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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함경남도병마절도사증좌찬성부군묘표
曾祖咸鏡南道兵馬節度使贈左贊成府君墓表


한풍군묘표
우리 증조고(曾祖考)인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증 의정부 좌찬성 부군은 휘(諱)가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경(國卿)이니, 동지중추부사 증 병조 참판 휘 현범(賢範)의 차자(次子)이다. 그 묘소는 참판의 묘소와 같은 동(洞)이면서 언덕을 달리하고 있으니, 그곳은 바로 동쪽 언덕이다.2

조씨(趙氏)가 처음 나오게 된 유래와 그 뒤의 세차(世次)는 이미 참판의 묘문(墓文)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부군(府君)의 증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 휘 계팽(季砰)이요, 조부는 장사랑(將仕郞) 증 공조 참판 휘 지진(之縝)이다.

부군은 나이 24세에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 19)의 무과에 급제하여 바로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외방에 나가 강동 현감(江東縣監)이 되었으며 임기가 만료된 뒤에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 공조 좌랑(工曹佐郞), 겸내승(兼內乘),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상이 친림(親臨)하여 기예를 시험할 적에 격모구(擊毛毬)에서 1등을 차지하자 통정대부로 올리도록 명하였으니, 그때의 나이가 28세였다.

희천 현감(熙川縣監)으로 나가 임기가 만료된 뒤에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선부군(先府君)도 회령 부사(會寧府使)였다. 이처럼 부자가 나란히 육진(六鎭)의 부사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성대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승선(承宣)은 문신에게도 청선(淸選)에 해당되었으니, 무신의 경우는 극선(極選)이라고 할 것이요 또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되고 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임기를 끝내고 체차(遞差)되었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임명되어서는, 이때에 대도(大盜) 팔룡(八龍)이 난리를 일으켰으나 관군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부군이 방략(方略)을 세워서 그를 체포하였다. 이에 상이 가자(加資)를 명하였으나 대론(臺論)으로 개정되어 임소에서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그 뒤에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때에도 대도 미이(米伊) 형제가 난리를 일으켰는데, 부군이 또 모두 체포하였다. 팔룡과 미이는 모두 날래고 용맹하기로 유명하였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도 많아서 대적하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는데, 급기야 부군이 부임하자마자 모두 체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오래도록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상의 명으로 가자되었으니, 이것이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의 일이었다.

한풍군묘표음기 포저익찬
또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을묘년(1555)에 왜적이 남해안에 침입하자 국내가 온통 경악하며 장수를 뽑아서 왜적을 막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군이 전라병사 겸 방어사(全羅兵使兼防禦使)가 되었는데, 순변사(巡邊使)인 남치근(南致勤)과 뜻이 맞지 않아서 결국에는 그의 무함을 받은 나머지 녹도(鹿島)에 2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때 남치근은 살육을 많이 하여 포악하고 위세를 부리는 것으로 소문이 난 반면에, 부군은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하는 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양가(兩家) 자손의 성쇠를 점쳤는데, 결국 남치근의 집안은 후사(後嗣)가 없었고 부군의 자손은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뒤에 함경남도 병사에 임명되고 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경성에서는 관례에 따라 군직(軍職)에 거하였는데, 영흥에서 돌아온 뒤로는 항상 포도대장(捕盜大將)과 오위장(五衛將)과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 7월 14일에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 73세였다.

전부인(前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일찍 죽어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후부인(後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생원 휘 세임(世任)의 딸인데, 임진년에 왜적을 피하던 중 양주(楊州) 산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의 나이가 82세였다. 아들 3인과 딸 1인을 두었다. 장남 휘 엄(儼)은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다음 휘 간(侃)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좌찬성을 추증받았다. 딸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 문정공(尹文貞公) 휘 근수(根壽)에게 출가하였다. 막내아들 휘 경(儆)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해졌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다. 부군과 선부군(先府君) 양세(兩世)가 증직을 받은 것은 풍양군의 훈작(勳爵) 덕분이다.

찬성(贊成)은 아들 3인을 두었다. 장남 휘 영중(瑩中)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아들 익(翼)은 선세(先世)의 유덕(遺德)으로 외람되게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찬성의 자손에 대해서는 원래 그 묘문(墓文)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문정공은 아들 6인을 두었다. 장남 환(晥)과 다음 질(晊)은 모두 첨지중추부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으며,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수십 인에 이른다. 풍양군은 아들 5인을 두었다. 장남 한중(閑中)은 통정대부로 군수이고, 막내 시중(時中)은 현감이며, 그 사이의 세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역시 수십 인에 이른다.

모년 모월 모일에 증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익(翼)은 짓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포저선생집 권33 묘표
                2. 이상현번역 「포저집 6권」민족문화추진회, 2006




1 조익(趙翼, 1579~1655)
본관 풍양(豊壤). 자 비경(飛卿). 호 포저(浦渚)•존재(存齋). 시호 문효(文孝).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副護軍)•형조참의를 지냈다. 이조•예조의 판서, 대사헌이 되고, 1648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인조의 행장찬집청찬집관 (行狀纂輯廳纂輯官)을 겸한 후 좌의정에 올랐다.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에 《浦渚集》《서경천설》《포저유서》 《가례향의》등이 있다.

21994년도 서해안 고속도로공사로 동추공의 묘소는 한풍군 휘안국묘 위 능선으로 이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