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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공 휘명형(諱命亨) 묘지명(墓誌銘)



조군 여통(汝通)의 휘는 명형(命亨)이니 풍양인(豐壤人)이다. 포저(浦渚)선생 문효공 휘 익(翼)의 증손이며 조부는 성균진사 휘 내양(來陽)이니 선비의 명망과 절행(節行)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공조정랑 휘 지헌(持憲)이니 마음이 더없이 착하고 후덕(厚德)하였으며 어머니는 사천육씨(泗川睦氏)이니 금천현감(衿川縣監) 이선(履善)의 딸이다.

군은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잘 익히었고 성품이 또한 어질고 단아(端雅)했다. 어렸을 때 여러 아이들이 까마귀나 까치 새끼를 끈으로 매어 뛰고, 땅으로 던지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이들에게 인상을 쓰고 풀어주곤 했다. 장성해서는 과묵하고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으며 평상시 조용히 않아있기를 잘했다. 아버지 정랑공 상중(喪中)에 애틋한 슬픔으로 반함(飯含)과 염습(斂襲)을 할 때 기절을 하였다가 다시 소생했었다.

군은 젊어서 구토를 자주 하였는데 이때 피를 함께 토하며 안색이 파리해졌고 1년간 상제 노릇을 하다가 병이 다시 도져서 끝내는 일어나지 못했으니 1688(숙종14, 무진년) 3월 17일이었다. 군은 경주이씨(慶州李氏)와 결혼하여 자녀는 기르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니 너무나 비통한 일이다.

아! 군은 나와 나이가 같았으며 일찍이 옷자락을 잡으며 함께 사이 좋게 지냈다. 나는 겨우 나이 30인데 군의 무덤 위에 풀은 삼상(三霜; 흰 옷을 입고 상제로 있는 삼년 동안)을 겪었고 나무는 사람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여 다니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군의 모습 생각하며 상념에 잠기니 눈물이 저절로 난다. 그러니 뒤에 죽을 내가 이 묘지(墓誌)를 짓지 않는다면 누가 지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묘지문을 지으며 명(銘)에 가로되

남한 하도면 직동 산지에/南漢下道。直洞之阡
소목으로 장사 지냈으니 조씨의 선영이다./ 葬以昭穆。趙氏之先。
정좌(丁坐)를 내룡(來龍)삼아 우강에 쓴 무덤은/負丁爲原。墳于左岡。
여통의 유택이니 그 혼령 백세토록 편안히 쉬리로다. / 是惟汝通之室。百世魂永寧

참고 : 공의 묘소는 후에 온양으로 이장을 했다.
        내룡(來龍): 종산(宗山)에서 내러 온 산줄기


[참고문헌] 1. 壽谷集 墓誌銘
             2.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