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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도산공묘지문
進士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道山公墓誌文


망아진사내양지문(亡兒進士來陽誌文)
포저공 지음

내 넷째 아들 내양(來陽)이 인조24년(1646) 여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듬에 봄에 병을 얻어 가을에 이루어 나았었고 그 이듬해 봄에 또 병이 도져 6월 14일에 신창(新昌) 동면(東面) 광촌(廣村)에 우거(寓居)하던 민가(民家)에서 죽었으니 나이 35살이다.

자(字)는 장길(長吉)인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아서 붓대를 들고 그림을 그리면 실물과 똑 같았다. 나이 10여 살에 교관(敎官; 학문을 가르치는 관리)을 따라가 공부를 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함께 배우는 아이들 70여명 중 내양(來陽)이 으뜸이라고” 했다. 17살 때 현 병조판서인 이공(李公) 시백(時白)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이공은 그때 강화유수로 있었고 서윤(庶尹) 송연(宋淵)이 그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내양은 때때로 그와 어울렸다. 송(宋)은 시문에 능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친하지만 명성(名聲)은 석주 다음이다. 송군은 나에게 전하기를 “내양은 시에 대한 안목이 넓고 성찰이 깊어 제가 지은 시를 감상하곤 어색한 곳을 지적하니 저는 늘 따라 습니다. 등과(登科)를 하게 되면 서당(書堂; 문관(文官) 중에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사가(賜暇)하여 오로지 학업(學業)을 닦게 하던 호당(湖堂))의 재목이 될 듯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 지은 시 중에는 경구(警句; 어떤 사상이나 진리를 간결하고도 날카롭게 표현한 글귀) 가 많았다.

나이 스물에 진사과(進士科)의 초시(初試;1차시험)는 2등으로 합격하고 회시(會試; 2차시험)에 우등을 하였다. 그때 다행스럽게 두 형들도(진양, 복양) 함께 입격(入格)하였는데 등급은 그가 가장 높았다. 그 후에 일찍이 대과(大科)에 한번 응시하였으나 복시(覆試; 2차 시험)에서 불합격되었고 병자호란 이후로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때 나를 따라 신창(현 충남 도고)에 있었으며 간혹 서울에 계신 장인(丈人)을 찾아 뵙기 위해 상경(上京)이 전부였다. 비록 과거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문학과 예술의 터득 정도가 날로 깊어져 갔다. 인조 22년(1644) 가을에 선고(先考)이신 의정공(議政公)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정시(庭試)에 응시를 하여 떨어지지만 그 당시 지은 글(시권(試券))을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따를 수 없는 글이라며 탄복했다. 글을 깨우치는 능력이 남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민첩하고, 남들이 지은 글을 보고 오류가 있는지 지적에 빈틈이 없었으니 내가 때로 글을 지으면 곁에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 항상 오르니 나는 수정하곤 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참봉의 물망에 올렸는데 내양이 나에게 이르기를 “소자는 벼슬할 뜻이 없으니 이공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십시오.”하길래 나는 서신을 띄워 사양을 했다. 그 후로는 그 뜻을 헤아리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 나라 선비들의 대부분은 오직 과거공부에만 매달려 시험 때만 되면 짝을 지어 한곳에 모여 공부를 했는데 그것을 동접(同接)이라 부른다. 이 아이는 특별히 과거공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평생에 동접의 벗이 없으며, 사귀었던 벗들은 대부분 당대(當代)의 문학에 뛰어난 문사(文士)들이며 귀현(貴顯)한 선비들이었다. 어쩌다 서울에 오기라도 하면 안마(鞍馬;내방객의 뜻)가 문 앞에 가득하였고, 그가 귀향(歸鄕)할 때에는 이름난 장안 명사들이 술을 들고 강나루까지 나와 작별의 정을 나누곤 했는데 포의(布衣;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이지만 그 대접이 견중(見重; 남에게서 소중히 여김을 받음)했다. 그의 시는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태평시대가 다시 도래하여 중국사신이 오게 되어 원접사(遠接使; 중국사신을 수행하는 관직)가 백의종사관(白衣從事官)을 구하게 되면 단연 으뜸이다.”하였으며,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이르기를 “대제학(大提學) 감이다. 근세(近世)의 대제학들 중에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였다.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은 사장(詞章; 문장과 시가(詩歌))으로 한 시대를 드날렸다. 그런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또한 감복(感服)하며, 유학을 공부하는 서생(書生)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예문관(藝文館)에서 벼슬을 하는 관원(官員) 정도로 예우(禮遇)했다.

