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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아(亡兒) 생원(生員) 현양(顯陽)의 지문



생원공 묘표
성균관 생원 조현양(趙顯陽)은 전 예조판서 조익(趙翼)의 다섯 째 아들이요, 형제 중에 막내이다. 조씨(趙氏)는 풍양에서 나왔다. 고려 태조 때의 통합삼한벽상개국 공신 삼중대광 문화시중 휘(諱) 맹(孟)이 그 시조인데, 세계(世系)는 가보(家譜)에 실려 있다.

현양은 어려서부터 선냥하고 화후(和厚)하여 남에게 옷을 아낌없이 주기도 하였는데, 장성해서도 그 마음을 잃지 않고서 관유(寬裕)하고 손순(遜順)한 모습을 더욱 보여 주었다. 부모에 대해서나 동기에 대해서나, 친척에 대해서나 붕우에 대해서나 그가 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성실과 순리에 입각하여 대했을 뿐 털끝만큼도 강퍅하거나 교만을 부리는 뜻이 없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그를 덕기(德器)라고 칭찬하였다.

위급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반드시 자상하게 돌보아 주려고 생각하면서 그만두지를 못하였다. 외물(外物)에 대해서는 애착하는 마음이 없어서 일찍이 남에게 구하여 찾는 일이 있지 않았다. 이는 대개 그의 자질이 본래 염담(恬淡)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평소에 그다지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그가 어려서부터 익히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기도 하였다.

공부에 있어서는 굳이 가르치면서 감독하지 않아도 스스로 뜻을 면려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줄을 알았다. 그는 또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뛰어나서 경전에 나오는 성현의 취지(趣旨)를 대략 듣고 나서는 문의(文義)가 통창하여 세속의 유사(儒士)가 따라올 수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또 고사(古事)를 기억하는 데에 능한 면모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문예(文藝)를 가르친 적도 없었고 또 글 짓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글을 짓는 것이 매우 드물었는데, 그런 중에도 어쩌다가 지은 것을 보면 그때마다 그의 글이 불꽃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재질 면에서 원래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병자호란 뒤에 내가 참소에 걸려서 폐고(廢錮)되자, 그가 말하기를 “우리 부친이 아무 죄도 없이 이 세상에서 폐고되었으니, 내가 어떻게 세상에 나아가 출세할 뜻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몇 년 동안이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직첩(職帖)을 다시 받게 되자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해서 마침내는 생원시(生員試)의 장원을 차지하였다. 내가 폐고되어 물러나 몇 년 동안이나 세상과 인연을 끊었는데, 나의 아들이 한 번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많은 사인(士人)들이 모두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문학(文學)과 의용(儀容)과 기도(器度)가 모두 남보다 뛰어나서 성예(聲譽)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보고는 “방목(榜目)에서 장원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인물로도 장원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이었다. 이 때에 엄친(嚴親)이 85세의 연세로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자 빈객들이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리니 사람들 모두가 영예롭게 여겼는데, 이것이 실로 임오년(1642, 인조20) 봄의 일이었다.

그런데 현양이 전년부터 인수(咽垂; 목젖이 내려 않는 증세)의 증세를 보였으므로 의원의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는데, 그 뒤에 또 병이 깊어져 지친 나머지 날로 파리해지면서 야위어 가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계미년(1643) 5월에 청주(淸州)로 의원을 찾아갔다가 그 해 가을에 죽고 말았으니, 이때가 11월 27일이요, 그의 나이 28세였다.

한번은 현양이 길을 가다가 보니, 술 취한 사람이 길에 누워 있고 안장(鞍裝)을 얹은 말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이때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 만약 그대로 놔두고 간다면 옷과 말을 모두 잃어버리겠기에 마침내 그곳에 앉아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 물어보고서 그가 이웃 고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그를 집까지 업어다 주게 하여 구제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현양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의 모친은 성주현씨(星州玄氏)이니, 군수 휘(諱) 덕량(德良)의 딸이다. 그의 처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니 집의(執義) 윤명은(尹鳴殷)의 딸이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운룡(雲龍)은 7세이고, 운린(雲鱗)은 4세이다. 이 아이들이 반드시 제대로 커서 가업(家業)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내 아들과 내가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장지(葬地)를 바로 정하지 못한 탓으로 이듬해 11월 12일에야 비로소 홍주(洪州) 유곡면(酉谷面) 월고치(月古峙) 계좌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장례지냈다. 아, 사람이 태어날 때 기운을 품부받는 것이 천만 가지로 다른데, 선(善)과 수(壽)를 아울러 얻는 자는 지극히 드물기만 하다. 그러나 오직 선한 것이 가장 귀하니, 참으로 이것을 얻기만 한다면야 그것만으로도 스스로 높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이야 운명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 내 아들도 이런 점에서는 유감이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1. 浦渚先生集卷之三十三 墓誌銘
             2. 이상현번역,「포저집 6권」민족문화추진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