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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동지중추부사 증병조참판부군묘표(高祖同知中樞府事 贈兵曹參判府君墓表)


동추공묘표
우리 고조고(高祖考)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증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 부군과, 고조비(高祖妣)인 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합장(合葬)한 묘소는 광주(廣州) 하도(下道) 북방리(北坊里)의 산에 있으니 직동(直洞)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 이전 양세(兩世)의 묘소는 남양(南陽)에 있는데, 부군 때에 와서 비로소 이곳에 장례 지냈다. 함경남도 절도사(咸鏡南道節度使) 증 좌찬성 부군은 그 아들이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증 좌찬성 부군은 그 손자인데,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으며 산기슭만 달리하고 있다.2

부군은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 33) 정월 2일에 작고하여 이곳에 장례 지냈는데, 그로부터 지금 1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증손은 현재 생존자가 없으며, 불초(不肖) 익(翼) 나는 현손(玄孫)이다. 사람의 대수(代數)가 이렇게 쉽게도 지나가다니 참으로 비감이 든다. 나도 금년에 나이가 벌써 73세이니 내가 죽고 나면 향화(香火)3를 올리는 일도 장차 끊어질 것이기에, 모름지기 내가 아직 죽기 전에 묘도(墓道)에 기술해서 후세에 보여 주려고 하는 바이다.

삼가 선세(先世)의 선조들 및 역임한 관직과 그 자손들을 차례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씨의 선조는 본래 풍양인(豐壤人)이었다. 시조 휘(諱) 맹(孟)은 고려 태조를 도와 동방을 통일하는 공을 세워서 통합삼한벽상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고 관작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르렀다. 그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문하시중평장사였는데, 평장이 봉상 소윤(奉常少尹) 휘 천옥(天玉)을 낳았고, 소윤이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 휘 우(玗)를 낳았다. 첨정이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된 휘 계팽(季砰)을 낳았는데, 대언(代言)을 거쳐서 남원으로 나갔다고 한다. 부사는 5남을 두었다. 그중에 셋째 아들인 휘 지진(之縝)이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을 추증받았는데, 부군(府君)은 바로 그분의 아들이다. 평장 이전의 보첩(譜牒)은 분실하였으므로 시조로부터 몇 대 후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부사 이전의 분묘(墳墓)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동추공묘표음기 포저익찬
부군의 휘는 현범(賢範)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의 주부(主薄)와 판관(判官), 도총부(都摠府)의 도사(都事)와 경력(經歷), 훈련원의 부정(副正)과 정(正)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임(外任)으로는 의주 판관(義州判官), 평안 우후(平安虞候), 함경남도 우후 등을 거쳤다.

정축년(1517, 중종 12)에 통정대부에 올라 강계 부사(江界府使)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에 여주 목사(驪州牧使), 연안 부사(延安府使), 함경북도 우후와 온성 부사(穩城府使), 전라도의 좌수사(左水使) 및 우수사(右水使)를 역임하였다. 그 사이에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겸사복(兼司僕)과 우림위(羽林衛)와 오위(五衛) 등의 대장(大將)으로 숙위(宿衛)를 하기도 하고, 혹은 첨지중추(僉知中樞)로 겸임하기도 하였다.

갑오년(1534)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었고, 병신년(1536)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정유년(1537)에 성절사(聖節使)로 상국(上國)에 조회(朝會)하였다. 이상이 역임한 관직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부인은 파성군(坡城君) 휘 찬(贊)의 딸이다. 아들 2인을 두었다. 장남 언국(彦國)은 은율 현감(殷栗縣監)이고, 다음 안국(安國)은 바로 함경남도 절도사로 증 좌찬성 부군이다. 인국(仁國)이라는 서자(庶子)가 있다. 언국은 아들을 두지 못했다. 외손이 지금 수십 인에 이르는데, 우의정 장유(張維)도 그분의 외손이다. 찬성 부군의 자손에 대해서는 찬성의 묘지문(墓誌文)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인국의 자손도 10여 인에 이르는데 기전(畿甸)과 해서(海西; 황해도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모년 모월 모일에 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익(翼)은 짓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포저선생집 권33 묘표
                2. 이상현번역 「포저집 7권」민족문화추진회, 2006




1조익(趙翼, 1579~1655)
본관 풍양(豊壤). 자 비경(飛卿). 호 포저(浦渚)•존재(存齋). 시호 문효(文孝). 160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副護軍)•형조참의를 지냈다. 이조•예조의 판서, 대사헌이 되고, 1648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인조의 행장찬집청찬집관 (行狀纂輯廳纂輯官)을 겸한 후 좌의정에 올랐다.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창(新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에 《浦渚集》《서경천설》 《포저유서》 《가례향의》등이 있다.

21994년도 서해안 고속도로공사로 동추공의 묘소는 한풍군묘 위 능선으로 이장을 하였다.

3유교 예법에서 고조[高祖]까지는 사당[祠堂]에 신주[神主]를 모시어 제사를 지내고 그 이상은 신주를 철거하고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으니 여기서 향화[香火]는 제사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