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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공휘계팽 묘표음기(南原公諱季砰墓表陰記)


남원공묘표
나의 7대조인 남원부사 증이조참의부근(南原府使 贈禮曹參議府君)의 묘소는 남양부치(南陽府治)에서 북쪽으로 2리 지점인 소교촌(小橋村) (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송림리 산 154번지)에 위치하며, 정좌(丁坐)방향으로 안장되어 있는데 6대조인 장사랑 증공조참의부군(將仕郞 贈工曹參判府君)의 묘소가 그 앞에 있고 고조비인 증정경부인 여산송씨(贈貞敬夫人 礪山宋氏)의 묘소가 좌측 산기슭에 있다. 옛날에 세운 표석(表石)이 있기는 하나 갈리고 지워져서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며, 선군자(先君子;돌아가신 아버지라는 말이니 포저공(浦渚公)을 지칭함)께서는 세월이 갈수록 부서지고 지워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될까 걱정을 하며 다시 비석을 세워 기술(記述;묘표의 기술을 의미함)하려고 노심초사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아아 이 일을 할 책임은 못나고 어리석은 이 자식에게 있지 않는가!

우리 조씨는 풍양(豐壤)에서 계출(系出)하였다. 시조의 휘[諱]는 맹[孟]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統合三韓) 벽상개국공신(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시다. 그 후에 휘(諱) 신혁(臣赫)이란 분이 계셨으니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로서 치사(致仕;늙어 벼슬에서 사퇴함)하였으며, 휘 천옥(天玉)을 낳았으니 봉상소윤(奉常少尹)으로서 홍무(洪武) 10년(고려 우왕 3년, 서기 1377년)에 원사부사(元帥副使)로 서해에서 왜적을 맞아 역전분투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휘 우(玗)를 낳았는데 군기사(軍器寺) 부정(副正)이니, 이 분들이 공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된다.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 이니 상주국(上柱國; 고려시대의 정2품관에게 주는 훈작제도) 수광(秀匡)의 후손이다.

부군(府君)의 휘는 계팽(季砰)이니 세종조인 선덕10년 을묘년(세종17년 서기1435년)에 문과(文科) 2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위계(位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루었다. 돌아가신 날과 여러 관직을 한 행적은 세월이 많이 흐르고 문헌도 없어서 밝힐 수가 없고 단지 정묘년(세종 29년 서기 1447년)에 상주판관(尙州判官)을 한 이력은 이백집(李白集)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부인 여흥이씨(驪興李氏)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극복(克福)의 딸이며, 감찰공의 산소는 부군의 묘소 바로 뒤쪽이며 표석(石表)이 있다. 자녀는 5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지완(之完)은 능직(陵直)이고 차남 지부(之孚)는 증참의(贈參議)이고, 셋째는 지진(之縝)이니 참판부군(參判府君)이고 넷째는 지밀(之密) 다섯째는 지식(之寔)이며, 딸은 찰방 이석준(察訪李碩俊)에게 출가했다. 참판부군(之縝)의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한(而漢)의 딸인데 휘 현범(賢範) 동지중추부사 증병조참판(同知中樞府事贈兵曹參判) 낳으시니 이분이 나의 5대조(五代祖)이고 휘 안국(安國)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증좌찬성[咸鏡南道兵馬節度使贈左贊成]을 하신 분이 나의 고조부(高祖父)이다. 송씨(宋氏)는 고조부의 전부인이었으나 소생없이 일찍 돌아가시고 후부인(後夫人)인 안동권씨(安東權氏)께서 나의 증조(曾祖)인 의빈부도사 증좌찬성(儀賓都事贈左贊成) 휘 간(侃)을 낳았고 막내가 풍양군(豐壤君) 휘 경(儆)이니 선조 때 임난공신(壬亂功臣)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영중[瑩中]이니 첨지중추부사 증영의정(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이고, 아버지의 휘는 익(翼)이니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효공(文孝公)이다.

남원공묘표음기 송곡복양찬
부군 이후 처음 몇 대는 내외 자손이 매우 많이 번창하여, 손자 세보(世輔;성종23년 문과, 지평[持平]), 세영(世英;중종26년 문과장원, 안동부사), 증손자 인규(仁奎;중종14년 문과, 한성부 좌윤), 선규(善奎;문과, 정원[正言]) 등은 현달(顯達) 하여 이름을 세상에 알렸으나 대를 이를 후사(後嗣)가 없어 세대가 끊였으며, 참의공 지부의 2째 아들 사마공(司馬公) 세필(世弼)의 후손들은 양구 및 춘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우리 참판부군(지진)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현재 생존에 있는 사람만도 수십 명에 이룬다. 동지부사(현범) 이하 3대는 모두 광주 북방리 직동(直洞)(현 경기도 안산시 건건리)에 산소가 있으며, 참판부군의 고택은 광주 송나동(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에 있으니 포저공의 서원(明皐書院)이 그 터이다. 또 다른 부군의 자손들이 사는 곳과 그 후손의 유택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부군의 지손(支孫)인 참판부군만 그 밑에 안장되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기지 않고 있으니 그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첩(家牒)에 기록되기를 동지부사(현범)께서 임신년(중종7년, 1512년)에 평안도 우후[虞侯]에 임명되고 정축년(중종12년 1517년)에 정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모가 있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임금께 글월을 올리고 벼슬을 사양하였으며, 임오년(중종 17년, 1522년)에 모친상을 당하며, 계미년(중종18년, 서기1523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10월 8일에 남양에 장사를 지냈다. 임신년에는 부모님이 늙으셨다 하여 먼 곳의 임관(任官)을 사양했는데 계미년에 이루어서야 초상(初喪)를 당했으니 참판부군과 할머니 모두 상수(上壽;나이가 보통 사람보다 아주 많음)를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참판공이 돌아가신지도(중종18년, 1523년, 계미년) 벌써 140여년이 지나 세대가 여러 번 바뀌었고 산천도 변하니 가는 세월이 야속하고 허무하구나!

이제 감히 선친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글로 담고 이를 빗돌에 새겨 묘도(墓道)에 세움으로써 후손 대대로 우리 조상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바이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松谷先生集 권10 음기(陰記)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