 사람이 오기만 하면 귀처늘 가리지 않고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 모든 일은 속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비록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왜병이 경성에 육박하자 도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이웃에 황감역(黃監役)의 집이 있었는데, 그가 먼 시골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의 처가 통곡하고 이었다.조고가 이를 듣고서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사람들을 보내 고하게 하기를 “우리 집과 함께 피난하자”고 하였는데, 마침 황감역이 와서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 이를 통해서도 남의 위급한 사정을 구해 주려 했던 조고의 인애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조고의 매부(妹夫)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 문정공(尹文貞公 윤근수(尹根壽))이 제문(祭文)을 지어 말하기를 “공은 평생토록 인애한 마음을 바탕으로 남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자기 일보다도 더 급하게 여겼으며, 사람들을 온화하게 대하면서 다친 사람 보듯 하였으니, 집안이나 향리에 덕을 베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문정공은 조고의 소싯적부터 인척으로 그지없이 사이 좋게 지냈기 때문에 조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상(故相)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에 몸가짐의 요체에 대해서 자네 조고에게 문의했더니. ‘그대는 더 많은 선(善)을 다시 구하려고 할 것이 없다. 지금의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고 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이상(李相)의 마음가짐이 선함이 소싯적부터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이상이 우리 조고에 대해서 심복(心服)했다는 것과 우리 조고가 당시 사우(士友)들에게 중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내가 다행히 조고가 살아 계실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조고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만년에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육경(六卿)의 지위에 오르면서 조고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외람되게 재상이 되자 또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조비(祖妣) 의령남씨(宜寧南氏)와 상주김씨(尙州金氏)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생각건데 나처럼 불초한 몸이 태어나면서부터 사랑과 기대를 듬뿍 받은 가운데 외람되게 이런 지위까지 올라 지하에까지 그 영광이 미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선세(先世)에 쌓은 덕이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부군의 아들 3인과 딸 1인을 두었다. 장자는 선군(先君) 휘 영중(瑩中)이니 첨비중추부사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딸은 사인(士人) 고상고(高尙古)에게 출가하였으며, 차자 휘 성중(省中)은 진사이다. 이들은 모두 남씨(南氏) 소생이다. 말자(末子) 휘 위중(韙中)은 김씨(金氏) 소생이다.

선군은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익(翼)이고, 딸은 청안현감(淸安縣監) 이정망(李廷望)에게 출가하였다. 고상고는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진사는 1녀를 두었는데 자식이 없다. 말자는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휘(翬)이고 다음 학(翯)은 순천군수(順川郡守)이다. 손자 익(翼)은 5남1녀를 두었다. 장남 몽양(夢陽)은 홍산현감(鴻山縣監)이고, 다음 진양(進陽)은 덕산현감(德山縣監)이고, 다음 복양(復陽)은 홍문관 교리이고, 다음 내양(來陽)은 진사이고, 다음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으며,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胄)에게 출가하였는데, 몽양과 내양과 현양은 모두 죽었고 딸 부처(夫妻)도 죽고 자식이 없다. 휘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성양(成陽)과 수양(壽陽)이요, 학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원양(元陽)이다. 현손(玄孫) 10여 인이 있으나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중에는 또 기대할 만한 자가 있는 듯도 하니, 후손에게 남긴 경사(慶事)가 아직도 다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신묘년(1651, 효종2) 2월 28일



[참고문헌] 1. 浦渚先生集卷之三十三 墓表
             2. 이상현번역,「포저집 6권」민족문화추진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