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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공조정랑조공휘지헌묘표(通訓大夫 工曹正郞趙公諱持憲墓表)



공(公)의 휘는 지헌(持憲)이고 자는 백도(伯度)이니 조씨는 풍양에서 계출(系出)했다. 고조는 간(侃)이니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이고 증조는 영중(瑩中)이니 검지중추 부사(僉知中樞 府事)이고, 할아버지의 휘는 익(翼)이니 좌의정으로서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도학(道學)과 문장이 당대에 으뜸이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포저선생(浦渚先生)이라 했다. 아버지의 휘는 내양(來陽)이니 진사로서 증좌승지(贈左承旨)인데 일찍 돌아가시어 현달(顯達)하지 못했으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이씨이니 영의정이며 충익공(忠翼公)인 휘 시백(時白)의 딸이다.

정랑공묘표
공은 인조20년(1642) 정월 18일 태어나 겨우 이(齒) 갈이를 할 나이(7살)에 잇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외갓집에서 성장했다. 충익공은 그가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운 도량(度量)과 행실이 기특하여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다. 충익공의 전실(前室) 아내는 세 아들을 두었고, 후실(後室) 아내 황씨부인(黃氏夫人)은 자식이 없었는데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부인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충익공이 만년에 이루어서 본인은 물론 자식들도 병들고 늙었으니 공에게 유언(遺言)을 하기를 황씨부인을 모시도록 하고, 여러 자식들은 번갈아가면서 다니며 배알(拜謁)하도록 지시했다.

공은 더없이 착하고 어진 성품이라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인 것을 평생토록 요아의통(蓼莪之痛;부모의 은덕을 사모하는 슬픔)으로 여겼기에 기일(忌日)이면 늘 초상(初喪) 때처럼 슬퍼했다. 황씨부인을 모심에 있어서도 공적(公的)인 일이나 손님을 대하는 시간을 빼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부드럽고 기꺼운 어리광으로 좌중(座中)의 흥을 돋구며 심기(心氣)를 즐겁게 해드림이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다. 주신(柱臣)이 목격했던 일이기에 말지만 옛분들 중에서 공과 같은 사람을 찾는 다면 오직 노래자(老萊子; 초나라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70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리광을 부려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린 인물)가 있을 뿐이다.

황씨부인에게는 계모(繼母)가 있어 영남(嶺南)의 풍기(豊基)에 살고 계셨는데 나이 80이 넘었지만 찾아 뵙지 못한 지가 몇 해 지났다. 공은 벼슬을 하게 되자 일부러 풍기에서 가까운 고을살이를 자청해 구한 자리가 예안현감(禮安縣監)이다. 그리고 가마를 가지고 몸소 모시고 와 음식을 대접하고,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정성이 나의 어버이를 섬기 듯하였다. 황씨부인은 이루기 힘든 재회로 평생의 소원이 달성되었으니 옛 선인(先人)들 중 이렇게까지 했던 사람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아! 공은 가히 지극한 효(孝)라 이를만하다.

공은 성관(成冠)할 나이가 넘은 현종4년(1664) 22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1세에 선능(宣陵; 성종능) 참봉(參奉)에 임명되었고, 내섬시 봉사 (內贍寺 奉事)로 승진되었다가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으로 옮겼다. 숙종3년(1677) 가을에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 외임으로 나가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는데 2년 만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숙종7년(1681)에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에 기용되었다가 이내 백천현감(白川縣監)으로 나갔는데 3년 만에 또 죄도 안되는 일로 파직되었다. 숙종10년(1684)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그해 3월 7일 질병으로 돌아갔으니 그때 나이 겨우 44세였다. 그 당시 황씨부인은 나이가 위였으나 오히려 건강했다. 공은 일찍이 외톨이가 되었기 때문에 황씨부인을 부모 섬기듯 효심이 극진하였는데 타고난 목숨이 길지 못해 부인을 곁에 두고 먼저 갔으니 아아! 애통하도다.

