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행장 및 묘도문 >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선부군(先府君) 행장(行狀)



선부군의 휘(諱)는 영중(瑩中)이요 자(字)는 군수(君粹)요 성은 조씨(趙氏)이다. 그 선조는 풍양(豐壤)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의 통합삼한벽상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 휘 맹(孟)이 그 시조이다. 풍양을 본관으로 한 것은 대개 시조가 풍양에서 일어나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왕업(王業)을 이루고 훈작(勳爵)을 받았으며 그 묘소가 풍양 적성동(赤城洞)에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를 거쳐 본조(本朝)에 이르는 700여 년 동안 벼슬을 한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 세상의 성족(盛族)이 되었다.

시조의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나와서 관직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평장의 아들인 휘 천옥(天玉)은 관직이 봉상사 소윤(奉常寺少尹)이었고 소윤의 아들인 휘 우(玗)는 군기사 첨정(軍器寺僉正)이었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홍무(洪武) 10년 (1377 우왕3)에 소윤이 원수 부사(元帥副使)의 신분으로 서해(西海)에서 왜적을 토벌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하니 이는 바로 고려 말의 일이다. 그리고 첨정은 바로 아조(我朝)의 초기에 해당한다. 첨정의 아들인 휘 계평(季砰)은 세종(世宗)조의 문과(文科)에서 제 2인(第二人)으로 급제하여 관작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부사의 아들인 휘 (之縝)은 장사랑(將仕郞)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참판의 아들인 휘 현범(賢範)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가의대부(嘉義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부군(府君)의 증조(曾祖)이다.

조부 휘 안국(安國)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되고 한풍군(漢豐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고(考) 휘 간(侃)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계부(季父) 휘 경(儆)은 왜란 때에 행주(幸州) 전투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어 선무 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해졌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니 3대(代)를 이어 계속해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재신(宰臣)의 직질(職秩)에 올랐다. 비(妣)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개국 공신(開國功臣) 시(諡)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후예로 부친은 지평 현감(砥平縣監) 휘 규(奎)이다. 계비(繼妣)는 상주 김씨(尙州金氏)이다.

부군(府君)은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13) 7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어났다. 나이 12세에 비(妣) 남씨가 세상을 떠났다. 소싯적부터 글을 읽으며 과거공부를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 39세에 처음으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에 보임(補任)되었으며 그 뒤에 중국 장수를 접대하는 도감(都監)의 낭청(郎廳)으로 근무한 공을 인정받아 6품의 자급(資級)으로 승진하여 가설 군자감 주부(加設軍資監主簿)가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1)반정(反正)뒤에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을축년(1625)봄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이 되고 기사년(1629) 여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전임(轉任)되었으며 신미년(1631) 겨울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갑술년(1634)여름에 다시 선공감 첨정이 되었다.

병자년(1636) 병란 때에 상이 강화(江華)로 피신하기로 의논을 정하고는 늙고 병든 사람을 먼저 보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부군이 먼저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조 판서의 신분으로 대궐에 있다가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길을 나섰고 그 뒤를 이어 대가(大駕)가 출발하였는데 대가가 남대문(南大門)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의 기병을 만났으므로 다시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내가 부군의 행방을 몰랐으므로 동분서주하며 찾아다니다가 남양(南陽)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남한산성이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 군병을 모집해서 오랑캐의 군대에 뛰어들어 함께 죽을 계책을 세웠는데 적이 남양에 침입하여 부사(府使)를 죽이자 대중이 흩어지고 말았으므로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부군을 모시고 대부도(大阜島)에 들어갔다가 강화로 들어갔는데 강화가 함락될 적에 다행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 강화에서 목숨을 구한 신하들이 원손(元孫)을 모시고 호서(湖西)로 내려갔으므로 부군을 모시고 함께 따라가서 당진(唐津)에 정박한 뒤에 나는 말을 구해서 조정으로 들어가고 부군은 신창(新昌)으로 귀향하였다.

그때 나는 참언(讒言)을 입고 하옥되었다가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이로부터는 부군을 모시고 신창에서 거하게 되었다. 무인년(1638) 봄에 부군의 연세가 80이 되었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당상(堂上)으로 승진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나도 무함과 비방을 당한 것이 일단 해명되면서 복관(復官)이 되서 소명(召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부군의 연세가 86세나 되었으므로 그 뒤에도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부군을 끝까지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난리 뒤에 구원(丘園)에 칩거하면서 부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시봉(侍奉)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언제나 드리지 못했으니 한없이 비통하고 한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부군은 병자호란 때에 연세가 79세였는데 정력이 여전히 강건해서 보고 듣는 것이나 걷고 말 타는 것이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며 85세에 이르렀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강건하였다. 그러다가 계미년(1643) 가을 무렵부터 점차 쇠한 정도가 심해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달라지더니 을유년(1645) 여름에 이르러서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 음식과 기거(起居)등의 일을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하였다. 병술년(1646) 5월 19일에 미질(微疾)로 세상을 마치시니 향년 89세였다.