그는 마음이 청결하고 지조가 특히 굳어 절제된 대인관계를 가졌으며, 사람의 도리에 벗어나는 그릇된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세인(世人)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관작(官爵)이나 이재(理財)는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동기(同氣)에 대한 우애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어머님께서 병환으로 고생할 적에 남들에게 말하기를 “여러 자식들 중에 오직 진사만이 나의 병 바라지를 지성스레 한다.”하였고, 동기간에 상고(喪故)라도 있으면 슬픔의 정을 나눔이 극진하여 건강을 해치기도 하였지만 본인은 괘념치 않았다.

벗을 사귀데 신의(信義)가 있었고, 마음은 곧고 정직하게 행동하였으며, 모든 일을 의리(義理)에 입각하여 행하였으며, 구차스럽고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고, 의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非其友不友 非其義不取).평생에 재물(財物)을 탐하지도 증식(增殖)도 하지 않았기에 나이 30이 지나도록 재산이라곤 없었다. 남들은 그런 그의 뛰어난 재능과 깨끗한 행실을 흠모하여 온지 오래된다. 그가 죽었을 때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평소 막역(莫逆)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탄식을 자아내지 않는 사람 없었다. 부음(訃音)이 서울에 이르자 온 성안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장인인 병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의 집에 찾아가 소리 내어 슬피 울었는데, 그 행렬이 문전(門前)에 잇달기를 높은 관직에 있는 대인(大人)의 상가(喪家) 같았다.

그의 아내는 행실이 훌륭하고 남보다 뛰어나 부모를 섬기건 시부모를 섬기거나 부부 간에 처(處)함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착하지 못한 행동을 보지 못했다.

아아! 사람의 집에 이만한 아들과 이만한 며느리가 있기도 어려운 것인데 이런 자식을 잃은 것은 진실로 내가 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부부가 이와 같았으니 낳은 자식들도 반드시 범인(凡人)은 아닐 것이다. 자식은 2녀 1남을 두었으니 장녀는 대사헌(大司憲) 김남중(金南重)의 아들인 일진(一振)에게 출가했고 그의 동생은 11살이며 아들은 7살인데 이름은 지헌(持憲)이다.

나는 전판서(前判書) 익(翼)이고 나의 선고(先考)인 증영의정(贈領議政) 영중(瑩中)은 그의 할아버지이고 조고(祖考)인 증이조판서(贈吏曹參判) 간(侃)은 그의 증조할아버이며, 그의 조상은 풍양에서 나왔으니 고려초 통합삼한 벽상개국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統合三韓 壁上開國功臣 三重大匡 門下侍中 平章事) 휘(諱) 맹(孟)은 시조이다. 모월 모일일 광주 북방리의 선영(先塋) 곁에 권폄(權窆;풍수설(風水說)에 따라 좋은 묘지를 구할 때까지 임시(臨時)로 장사를 지냄)하였다.

나는 거듭 말하지만 그는 고결한 선비의 재능을 가졌지만 이루지도 못하고 요절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애석(哀惜)하기 그지없다. 차마 이런 사실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기에 기록으로 남길만한 사적(事蹟)들을 거두어 지문(誌文)으로 남기는 바이다.

외왕고지문추기(外王考誌文追記)
외손경은부원군 수곡 김주신(壽曲 金柱臣) 근서

참판공 간(侃)은 뒤에 여러 차례 추증(追贈)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루었고 판서공 익(翼)은 뒤에 좌의정에 이루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공의 도학(道學)을 높이 평가하여 포저(浦渚)선생이라 일컬었으며 돌아가시어는 문효(文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받았다. 병조판서공 이시백(李時白)은 뒤에 영의정에 이르렀고 훈명(勳名)과 덕업(德業)이 일대에 빛났다.

