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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監察) 조공(趙公)의 묘갈명


우리 조씨(趙氏)는 풍양(豐壤)에서 나왔다. 골 초의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휘(諱) 맹(孟)이 시조이다. 그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다시 평장사가 되었음며, 평장사의 뒤로 8대를 거쳐 풍양군(豐壤君) 부군(府君)에 이르는데, 그 사이의 세보(世譜)는 풍양군의 묘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조고(祖考)는 형제가 3인인대, 백씨(伯氏)는 일찍 죽어서 후사가 없고, 풍양군은 3형제 중 막내이다.

풍양군은 휘가 경(儆)이다. 계사년(1593, 선조26)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은 바로 풍양군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국가에서 중흥(中興)을 이룬 전공(戰功)을 꼽을 적에 행주대첩이 둘째 셋째 안에 들어간다. 그 공로로 공신(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군(군)에 봉해졌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그리고 죽어서는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풍양군의 막내아들이니, 휘는 시중(時中)이요 자(字)는 여가(汝可)이다. 공이 나에게는 종숙부(從叔父)가 되는데, 나보다 네 살 위여서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한집안에서 함께 자랐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내며 사랑한 정도가 다른 친족과 달랐다. 그리고 성장한 뒤에도 기미(氣味)가 또 비슷했기 때문에 친척 중에는 서로 좋아한 것이 특별히 더하였다.

공은 태어난 지 7년 만에 모친을 잃었으므로 선부군(先父君)이 불쌍하게 여겼고, 또 공의 기모(氣貌)가 밝고 시원스러워서 다른 아이와는 달랐으므로 가장 많이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다른 자식들은 대부분 거처를 달리하였지만, 공만은 항상 옆에서 모시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공은 소싯적에 뜻이 명랑하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물건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총명해서 글을 읽을 때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문의(文義)에 통달하였으며 고사(古事)도 많이 알았다. 그런데 과거 공부에는 또한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득실(得失)에 대해서 별로 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사(有司)에게 몇 번이나 천거되기도 하였지만 회시(會試)를 보는 시험장에만 나가면 번번이 실패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광해(光海) 때에 이르러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멋대로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조정 관원들의 진퇴(進退)나 과거 시험의 취사(取捨) 등도 모두 사정(私情)을 써서 오르지 자기들을 추종하며 빌붙는 자들만을 뽑았으므로, 공이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서 다시는 과거 시험장에 나가지 않았다.

공이 거처하는 곳은 이이첨(李爾瞻)의 집과 같은 동네에 이었다. 이때에 조사(朝士)와 유사(儒士)들이 이이첨의 제자(諸子)의 집에 마치 저자에 몰리듯 모여들곤 하였는데, 공은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건만 일찍이 그 얼굴을 본적이 있지 않았다. 비단 이이첨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굳게 피하면서 마치 세상에 뜻이 없는 사람처럼 처신하였으니, 공의 천품이 염담(恬淡)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리고 남의 불선(不善)한 행동을 보면 딱하게 여기면서 마치 자신의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여겼으니, 공이 호오(好惡)가 바른 것이 또 이와 같았다.

반정(反正)을 이룬 뒤에 전조(銓曹)가 사자(士子)를 선발하면서 혼조(昏朝) 때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자취를 끊은 자들을 조용(調用)하였는데, 공도 여기에 끼어서 오수찰방(獒樹察訪)에 보임되었으나 한 해를 넘기고는 그만두고 돌아왔다. 그 뒤에 또 기린찰방(麒麟察訪)에 제수되고 또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었으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가 감찰에서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갔는데 3년 뒤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마침내 더 이상 벼슬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뒤에 구포(鷗浦)의 옛 농장으로 돌아왔으나 곤궁함이 막심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사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신사년(1641, 인조19) 모월 모일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그해 2월 25일에 선부군(先府君)의 묘소 아래 곤향(坤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영월엄씨(寧越嚴氏)는 부정(副正) 서(曙)의 딸이다. 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는 군수(郡守) 경심(景諶)의 딸로, 아들 4인을 두었다. 장남 적(績)은 문과출신으로 성균관 전적이고, 다음은 순(純)이고, 다음은 쟁(䋫)익, 다음은 서(緖)이다. 손자 약간 명이 있다 딸은 사자(士子) 이명기(李命耆)에게 출가하였다.

아, 우리 숙부는 자량(慈良)하고 개결(介潔)하였으며 의논이 공평하고 정대하였으니 실로 선사(善士)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평생을 기막힌 곤궁 속에 보냈는가 하면 수명 또한 70세도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소싯적의 친지와 옛 벗들 가운데 한동안 서로 어울려 술을 마시고 농담을 하며 즐겁게 노닐던 자들이 지금은 거의 모두 조락(凋落)하였고, 우리 숙부도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여 년이나 되는데, 나만 아직도 죽지 않고 있으니 옛일을 추억하노라면 슬퍼질 따름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생각은 고아하여 허물이 적었고        雅懷少累
성품은 자애로워 사람을 사랑하였나니        慈性愛人
공과 함께 거처해 본 사람은        與之處者
가까이할 분임을 모두 알        皆知可親
어찌하여 그토록 선은 그토록 넉넉했는데도        何善之優
운명은 그토록 기박하였는가        而命之奇
평생토록 뜻대로 되지 않았고        平生齟齬
수명도 일흔을 채우지 못했어라        壽未至稀
다만 이생에 살아 있는 동안에        唯是其生
부끄러워할 일이 드물었으니        可愧者鮮
저 어두운 황천 아래에서도        泉下冥冥
생각건대 마음이 편안하시리라        想是安焉
어버이 곁으로 돌아가 의지하며        歸依親側
만세토록 떠나지 않게 되었으니        萬世之遠
효자의 마음이여        孝子之心
이제는 소원을 이루셨도다        斯其所願


[참고문헌] 1. 浦渚先生集卷之三十三 墓表
             2. 이상현번역,「포저집 6권」민족문화추진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