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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동(松蘿洞; 원리, 들목일원)

들어가며.......
풍양조씨 평장공파 3세인 부정공(副正公) 우(玗)는 부인 양성이씨와의 사이에서 3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맹지(孟砥)이고 차남은 중려(仲礪)이며 3남은 조선 세종조에 생원과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장령, 의금부 진무(鎭撫), 수원도호부사, 그리고 남원도호부사 등 내외직을 역임한 계팽(季砰)으로 풍양인들 시조의 별호는 바우(岩)인데 그분의 후예이라는 뜻일까? 이들 모두 돌석(石)변 부수(部首)의 돌림을 쓰고 있다. 그러나 장남과 차남의 후손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상고(詳考)할 수가 없다. 부정공(副正公)의 묘소 또한 포천(抱川)에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역시 실전되어 찾을 수가 없다. 우리 선세(先世)에서 효제(孝悌)를 닦으신 덕업(德業)이 우리들에게만 은혜를 베풀었는지 남원공 계팽만이 이곳 광주 하도 송라동(廣州 下道 松蘿洞; 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 야목리 일원)에 자리를 잡고 대를 이어 후손이 번성을 하여 대대로 명인(名人)과 석덕(碩德; 덕이 높은 사람)이 이어지고 있다.

송림
울창한 송림(松林)이 있는 곳
광주 하도 송라동은 한남정맥의 여맥에 속하는 칠보산(七寶山; 39m)이 구릉선 산지를 일으키며 서쪽으로 뻗어 낮고 평평한 평야를 만든 기슭에 있다. 앞·뒤뜰은 광활한 전답으로 옛부터 먹을 것이 풍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조선초기에는 송림이 우거지고 어딜 가나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여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송곡(松谷), 송라동(松蘿洞) 또는 송동(松洞)은 이에 유래한다. 이곳 출신이며, 현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송곡공(松谷公) 조복양(趙復陽;1609~1671)이 찬(撰)한 남원공의 묘표음기에는 「참판부군(之縝)의 고택은 광주 송라동에 있으니 선자(浦渚公 趙翼)의 서원(明皐書院)이 그 터이다1.」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송라동」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는 곳을 당호(堂號)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송곡(松谷)이라는 공의 호(號) 역시 이 지명에서 유래한 것 같다. 송라동은 송라리(松蘿里)로 개칭되어 아직도 이 지역에 남아있는데 조선말기 행정구역이 개편·분리되며 상대적으로 숲이 우거진 마을이 차지한 것 같다.

여흥이씨의 정착
이곳 송라동(松蘿洞)은 여흥이씨가(驪興李氏家)가 먼저 정착을 하며 대성(大姓)을 이룬다. 처음 이곳을 찾은 분은 고려 공양왕 11년(1362) 문과 급제한 봉화현감(奉化縣監) 이유(李猷)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깊숙한 벽지인 병곡(丙谷)으로 이거(移居)하여 평생을 숨어살며 신왕조(朝鮮)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이곳에 봉화공파(奉化公派)의 세거지를 형성하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병곡(丙谷)이라는 지명은 개성에서 남쪽을 찾아 내려왔다 해서 ‘남녘의 골’이라는 뜻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이 은거하던 마을인 병실(丙室)로 변천하여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남원공파의 탄생
남원공(南原公) 계팽(季砰)이 언제부터 이곳에 정착을 했는지는 정확히 상고할 수는 없다. 송곡공이 찬(撰)한 남원공 비문에 의하면 공의 아들인 증참판공(贈參判公) 지진(之縝)의 고택(古宅)이 명고서원 터에 있었다고 하니 아들 대(代)부터 이곳 송동(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에 정착한 것은 확실하다.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남원공은 세종 17년 (1435) 을묘 식년시(式年試) 을과 2위로 등과를 하는데 그 기록에서 공의 거주지는 확인이 안 된다. 공의 배위는 숙부인 여흥이씨(驪興李氏)로 사헌부 감찰(監察)인 이극복(李克復)의 외따님이다. 감찰공 역시 공보다는 15년 앞서 세종 2년(경자, 1420년), 식년시 병과3위 문과급제을 한다. 그러나 문과방목 공의 인적사항에는 본관(本貫)도 거주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주이씨 족보에서도 공의 함자(銜字)는 찾을 수가 없다. 공은 후사(後嗣)가 없어 대를 잇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집안에서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고 있다. 감찰공의 묘역(墓域)은 선인(宣人) 두원오씨(荳原吳氏)와 합분으로 남원공의 묘소 윗쪽에 계시며, 공의 묘전에는 오랜 세월로 비 바람에 마모되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간단한 이력을 새겨놓은 표석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무후(无后)한데도 불구하고 계후(繼後)를 하지 않는 사회적 관행에 따라 딸이 모신듯하다. 이러한 사례는 파평윤씨 노종(魯宗) 오방파(五房派)인 명제 윤증(明齊 尹拯; 1629~1714) 집안의 분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조부인 윤돈(尹暾; 1519~1577)은 처가로부터 재산을 분배 받으며, 손(孫)이 끊긴 처가를 위해 막내아들인 윤희(尹熺)로 하여금 외손봉사를 하도록 한다.

