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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통정대부이조참의 조공휘명인묘표(贈通政大夫吏曹參議 趙公諱命仁墓表)



외종형(外從兄)되는 풍양 조군(趙君) 여수(汝壽)는 효종8년(1657) 12월 14일에 태어나 숙종30년(1704) 6월 1일에 작고했으니 향년 48세이다. 그 해 8월 병무일(丙戊日) 선영(先塋;조상의 산소가 있는 곳)에 정좌(丁坐) 방향으로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그 해 겨울 아들 한위(漢緯)가 묘문(墓文)을 부탁하러 나에게 왔다. 나는 군과 내외종간(內外從間)이라 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우도(友道;친구와 사귀는 도리)로 서로 사귀기를 소장공(蘇長公;송인 소동파)이 문여가2(文與可;송인 문동) 에게 했던 것과 같이 했으니 한위가 나에게 부탁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군은 평생 몸가짐이 조신(操身)하고 조용해 문밖 출입이 드물었으니 그 평생의 지행(志行)을 내가 아니고서는 누가 능이 말할 수 있겠는가.

참의공묘표
군의 휘(諱)는 명인(命仁)이고, 여수(汝壽)는 그의 자(字)이다. 군은 어렸을 때 아버지 정랑공(正郞公)의 외할아버지인 연안부원군 이충익공(李忠翼公;時白)이 특별히 사랑하여 아명(兒名)을 지어주기를 여수라 했었다. 한데 아명이기 때문에 가관(加冠; 관례(冠禮)를 치른 이에게 갓을 씌우던 일)하고 나서 버리게 되자 정랑공은 그 좋은 이름이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다며 표덕(表德) 즉 자(字)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자(字)를 근거로 하여 관명(冠名; 관례(冠禮) 때 지은 이름, 관명인 명인의 명(命)자는 자의 수(壽)자와 뜻풀이가 같음을 의미함)을 지어주었다. 무릇 조부(이시백을 말함)와 부친의 기대가 이와 같았는데도 군은 마침내 수(壽)를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하였으니 아! 이 어찌 요사스러운 시대와 운명이 시켜서 그런 것일까?

군은 부드럽고 꾸밈이 적으며 겉으로는 허약하게 보이지만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는 두루 자상하여 가정에서는 세심하면서도 사려 깊게 처신했다. 정랑공이 일찍 돌아가 집안 사정이 궁핍하였으나 자당(慈堂)을 섬김에는 비록 숙수지공(菽水之供; 가난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모(父母)를 잘 섬기는 일)이지만 군이 모시고 식사라도 하면 어머니는 삼생(三牲;산 제물(祭物)로 쓰는 세 가지 짐승. 곧 소ㆍ양ㆍ돼지)을 겸한 성찬(盛饌)을 대하듯 기뻐했다. 막내 누이와 어린 아우를 위해서는 정성을 다하여 혼수(婚需)를 장만하고 신랑과 신부 감을 신중하게 골라 남에 뒤지지 않도록 했다. 공부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지성(至誠)으로 개도(開導)하되 반드시 자기 자식들보다 우선 하였다.

어제나 형제 자매들이 자당 앞에 둘러 않자 어리광대를 부리며 즐거워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융융(融融)하여 어쩌다 친척이라도 와 보면 비록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오막살이일망정 봄 동산의 화실(華室;고대광실(高臺廣室))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군(君)마저 요절을 하여 자당에게 한을 남겼으니 원망스럽구나.

참의공묘표음기 수곡김주신찬
군은 성품이 지극히 어질어서 미물(微物)이라 할지라도 발길에 채이면 밟지 않고 꼭 돌아서 갔으며,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여 꼭 구제할 길을 생각하였으니 향리에서 군과 왕래하는 사람들은 그의 의리와 품행에 늘 감복(感服)하였으며, 그런 군이 죽어 장사를 지내게 되자 애도의 정이 친상(親喪) 때에 호곡(號哭)하듯이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성실하고 인정(人情)이 두터워 편안하고 단아(端雅)하며 욕심이 적어 5칸밖에 안되는 가옥에 10인 가족이 추운 겨울에도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곤궁하기에(옛 선비의 집이 그러했듯 선대 대대로 궁핍했다는 뜻) 구차스럽게 영위하려는 뜻이 털끝만큼도 없이 태연히 처신하고 기꺼이 자적(自適)했다. 집 식구들이 간구(艱苟;가난하고 구차하다)한 생활로 해서 그 마음을 걱정하게 하는 일을 보지 못했으니 본디부터 존심3(存心; 유가(儒家)의 실천명제(實踐命題)) 을 기르는 공부가 없고 서야 능히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정랑공의 휘는 지헌(持憲)이니 관직은 공조정랑(工曹正郞)에 그쳤다. 할아버지의 휘는 내양(來陽)이니 증좌승지(贈左承旨)요 증조할아버지의 휘는 익(翼)이니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어머니는 사천육씨(泗川睦氏)로 금천현감(衿川縣監) 리선(履善)의 딸이요 호조판서(戶曹參判) 장흠(長欽)의 손녀이다. 군은 한산이씨(韓山李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부친은 정언(正言) 광목(光稷)이고 조부는 좌참찬(左參贊) 홍연(弘淵)이다. 1남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한위(漢緯)이고 딸은 사인(士人) 정(鄭)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진사(進士) 김찬경(李纘慶)에게 출가했는데 일찍 작고했다. 한위와 정는 모두 2남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번에 군의 아우 명정(命禎)이 해서(海西)지방의 수령으로 출사(出仕)하여 선대의 비석을 장만하고 나서 군이 민몰(泯沒;형적이나 모습이 아주 없어짐)되고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까 안타까워하며 또 돌을 사서 한위에게 주고 묘표(墓表)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나는 드디어 군의 이력(履歷)을 간추려 서술하는 바이다.

나는 군과 더불러 일찍이 10년 동안이나 동석(同席)하여 공부를 하였다. 일상생활에서 경의를 표할 만한 남모르는 행실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게 떠올라 두루 살펴 기록할 수 있기는 하나 비석에 다 싣기 어려우므로 큰 것만 취하고 잔 것은 버리는 바이다. 그러나 먼 후일(後日)에 나의 비명(碑銘)을 읽는 사람이라면 뉘라도 군을 “현인군자(賢人君子)”라 하지 않겠는가, 이를 명(銘;금석(金石) 따위에 새겨 남의 공덕을 기림)으로 남긴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수곡집 권6 묘표(墓表)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1김주신 [金柱臣, 1661~1721]
본관 경주. 자 하경(廈卿). 호 수곡(壽谷) 시호 효간(孝簡). 숙종의 장인. 박세당(朴世堂)의 문인.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 •장악원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저서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 문집에 《수곡집》 등이 있다.

2 중국 북송시대의 문인들로 서로가 매우 존경했던 친구사이

3 학문의 길은 방심(放心)을 추구하는 데 있다 하여 욕망 등으로 본심(本心)을 상하지 말고 항상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여 선천적으로 내재(內在)하는 도덕성을 기르는 것이 마침내는 하늘에 통하는 길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