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잊혀진이야기 > 잊혀진 이야기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잊혀진 이야기

포저조상공 철산구황비기
2007-9-17 2943
포저공은 1608년(선조 41) 30세의 나이에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외방으로 나간다. 그 해 관서지방에 큰 흉년을 당한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신속하게 가난한 백성을 구제를 위한 선정을 펼친다. 그 후 그 공덕을 칭송을 위해 여러 고을에서 공덕비를 세웠는데 60년 만에 곽산에서 세운 그 날짜에 우연히 발견이 된다. 이어 철산에서도 발견이 되니 관서백성들은 모두 기이하게 여긴다. 따라서 다시 비각을 세우고. 다른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기로 현지 백성들은 결의한다. 이에 송곡공(松谷公)이 그 사실을 기문(記文)으로 써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에게 부탁을 한다. 이 글은 동춘당이 찬(撰)한 철산구황비기(鐵山救荒碑記)이다. 포저(浦渚) 조상공(趙相公) 철산구황비기(鐵山救荒碑記)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무신년(1608, 선조41)에 관서(關西)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다 굶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때 포저 조 선생이 본도(本道)의 병마평사(兵馬評事; 종6품 무관직)로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 줌)의 임무를 받아 정성과 힘을 다하여 관서 백성들이 집집마다 살아나고 사람마다 보전되게 하였다. 진휼의 일을 마치고는 선생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셨다. 그러자 관서 백성들은 선생의 은덕에 감읍하여 선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굶어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서로 의논해 비석을 세워 선생의 공덕을 칭송하여 감당(甘堂)의 생각을 부쳤다. 여러 고을에서 대부분 비석을 세웠는데도 오직 세상 사람들만이 몰랐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집안사람들도 듣지 못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자 여러 고을의 비석들이 모두 넘어져 풀 속에 묻혔다. 그러다가 비석을 세운지 60년 만에 곽산(郭山)의 비석이 우연히 수령에서 발견되어 다시 세워졌는데 다시 세운 날짜가 처음 세운 연월일과 서로 부합하였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이어 철산의 비석도 고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곽산에서처럼 다시 세워졌으니 아,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어찌 선생의 쌓은 덕과 숨은 공덕을 끝내 묻히게 할 수 없어서 조물주가 묵묵히 도와서 묻혀있던 것을 다시 드러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관서 백성들이 모두 기이하다고 감탄하며 드디어 비각을 세우고 다시 다른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선생의 아들 대총재(大冢宰; 이조판서) 대학사(大學士; 대제학) 복양씨(復陽氏)가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이 일에 기록이 없을 수 없기에 곽산의 비석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기문(記文)을 썼으니 그대의 한 마디 말을 얻어 철산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나는 문장이 졸렬하여 감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평소 선생의 덕의(德儀)를 흠앙(欽仰)하여 평생 동안 감히 잊지 못했으니 지금이 일로 인하여 그 사이 내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진실로 큰 영광이므로 감히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우리 선생께서는 도덕충인(道德忠仁)하시고 지성측달(至誠惻怛)하시어 항상 삼대(三代)를 반드시 회복할 수 있고 선왕(先王)을 반드시 본받을 수 있고 만물에게 반드시 제자리를 얻게 할 수 있다고 여기시어 들어가서 임금께 고하고 나와서 후학을 가르친 것이 모두 이런 뜻이었다. 비록 도(道)에 헌신하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서 포부를 다 펴지는 못하셨으나 선생의 평소 지향(志向)과 사업이 해와 별처럼 밝고 깨끗했다는 것은 귀신이 보증할 수 있다. 한때의 황정(荒政)이 어찌 선생의 능사(能事)가 되겠는가만 이에서도 오히려 그 인애(仁愛)의 일단을 상상해 볼 수 있는데 아 이제는 다시 볼 수가 없다. 나는 선생의 문하를 출입한 몸으로 이제 늙어 거의 죽게 되었으니 알아주시고 장려해 주신 선생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총재공은 심후한 덕과 중대한 명망으로 바야흐로 성상의 신임과 중외(中外)의 촉망을 받고 있으니 선생께서 시작만 해놓고 이루지 못하신 일을 거의 끝마치실 것이다. 주 부자(朱夫子)가 “이성부(李誠父)의 문인 제자 중에는 그 스승의 뜻을 조금도 계승한 자가 없으나 가정에 어진 아들이 있어서 그 일을 충분히 계승하였다. 학자의 기대는 대체로 보통 사람과는 같지 않다.”고 한말이 바로 오늘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 상상하건대 관서 백성들의 기대가 학자들에 비해 더욱 간절한 듯한데 총재공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선생의 휘(諱)는 익(翼)이고 자는 비경(飛卿)이며 벼슬은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며 풍양인(豐壤人)인데 학자들이 포저선생(浦渚先生)이라고 칭한다. 감당(甘棠)의 생각: 옛날 주(周) 나라 백성들이 소공(召公)의 선정(善政)을 기리기 위하여 감당(甘棠) 시(詩)를 지어 읊었던 고사처럼, 서도(西道)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추모의 마음을 그 비석에 담았다는 말이다. 《詩經 召南》 <原文> 浦渚趙相公鐵山救荒碑記 蓋在萬曆戊申之歲。關西大饑。民將靡遺。時則浦渚趙先生。以本道兵馬評事。受賑恤之任。竭誠盡力。使西民得以家活而人保。賑事纔訖。先生卽投紱而歸。西民感德含恩。實有微禹其魚之懷。相與豎石頌詠。以寓甘棠之思。諸邑多然。而不惟世之人無知之者。雖先生一家人。亦莫之聞也。歲月旣久。諸石皆顚沒於草莽。甲子一周。而郭山之碑。偶爲邑宰所得。復建之期。與始立年月日。恰恰相符。斯已奇矣。而繼有鐵山之碑。爲邑人所發。復如郭山事。噫亦奇矣。豈先生積德陰功有不容終泯。造物者默佑而陰騭之。使始晦而終顯耶。西民咸嗟異之。遂建閣於碑。復立他石。以記事實。先生之胤大冢宰大學士復陽氏以書來。謂余茲事不可無識。郭碑。不肖孤已記之矣。願得子一言。以示鐵人。余文拙不敢當。唯是生平欽仰先生德義。沒世而不敢忘。今因此事。托名於其間。固爲大榮。茲敢不辭而復之曰。惟我先生道德忠仁。至誠惻怛。常以爲三代必可復。先王必可法。萬物必可使得所。入告於君。出誨後學。皆是義也。雖殉道而退。不終厥施。其平日志業。皎如日星。可質神鬼。若其一時荒政。豈足爲先生能事。而猶可想見其仁愛之一端。噫。今不可復見矣。余出入先生門下。今老且死。愧無以副知奬之意。而冢宰公以厚德重望。方爲聖上所倚毗。中外所屬望。先生之爲兆而未究者。庶幾其終之。朱夫子謂李誠父門人弟子。旣不足以少承厥志。而家有賢子。足繼其業。學者之望。蓋非常人之比云者。正今日之謂。而想西民之望。視學者尤切爾。冢宰公其以爲如何。先生諱翼。字飛卿。官至左議政。諡文孝。豐壤人。學者稱爲浦渚先生云。 <參考文獻>浦渚趙相公鐵山救荒碑記 同春堂先生文集卷之十七 碑 운영자
의견 0개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鬪狗行 | 싸우는 개들
텅 빈 방에는 달빛만 싸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