남원공 계팽이 송동으로 이거(移居)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밝힐 수는 없다. 단지 몇 가지 방증(傍證)자료로 추측을 할 뿐이다.「송동(松洞)에는 여흥이씨 일가(一家)가 이미 정착해 있다.」「그 지척에 감찰공인 장인의 묘소가 있다.」「어느 집안이든 연고지는 선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등이다. 필자도 어려서 웃어른께 들었지만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이주했을 것이다」라는 구전이다. 분재고문서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재산 또한 분배 받았을 것이다. 증참판공의 고택이 원리에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아직도 그 일대의 토지가 동추공파(同樞公派)의 봉사조(奉祀條)로 보존되고 있다.

또 풀리지 않는 의문은「감찰공 이극복은 여흥인(驪興人)인가?」하는 부문이다. 이 또한 기록문건의 망실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렇다고 전통이 있는 가문에서 끼워 맞추기 식의 소설을 써서는 안되지 않는가? 방증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중심으로 이 부문의 의문을 풀어보자. 첫째, 우선 여주이씨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드는 교위공파(校尉公派),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조(中祖)로 모시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받드는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또한 여주이씨 3파는 관향(貫鄕)의 이름을 각기 다르게 쓰기도 했는데 교위공파는 문중에 전하는 「개성호적(開城戶籍)」에 따라 고려 때는 「황려(黃驪)」라 하였고, 조선 때는 주로 「여흥(驪興)」, 또는 「여주(驪州)」라 하였다. 여기서 교위공파 만이 「여흥」이라는 관향을 쓰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송라동으로 내려와 정착한 이씨는 교위공파이다. 둘째, 한 씨족(同族)의 계통을 기록한 책인 족보(族譜)는1476년 발간한 「안동권씨세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지만 17세기 이후부터 대동보(大同譜)는 시작이 된다. 그 전에는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초록(拔萃抄錄)한 가첩(家牒)이나 계도(系圖) 외에 선조의 전설·사적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가승(家乘) 등을 개인 소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래 전에 세계가 단절된 집안은 대동보 편집과정에 누락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따라서 오래도록 단절되었던 감찰공의 세계(世系)를 어느 누가 기록 보존했겠는가? 16세기까지의 족보에서는 사위와 딸이 아들과 차별을 받지 않지만 명분론적 성리학과 예학(禮學)이 강해지면서 조선말기에는 외손봉사도 이단시하게 된다. 셋째, 불당경찬회(佛堂慶讚會)에 승도(僧徒)들에게 공궤(供饋; 음식을 줌)를 금하도록 당시 사헌부 지평(持平)인 남원공과 사간원의 대간(臺諫)들이 계청(啓請)하는 내용이 세종실록(세종30년 11월 26일)에 나온다. 이때 이 사실을 은밀히 삼사(三司)에 알린 사람은 광흥창승(廣興倉丞) 이의인(李依仁)이며, 이분이 바로 송라동에 최초로 내려와 정착을 한 봉화현감(奉化縣監) 이유(李猷)의 아들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양쪽 집안간에 관계를 나타내는 한 사례이다.