나의 처는 지난해 겨울부터 병을 앓았는데 봄에 이르러 더욱 위중해진 나머지 몇 달 동안 누워 지내게 된 관계로 봉양을 비복(婢僕)에게 맡기고 있다가 한 달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동안 집안의 운세가 지극히 험해서 4,5년 동안에 죽는 일이 잇따라 사망한 아들과 딸과 사위와 손자가 모두 합쳐서 8인이나 되었는데 끝내는 가모(家母)와 노친(老親)의 상(喪)이 두 달 사이에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신명(神明)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겠는가.

나의 관직에 따라 관례대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다시 내가 정사(靖社)와 진무(振武)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1등으로 참여한 것을 적용하여 추가로 추증한 결과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이르렀고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추증되었다. 남원부사로부터 그 이하의 묘소가 모두 남양(南陽)과 광주(廣州)에 있어서 더 이상 장례를 지낼 땅이 없기 때문에 장지(葬地)를 바꿔 대흥현(大興縣) 지역의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모월 모일에 장례를 지내려고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광주의 선조 묘역 뒤에 앞서 장례 지낸 부인도 이곳으로 옮겨서 부장(附葬)할 예정이다.

부군은 평생토록 질직(質直)하여 교묘하게 꾸미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할 때에도 모두 성실하고 신의 있게 하였다. 천품이 담박하여 외물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재리(財利)를 도모하며 경영한 적이 전혀 없었다. 또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었으며 고을을 다스릴 적에도 백성들에게 취한 것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때문에 집에 가진 것 하나 없이 생계가 막연하였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죽은 아우의 자식들을 매우 지극하게 보살펴 주고 사랑하였다. 관직에 거할 때에는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공회(公會)가 있을 때면 반드시 먼저 참석하곤 하였다. 내가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직한 자세를 지키면서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나 아이들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이고 아첨하는 짓까지는 하지 않게 된 것 역시 사실은 근본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행히 각자 자식을 두었고 사망한 자가 비록 많아도 살아있는 자가 희소한 지경에 이르지 않아서 앞으로 후손이 번창할 가망이 있게 된 것 역시 부군이 지닌 순덕(純德)의 소치(所致) 아닌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부인(夫人) 해평윤씨(해평윤씨)는 아산 현감(牙山縣監)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추증받은 춘수(春壽)의 딸이다. 덕성이 인후(仁厚)하여 친척과 동복(僮僕)과 인리(隣里)가 모두 감복하였는데 이미 안장(安葬)하여 묘지(墓誌)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재하지 않는다. 자녀 6인을 낳았는데 지금은 1남 1녀만 남아있다. 아들 익(翼)은 영천 군수(永川郡守) 현덕량(玄德良)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고 딸은 청안 현감(淸安縣監) 이정망(李廷望)에게 출가하여 1남을 낳았다.

손자 몽양(夢陽)은 홍산 현감(鴻山縣監)이고 진양(進陽)은 청양현감(靑陽縣監)이고 복양(復陽)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고 내양(來陽)은 진사(進士)이고 현양(顯陽)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는데 일찍 죽었다. 몽양은 부사(府使) 박승조(朴承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지강(持綱)은 생원 김곤원(金坤遠)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2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진양은 사인(士人) 안대항(安大恒)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복양은 관찰사(觀察使) 이경용(李景容)의 달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지형(持衡)은 현령(縣令) 심억(沈檍)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장녀는 유학(幼學) 홍종경(洪宗慶)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내양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시백(李時白)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현양은 관찰사 윤명은(尹鳴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딸은 진사 이상주(李相胄)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처(夫妻)가 모두 일찍 죽었다. 외손(外孫) 명담(命聃)은 남녀 각 1인을 낳았다. 지강은 2녀를 낳았다. 홍종경은 1녀를 낳았다.

아, 선비(先妣)가 작고한 뒤로 편친(偏親)을 16년 동안이나 모실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계책이 졸렬한 나머지 맛있는 음식과 몸을 편하게 해 들릴 것들을 항상 마련하지 못했으니 불효를 범한 이 죄는 어떻게 갚을 길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지극히 혹독한 벌을 내려 갑자기 버리고 떠나셨으니 이제는 천지간에 어버이를 잃고 다시는 의지할 곳 없게 되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미칠 수가 없어서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애간장이 끊어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남산열렬(南山烈烈)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심정일 뿐이다.

삼가 이와 같이 세계(世系) 관자(官資) 졸장(卒葬) 증직(贈職) 자성(子姓)을 차례로 서술하였는데 장차 당세의 문장과 명덕(名德)을 소유한 분 중에 부군이 일찍이 지우(知遇)를 받은 대인(大人)에게 이것을 가지고 가서 길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묘석(墓石)에 한 글자를 새겨 달라고 청하려고 한다.

병술년(1646 인조24) 8월 24일 불효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익(翼)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행장을 쓰다.

[참고문헌] 1. 浦渚先生集卷之三十五 行狀
             2. 이상현번역,「포저집 6권」민족문화추진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