두 딸 중에서 큰딸은 곧 주신(柱臣)의 선비(先砒)이고, 작은 딸은 박태두(朴泰斗)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지헌(持憲)은 진사로서 관직이 공조정랑(工曹正郞)이었는데 4남 2녀를 두었으니 명인(命仁), 명형(命亨), 사평(司評) 명정(命禎), 명재(命才)이다. 선고(先考) 생원 김일진(金一振)은 2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 성신(聖臣), 현령 주신(柱臣)이며, 군수(郡守) 박태두는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필하(弼夏)이다. 내외 후손들이 남녀 합쳐 40여명에 이룬다.

돌아 가신지 34년 만에 부군(府君)에게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과 유인이씨(孺人李氏)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이 추증되었으니 정랑공(正郞公) 지헌(持憲)의 원종(原從) 공로로 해서이다.

부군은 광해군 6년(1614)에 태어났으며 부인은 부군보다 5년 연하(年下)이다. 부군이 돌아 가신지 3개월 만에 부인은 슬픔과 서러움으로 식음을 전폐하면서 지나치게 몸을 돌보지 않다가 돌아가셨다. 10년 후인 효종8년(1657) 겨울에 광주(廣州)의 서남쪽으로 백리 지점인 직동(直洞) 선영의 언덕에 정좌(丁坐)로 영폄(永窆;완전하게 장사(葬事)지냄)하였으니 곧 찬성공 간의 묘 밑이며 부인도 동혈(同穴; 한 구덩이에 묻힘)이다.

처음에는 문효공이 지문(誌文)을 짓기는 하였으나 광중(壙中)에 묻지는 못했었다. 그 후 외종형(外從兄) 명인(命仁)이 장차 자기(磁器)로 구우려 하는데 주신에 명(命)하여 앞선 지문에 누락된 것을 다음과 같이 추기(追記)토록 하였다. 주신 또한 일찍이 선비(先砒)로부터 들어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으므로 추가하여 적는 바이다.

부군(府君)의 성품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추운 겨울 혹한에 떨어진 옷을 입고있는 사람을 보면 으레 자신의 옷을 벗어서 입혔다. 그러치만 성격이 꼿꼿하고 깔끔하여 남의 과실(過失)은 용납하지 못했다. 어느 마을에 생활이 빈곤하여 사당(祠堂)을 설치하지 못하고 신주(神主)를 항상 침실에 보관하는 자가 있었다. 부군은 볼 때마다 그에게 “예(禮)가 아니다”라고 꾸짖자 그 사람은 결국 별도의 사우(祠宇)를 짓고 신주를 옮겨 모셨으니 향리(鄕里)에서는 그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부군은 조정이 청(靑)나라와 화친(和親)을 하자 마음속 깊은 탄식과 분개로 결국에는 과거공부마저 포기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정신력과 사고력이 남다른 데가 있어 일찍이 대관(臺官)들이 쓴 긴 소장(疏章)을 한번 읽고는 돌아앉아 외우곤 했으며, 일찍이 작은 형인 문간공(文簡公) 복양(復陽)과 더불러 시간을 정하여 시 짓기를 하면 늘 부군이 앞섰다. 그런 그가 세상과 등지려고만 하니 의정공(瑩中)은 그 재능이 안타까와 억지로 과거에 응시토록 한다. 부군은 노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정시(庭試)에 지원하지만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

아아! 이는 모두 선비(先砒)께서 직접 보고 들으시고서 주신(柱臣)에게 말씀한 것으로서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니 어찌 감히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군은 상중(喪中) 장사 지내기 전까지는 소금(鹽分)을 먹지 않았고, 장사를 치르고 나서야 소금은 먹었다. 그러나 채소는 먹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다. 선비는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고 나서 울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았으니 아무리 강단(剛斷)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단 말이냐 병환으로 앓다가 돌아가시긴 했어도 기실 과도하게 슬퍼해 건강을 해쳤기 때문일 것이다.”하였다.

부군이 지은 시(詩)는 자신이 거두어 두지 않은 관계로 거의 다 없어졌다. 그러나 몇 편 안 남아있지만 시를 공부한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후세(後世)까지 전할 만한 것”이라 하였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1. 포저선생집 권 33 묘지명(墓誌銘), 2. 수곡집 권6 지갈추기(誌碣追記), 3.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김주신 [金柱臣, 1661~1721]
본관 경주. 자 하경(廈卿). 호 수곡(壽谷) 시호 효간(孝簡). 숙종의 장인. 박세당(朴世堂)의 문인.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 •장악원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저서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 문집에 《수곡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