이상과 같이 감찰공께서 여흥이씨 인가하는 논지(論旨)에 대한 답은 ‘그렇다’ 이다. 단지 세계의 오랜 단절로 부계중심(父系中心)의 혈통적 근원 내지 내력을 밝힐 가계기록이 없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당대에 문과급제를 하고 당상관 지위에 까지 오른 사위집안의 기록 또한 소중한 자료이다.

서원마을(원리)의 유래
송동(松洞)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며 집성촌을 이룬 촌락은 원리(院里)이다. 이 지역의 주 세력을 형성한 씨족은 풍양조씨(豐壤趙氏)와 여흥이씨(驪興李氏)이었다.
원리전경
이들이 조선 초 이곳으로 이거(移居)하며 많은 인물도 배출하지만 족적(足跡) 할만한 인재(人材)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좌의정을 지낸 포저 조익(浦渚 趙翼; 1579~1655)과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 있다. 성호공은 선대(先代)에서 안산(安山)으로 이주를 하여 이 지역 출신이라 할 수는 없지만 포저공은 벼슬을 그만두면 고향인 이곳에 낙향을 하여 기거(起居)을 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이곳이 너무 가깝다 하여 더 먼 곳을 찾아 충청도 신창에 은거하기도 한다. 공은 대학자답게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한 다음, 서실(書室)에 물러 나와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 공도 을미년 3월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한다.

현종(顯宗) 2년 신축년(1661)에 지역유생들은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창적으로 자신의 경학사상(經學思想)을 펼쳤으며, 애민정신과 민본중심의 실천적 사상을 확립한 대학자 포저(浦渚)의 학문을 이어받아 지역인재를 키우고, 공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공의 5대조(五代祖) 고택이 있던 자리에 명고서원(明皐書院)을 창건한다. 공이 돌아가시고 6년 후의 일이다. 뒤이어 공의 제자이며 당대 대학자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청으로 기유년(1669) 편액(扁額)이 내려지며 사액서원으로 위엄을 갖춘다. 그리고 공의 아들인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송곡(松谷) 조복양(趙復陽;1609~1671), 공의 손자이며 소론의 거두 중 일인자인 부제학 오재(迂齋) 조지겸(趙持謙;1639~1685)이 배향된다. 이 서원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게 한 가문이3대(三代) 성현(聖賢)의 제향(祭享)을 모시고 있다.

원리라는 지명은 서원이 건립되면서 유래를 하게 된다. 송동(松洞) 내에 「서원(書院)이 있는 마을」, 「서원마을」, 「원촌리(院村里)」등으로 불려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그 명은 축약하여 「원리(院里)」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들목과 구포(鷗浦)
이 시(詩)는 포저공이 만년에 야목정사(野牧亭舍) 올라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을 바라보면 춘절의 소망을 기원한 한시(漢詩)의 일부 내용이다.

봄이 와서 기쁜 기색이 천지에 가득한 때 / 春來喜氣滿乾坤
강토가 안정되고 국세가 드높아지기만을 / 疆場淸寧國勢尊
다시 원하건대 논밭에 곡식이 잘 익어서 / 更願田疇禾黍熟
노인이 배불리 먹고 자손들 재롱 받기만을 / 老人含哺弄兒孫


야목리는 원리에서 남쪽으로 3km 되는 곳으로 이 지역 역시 풍양조씨 일가(一家)가 사는 마을이다. 지금은 시화호 방조제공사로 그마저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끝없이 펼쳐진 넉넉한 들판과 썰물 때에는 꺼멓게 개벌이 들어나는 바다가 공존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지명을 갈매기가 많이 서식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구포(鷗浦)라 부르기도 한고, 야목(野牧) 또는 들목 이라 하는데 우리집안에서는 「들목」과「구포」라는 지명을 더 자주 사용한다.