정랑공묘표음기 수곡김주신찬
공의 사람됨은 인정(人情)이 후덕(厚德)하고 대범(大凡)했으며, 관대(寬大)하면서도 엄하여 감정표현을 잘 나타내지 않는 편이라 남들이 그 한계를 엿보기 힘들었다. 집에 재물을 축적하는 바가 없었고 관직에서 해임되어 돌아올 때는 그 지방의 토산물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거절했으니 그는 천성(天性)이 청렴하고 결백했기 때문이다.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과시(誇示)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조급한 언행이나 화를 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현종15년(1674) 가을에 경성(京城)이 어수선하였는데 하루는 어느 서도(西道; 황해도와 평안도의 통칭)불량배가 말하기를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서울을 근접해 오고 있다.”하니 온 성안이 가마솥에 물 끊듯 하였으나 공은 홀로 웃으면서 말씀하기를 “청인(淸人)들이 어찌 날아서 강을 건너겠는가. 어떻든 내일 아침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했다. 결국 이튿날이 되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밤을 새워 닭과 개를 잡아 음식을 만들고 양식을 쌓아 가지고 피난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공은 고을살이를 할 때 가능하면 아랫사람들에게 혜택이 많이 갈수 있도록 노력했으며, 도리에 어긋나면서까지 명예를 추구하는 일에 연유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즐겨 하지 않았다. 소민(小民;벼슬하지 않는 백성)은 달래어 위로하며 설득하고, 토호(土豪)들은 제재하며 억눌렀다. 그들 중 혼자 독차지 하려는 이기적인 자가 있으면 통절(痛切)하게 법으로 다스렸으며 그로 인해 강하게 저항을 하여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고을(예안과 백천)에서 파직된 것은 이런데 원인이 있었다. 예안에 있을 적에 영남지방에서 등용된 사람들이 사건을 왜곡하여 주청하니 상감은 비답하기를 “조지헌은 도신(道臣; 감사)이 상고(上考;치적이 우수한 고가)한 사람인데 이같이 탄핵하여 공박하니 대론(臺論;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이 옳지 못하다.”하였다. 며칠 뒤 삼정승(三政丞)이 상감의 앞 자리에서 한결같이 대간들의 언론(言論)에 따를 것 주청(奏請)하자 상감은 또다시 말씀하시기를 “감사란 수령(守令)의 정치를 문서로 보고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상세히 알게 될 것이다. 풍문을 너무 믿지 말아라.”하였다. 그때 상감(숙종)이 어린 나이로 정무에 임했지만, 한낱 수령을 파직시키는 일조차도 삼정승은 함부로 하지 못했으며, 여러 신하들은 그 영명(英明)함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 없었다.

배(配;아내)는 사천육씨(泗川睦氏)이니 금천현감(衿川縣監) 리선(履善)의 딸이요 호조판서 장흠(長欽)의 손녀이다. 7남3녀를 낳았는데 3남1녀는 어려서 죽고 장남은 명인(命仁), 2남은 명형(命亨) 일찍 졸하고, 3남은 판관(判官) 명정(命禎)이며, 4남은 명재(命才)이다. 장녀는 이근(李根)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심부(沈溥)에게 출가했다. 명인은 1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위(漢緯)이고 딸은 정(鄭)과 이찬경(李纘慶)의 처(妻)가 되었다. 명정은 2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보(漢輔)이고 딸은 이광원(李匡元)의 처가 되었다. 명재는 3남을 두었다. 이근은 3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세훈(世勳), 세걸(世杰)이다. 심부는 2녀를 두었다.

공은 광주(廣州) 치남(治南) 북방리(北坊里)(현 반월선산)의 선영에 정좌(丁坐)로 안장되었다. 명정은 해주통판(海州通判)으로 받은 녹봉(祿俸; 옛날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곡식(穀食)ㆍ돈 따위를 일컫는 말)을 덜어 마련한 돈으로 묘표(墓表)를 세우게 되었는데 주신에게 서신을 통해 전하기를 “墓石은 이미 갖추었으니 마땅히 글 재주가 있고 덕망과 지위가 있는 분을 찾아 비문을 부탁함이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한 집안에 자제(子弟)로서 평소의 생활을 알고 소장(疏章)과 아주 작은 행실까지도 밝힐 수 있는 사람의 말로 후세에 전하는 것 만큼 바람직한 것은 없으니, 형이 마땅히 글을 써야겠습니다.”하였다. 주신은 스스로 생각하건대 글 재주가 짧고 조잡하여 진실로 공의 크고 높은 성덕(盛德)을 고양(高揚)시키기에는 부족한 점 많지만 그 동안 익숙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온 것을 5척의 묘갈(墓碣)을 빌리지 않고는 장차 어떻게 영원한 후세까지 전할 수 있겠는가. 결국 사양하지 않고 이를 위해 기록하는 바이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수곡집 권6 묘표(墓表)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1 김주신 [金柱臣, 1661~1721]
본관 경주. 자 하경(廈卿). 호 수곡(壽谷) 시호 효간(孝簡). 숙종의 장인. 박세당(朴世堂)의 문인.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 •장악원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저서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 문집에 《수곡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