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공휘계팽 묘표음기(南原公諱季砰墓表陰記)
7대손 가선대부강화유수 복양 근기

남원공묘표
우리 조씨는 풍양(豐壤)에서 계출(系出)하였다. 시조의 휘[諱]는 맹[孟]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統合三韓) 벽상개국공신(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시다. 그 후에 휘(諱) 신혁(臣赫)이란 분이 계셨으니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로서 치사(致仕;늙어 벼슬에서 사퇴함)하였으며, 휘 천옥(天玉)을 낳았으니 봉상소윤(奉常少尹)으로서 홍무(洪武) 10년(고려 우왕 3년, 서기 1377년)에 원사부사(元帥副使)로 서해에서 왜적을 맞아 역전분투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휘 우(玗)를 낳았는데 군기사(軍器寺) 부정(副正)이니, 이 분들이 공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된다.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 이니 상주국(上柱國; 고려시대의 정2품관에게 주는 훈작제도) 수광(秀匡)의 후손이다.
부군(府君)의 휘는 계팽(季砰)이니 세종조인 선덕10년 을묘년(세종17년 서기1435년)에 문과(文科) 2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위계(位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루었다. 돌아가신 날과 여러 관직을 한 행적은 세월이 많이 흐르고 문헌도 없어서 밝힐 수가 없고 단지 정묘년(세종 29년 서기 1447년)에 상주판관(尙州判官)을 한 이력은 이백집(李白集)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부인 여흥이씨(驪興李氏)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극복(克福)의 딸이며, 감찰공의 산소는 부군의 묘소 바로 뒤쪽이며 표석(石表)이 있다. 자녀는 5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지완(之完)은 능직(陵直)이고 차남 지부(之孚)는 증참의(贈參議)이고, 셋째는 지진(之縝)이니 참판부군(參判府君)이고 넷째는 지밀(之密) 다섯째는 지식(之寔)이며, 딸은 찰방 이석준(察訪李碩俊)에게 출가했다. 참판부군(之縝)의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한(而漢)의 딸인데 휘 현범(賢範) 동지중추부사 증병조참판(同知中樞府事贈兵曹參判) 낳으시니 이분이 나의 5대조(五代祖)이고 휘 안국(安國)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증좌찬성[咸鏡南道兵馬節度使贈左贊成]을 하신 분이 나의 고조부(高祖父)이다. 송씨(宋氏)는 고조부의 전부인이었으나 소생없이 일찍 돌아가시고 후부인(後夫人)인 안동권씨(安東權氏)께서 나의 증조(曾祖)인 의빈부도사 증좌찬성(儀賓都事贈左贊成) 휘 간(侃)을 낳았고 막내가 풍양군(豐壤君) 휘 경(儆)이니 선조 때 임난공신(壬亂功臣)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영중[瑩中]이니 첨지중추부사 증영의정(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이고, 아버지의 휘는 익(翼)이니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효공(文孝公)이다.

남원공묘표음기 송곡복양찬
이제 감히 선친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글로 담고 이를 빗돌에 새겨 묘도(墓道)에 세움으로써 후손 대대로 우리 조상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바이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松谷先生集 권10 음기(陰記)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