화성시 홈페이지를 보니 야목리의 유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조 말에는 행정구역상 송동면 야목리(野牧里)이었다. 마을 앞에는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산기슭에는 초목이 우거져 있어 소를 방목(放牧)하는 데 적합하다고 하여 야목리란 이름이 얻어졌다고 한다.

들목전경
위에서 말하는 유래도 일리(一理)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들목은 순수 우리말이며 야목(野牧)은 들목을 한문식(漢文式)으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상상에 나래를 펴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자. 야목 앞 벌판에는 갯벌이 있고 갈매기가 날아다녔으며, 마을 어귀에는 돛단배가 드나드는 포구(浦口)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길목 첫머리부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마을의 지명(地名)은 포구에서 들어가는 맨 첫머리 또는 들머리 라는 뜻에서 ‘들목’ 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 순수 우리말이 아닌가 추측을 해본다. 우리집안이 구포와 들목을 같이 혼용하여 쓰는 것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구포조씨’, ‘들목조씨’, ‘구포종중’등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지역에서 들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을의 지명은 이미 ‘야목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유래는 잘 알 수 없지만 구포라는 지명은 소멸되지 않고 야목의 맞은쪽에 ‘비봉면 구포리’라는 동네가 있다.

길거리 표지판에서부터 산과 들 어딜 가도 선조의 자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곳 송동은 풍양조씨 평장공파 또는 남원공파에게 유서가 깊은 고장이다. 비록 중시조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우리 일가(一家)의 관향(貫鄕)으로 해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남원공 이후부터 이곳을 근원으로 일족(一族)을 이루게 된다. 송동에는 초기에 남원공의 첫째는 무후하고, 둘째 아들인 참의공(之孚)의 장손 댁과 셋째인 참판공(之縝)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린다. 초기에 참의공의 후손들은 장원급제한 사성공(司成公) 세영(世英)을 비롯하여 3명의 문과급제자를 탄생시키며 대가(大家)의 위엄을 갖추지만 그 이후 후사가 없어 불행하게도 세계가 단절되고 만다. 고려말 및 조선초의 가문의 역사를 규명할 고문서가 희소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성공의 문집은 실전되었으며, 김안국(金安國)이 찬한 승지공 인규(仁奎)의 묘지문 역시 찾을 길이 없다.

초기에는 후손(後孫)이 귀했지만 송동에 뿌리를 내린 집안은 참판공의 후손들이다. 원리와 야목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게 되는데 임진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풍양군 경(儆)의 후손, 포저공의 네 아들 중 단양공 진양(進陽), 송곡공 복양(復陽), 도산공 내양(來陽), 생원공 현양(顯陽)의 후손들 일부가 일가를 이루게 된다. 이조 말에는 송곡공의 종가 후손들이 3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하는 등 들목조씨의 전성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 부귀와 영화도 잠시일 뿐 대구판관공 희필(熙弼)이 지었다는 99칸의 고택도 다 쓰러져 없어지고 주인은 어디 갔는지 낯선 양옥집이 예손(裔孫)들의 맞이를 거절한다. 서원동산의 명고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아직도 복원되지를 못했으니 옛 위엄은 간데없고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제 들목조씨 집안의 자취는 송동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 후손들 역시 도시로 대부분 이주를 하고 현재 고향에는 10가구 정도만이 남아 전통이 있는 명문가의 명맥을 잇고 있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풍양조씨세록1권, 1981」「조선왕조실록 세종편」「국조문과방목」「포저집」 「풍양조씨세보」「노종오방파의 유서와 전통」「여주이씨역대인물지」



1 參判府君故宅。在廣州松羅洞。先子書院。是其基也。松谷集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