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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공휘익(浦渚公諱翼) 시장(諡狀)



1. 머리글 : 꿈에 흑룡이 날아들었는데......
2. 정미년(1607, 선조 40) : 광해군 1년에 홍문록에 참록(參錄)되었다.
3. 계축년(1613, 광해군 5) : 관직을 버리고 광주(廣州)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4. 경신년(1620, 광해군 12) : 신창현 도고(道高)로 옮겨 우거(寓居)하다.
5. 계해년(1623, 인조 원년) :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6. 갑자년(1624, 인조 2) : 대동법(大同法)에 관한 일을 관장하다.
7. 병인년(1626, 인조 4) : 서쪽 변방의 사의(事宜)에 대해 진달하다.
8. 정묘년(1627, 인조 5) : 특명으로 대사성을 겸대(兼帶)하게 하다.
9. 경오년(1630, 인조 8) : 월사공(月沙公)은 공의 차본(箚本)들을 유현의 말이라며 늘 탄복하였다.
10. 계유년(1633, 인조 11) : 과거(科擧)의 강경제(講經制) 개혁을 주청하다.
11. 을해년(1635, 인조 13) :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경륜하는 방도가 아닌 것이 없었으나?
12. 계미년(1643, 인조 21) : 공을 보양관(輔養官)으로 불렀다.
13. 기축년(1649, 인조 27) :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승하(昇遐)하였다.
14. 신묘년(1651, 효종 2) : 공은 효종6년(1655) 3월 10일에 고종(考終)하니 춘추(春秋) 77세였다.


1. 머리글 : 꿈에 흑룡이 날아들었는데......

공의 증조(曾祖) 안국(安國)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순충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한풍군(漢豐君)에 추증되었고, 증조비(曾祖妣) 여산 송씨(礪山宋氏)와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 간(侃)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조비(祖妣)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상주 김씨(尙州金氏)는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고(考) 영중(瑩中)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世子師)에 추증되었고, 비(妣)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의 휘(諱)는 익(翼)이고, 자(字)는 비경(飛卿)이다. 호(號)는 존재(存齋)인데, 학자들이 포저(浦渚)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 선조는 풍양인(豐壤人)이다. 시조 맹(孟)은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로 통합개국 공신(統合開國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으며, 관작(官爵)은 태사 평장사(太師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뒤로 700여 년을 전해 오는 동안 벼슬을 한 자손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풍공(漢豐公)은 무과를 통해 진출하여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당시의 명장(名將)으로 꼽혔는데, 뒤에 계자(季子)인 풍양군(豐壤君) 경(儆)이 왜적을 토벌한 공로로 봉증(封贈)을 받았다. 의정공(議政公)은 성신(誠信)하고 곤핍(悃愊)하여 고인의 풍도가 있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실로 그 묘에 명(銘)을 지었다. 윤 부인(尹夫人) 역시 성품이 지극하고 품행이 순후하였다. 공을 임신했을 때 가인(家人)의 꿈에 흑룡이 방 모퉁이로 날아들었는데, 그러고 얼마 뒤에 공을 낳았다. 이때가 만력(萬曆) 기묘년(1579, 선조 12) 4월 7일이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말을 배우기도 전에 문자를 식별할 줄 알았다. 3세에 바둑돌을 배열하여 《주역(周易)》의 괘(卦) 모양을 만들었으므로 식자(識者)가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노는 것도 보통 아이들과는 판이하였다. 이웃집 노인이 옷을 벗어서 한곳에 놔둔 뒤에 공에게 지켜보라고 하고는 다른 곳에 갔다가 저물녘에 돌아왔는데 공은 그때까지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으니, 공의 순수하고 성실한 성격이 어릴 때부터 이미 이와 같았다. 8세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조 문열공(趙文烈公)이 직언(直言)을 하다가 배척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비분강개하여 소초(疏草)를 작성하였는데, 그 안에 사정(邪正)을 분명히 지적하여 진술하였으므로 여러 장로(長老)들이 경탄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글을 보면 어찌 어린아이가 지었다고 말하겠는가.” 하고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금하였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에 《서경(書經)》을 읽었는데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에 대한 해설을 보고는 그 즉시로 막힘없이 깨닫자, 노유(老儒)들이 모두 탄복하면서 따라갈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서경》의 홍범(洪範)을 모방해 글을 지으면서 인륜에 대해 서술하고는 그 이름을 이범(彛範)이라고 하였다. 공은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널리 통하였다. 그리하여 선도(禪道), 문장, 음률, 서화(書畫), 병법, 복서(卜筮) 같은 분야에도 모두 통효(通曉)하였다. 공은 또 항상 제갈 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은 인물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였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윤 문정공(尹文貞公)은 공의 종조고(從祖姑)의 사위이고 윤 부인(尹夫人)의 계부(季父)이다. 공이 소싯적에 그에게 가서 수학하였는데, 문정공이 공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문장은 양한(兩漢) 시대의 수법으로서 천하의 기문(奇文)이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그동안 좋아하던 문장을 모두 버리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마음을 집중하여 순수하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맨 먼저 사서(四書)에 대해 정밀하게 사색하고 자세히 탐구하면서 완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대학(大學)》 속에는 그야말로 천고의 성현이 만들어 놓은 규모가 들어 있다. 그리고 《중용(中庸)》의 존덕성(尊德性)과 계신(戒愼) • 근독(謹獨) 공부 또한 《대학》과 공통적으로 한 가지 일일 뿐이다. 2 우리가 자기 몸을 바쳐 옛 학문을 함에 있어 일생 동안 노력을 경주하여 행해야 할 것으로 어찌 이것 말고 다른 것을 구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지경도설(持敬圖說), 심학종방도찬(心學宗方圖贊), 원조(元朝)와 야기(夜氣) 등의 잠(箴)을 지어 밤낮으로 살피고 돌아보면서 곧바로 옛 성현을 준칙으로 삼았을 뿐 벼슬을 위한 학업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찬성공(贊成公)이 강요하여 부득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붓을 잡고는 단번에 수천 어의 글을 지으니, 고관(考官)들이 보고는 극구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등제(登第)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補任)되었으며,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관례에 따라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재상의 아들이 등제하였는데, 동료 관원이 그를 승문원에 분관(分館)하려고 주도하였으나 공이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공이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성망(聲望)이 날로 높아졌으나 교유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당로자(當路者)들이 또 대부분 권신(權臣)의 당인(黨人)이었기 때문에 참하관(參下官)으로 6년이나 있었는데도 공을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시의(時議)가 애석하게 여겼다.




1송준길 [宋浚吉, 1606~1672]
본관 은진(恩津).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시호 문정(文正).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효종 즉위) 집의(執義)로 재기용되었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右參贊)・좌참찬 겸 좨주(祭酒)・찬선(贊善)을 지냈고,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를 비롯, 공주(公州) 충현서원(忠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문집 《동춘당집(同春堂集)》과 《어록해(語錄解)》 등이 있다.

2중용(中庸)의 …… 뿐이다 : 《포저집》 권20 ‘《중용》의 공부와 《대학》의 공부를 겸행해야 한다〔中庸大學工夫兼取〕’라는 제목의 글 중에 “《중용》의 공부란 존덕성(尊德性)과 계신공구(戒愼恐懼)와 근독(謹獨)이 바로 그것이요, 《대학》의 공부란 성의(誠意)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책의 공부를 비교해서 논하건대 존덕성과 계신공구는 성의 이전의 공부이고, 《중용》의 근독은 《대학》의 성의와 같은 일이라고 하겠다.”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