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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문효공 포저조익선생 묘지명



1. 부음을 접하고 2. 포저의 탄생 3. 포저의 벼슬 길 4. 人間 포저
5. 경세제민의 사상 6. 대학자 포저 7. 포저의 가족 8. 명(銘)


1. 포저공 부음을 접하고……

포저공묘지문
숭정(崇禎) 을미년(1655, 효종6) 3월 10일에 포저(浦渚) 조 선생(趙先生)이 광주(廣州) 구포(鷗浦)의 정침(正寢;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에서 천수(天壽)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춘추(春秋) 77세였다. 선생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내의(內醫)가 약물(藥物)을 가지고 와서 진찰 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3일 동안 철조(輟朝; 임금의 조회를 폐함)하였다. 제조(諸曹)의 낭관(郎官)이 와서 상례(喪禮)의 일을 행하였다. 임금이 두 차례나 시신(侍臣;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을 보냈으며 왕세자는 궁관(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올렸다. 그 해 6월 10일에 대흥현(大興縣) 동화산(東華山) 백석동(白石洞) 손좌(巽坐) 건향(乾向)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으니 이곳은 실로 선인(先人) 첨추공(僉樞公; 포저의 부친)묘소의 북쪽 언덕이다. 정경부인(貞敬夫人) 현씨(玄氏)는 이듬해인 병신년 12월 17일에 다른 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부장(附葬)하였다.

얼마 뒤에 공의 자제인 시랑(侍郞) 군이 가장(家狀) 1통을 서술하여 나에게 보여 주면서 유당(幽堂; 묘지)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내가 적임자가 못 된다고 사양하자, 시랑이 말하기를 “명은 정성이 귀중한 것이지 글이 귀중한 것이 아니다. 그대와 나는 형제와 같은데, 그대가 왜 사양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래도 내가 감히 지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시랑이 독촉하여 마지않았다. 내가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우리 선자(先子)께서도 경외하신 분이고1 , 나 역시 외람되게 기심(紀諶)1 의 사이에서 노닐면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던 만큼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감히 선생의 세계(世系)와 이력과 덕행과 사업(事業)으로부터 선생의 출처(出處)와 학문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서술하고 여기에 명(銘)을 붙이었다. 아, 소자(小子)가 어떻게 감히 선생의 묘지명을 지을 수 가 있단 말인가.

다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