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집성촌 > 평택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평택•팔탄

포저공은 종제(從弟)인 순천군수(順川郡守) 학(翯)에 대한 제문에서 「계부(季父)와 나는 연배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집에서 성장했다.」라고 하며 「그 아들들도 우리 아이들과 함께 컸으니 내가 실로 종제들을 길렀다고도 할 것이다.」라며 종제의 요절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군시공 위중(君是公 韙中)은 1571(선조4, 辛未)에 태어나 1612년(광해4, 壬子) 42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휘(翬), 학(翯), 우(羽) 3형제를 두는데 운부공 (雲浮公) 휘(翬)는 42세, 군수공(郡守公) 학(翯)은 46세에 각각 세상을 등진다. 한 집안의 부자(父子) 3인이 모두 이와 같이 요절하였으니 집안의 형세가 곤궁 할 수 밖에 없었다.

포저공의 기록에 의하면 군시공의 부인께서는 빈한 집안에 홀로 남아 살림이 완전히 결딴난 상황에서 거의 생존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달픈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군수공 학(翯)은 의식(衣食)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남쪽 제주에서부터 북쪽 육진(六鎭)까지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다행히 하급관원에 몸을 담고서 인조26년 12월에는 5위도총부 경력(經歷: 종4품)이 되고, 인조28년 3월에는 순천군수(順川郡守)를 제수 받는다. 그러나 억울하게 처벌을 받고 곧 파직이 된다. 포저공께서는 어쩌면 이토록 영예는 작고 치욕은 컸단 말인가 하며 제문에서 한탄을 한다.

포저공께서는 노년에 종제(從弟)들과 들목에서 함께 이웃하고 살며 가묘(家廟)에 제사 드릴 적마다 반드시 함께 참배를 하였고, 때때로 술자리를 벌이고서 잔을 주고받으며 얼근히 취해 기뻐하곤 하였다고 한다.

군시공 위중(君是公 韙中)을 비롯하여, 일이공 지염(日而公 持廉)까지 종손댁 4대(代)는 묘소가 들목(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시공의 종손 일가는 초기에는 이곳에서 이웃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12세(世) 일이공 지염(日而公 持廉)이 다섯 명의 아들 명상(命相), 명삼(命三), 명철(命哲), 명신(命臣), 명장(命章)을 두며 변화가 온다. 종손인 필경공 명상(弼卿公 命相)의 후손은 17세에서 무후(无后)하며, 린재공 명신(鄰哉公 命臣)의 후손은 16세에서 무후하며, 문백공 명장(文伯公 命章)은 당대에서 후사(後嗣)를 두지 못한다.

단지 오겸공 명삼(五謙公 命三)과 군보공 명철(君保公 命哲)의 후손만이 평택(平澤) 오성일대(梧城一帶)로 이거(移居)하며 기틀을 잡는다. 특히 오겸공의 아들인 한량(漢良)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일족을 이루며 평택파(平澤派)로 위엄을 갖춘다. 평택파가 집성촌을 이룬 곳은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금곡리 일원이다.

순천군수(順川郡守) 학(翯)은 외아들 원양(元陽)을 두는데 공께서는 1669년 12월(현종10)에 귀후별제(歸厚別提)가 되고, 1670년 9월(현종11) 이인찰방(利仁察訪)에 제수되며, 2일 후 9월4일 왕이 사은(賜恩)까지 내리는데 9월 17일 갑작스럽게 하직을 한다. 그 사연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기에 여기 소개한다.

1670년(현종11) 10월 19일 대사간 심재(沈梓), 사간 심유(沈攸), 정언 오두헌(吳斗憲)등은 「조원양(趙元陽)은 광주의 문•무관도 아닌 백도(白徒; 과거를 보지 아는 벼슬아치)로서 장관(將官; 종9품 초관 이상의 군직)의 사만(仕滿; 벼슬아치가 그 임기를 채우던 일)하였다고 동반(東班) 정직(正職)에 제수할 수 있느냐!」”하며, 이조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친척이기 때문에 이판(吏判)이 사사롭게 추천한 것이라고 의심하며 논계(論啓)를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 판윤 서필원(徐必遠) 등은 「광주의 천총(千摠; 정3품 무관벼슬)으로서 열심히 일하여, 오래도록 근실하게 일을 하는 자를 조용(調用; 벼슬아치로 등용함)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상께 고한다. 이에 심유가 아뢰기를 「오래 열심히 일한 자를 승직(昇職)한다 라는 전조(銓曹)의 관례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대간들의 논계가 지나쳤다」며 체직(遞職)을 청한다. 어떻든 이 일로 심재와 심유는 출사하고 오두헌은 체차(遞差)된다. 물론 전조의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송곡공(松谷公) 역시 너무 빠르게 승진이동이 가능하다는 규정에 따라 찰방(察訪)으로 천거한 것은 권한을 남용했다는 오해를 받기가 충분했다.

공은 이 일로 사직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상께서는 이런 일 정도로 체직(遞職)하기는 부적절하다고 여겼는데 잇달아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니 그 해 11월 20일 마지못해 허락을 한다. 이 일은 다분히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당쟁(黨爭)으로 인해 야기된 일인 듯 하며, 서인 음해세력에 의한 모함이 아닌가 추측을 해본다. 어떻든 이로 인해 공은 문신(文臣)으로 마지막 곤욕을 치른다. 그리고 한달 남짓 해가 바뀐 1월 10일 공의 부음(訃音)을 접하게 된다. 풍양조씨 최초의 문형(文衡; 대제학)이며, 참판공파의 또 한 분의 거목(巨木)이 신해년(辛亥年) 벽두부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해였다.

그 후 원양공께서는 1676년(병진)에 무과급제하여 1685년(숙종11)에 와서별제(瓦署別提)가 되며, 1687년(숙종13)에 언양현감(彦陽縣監)으로 제수되었으니, 재종형님인 송곡공을 지하에서 떳떳하게 뵐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양공은 5남 4녀를 낳으며 번성을 하지만 두 아들은 종숙과 풍양군(豐壤君)의 지손(支孫)인 삼종숙 댁에 양자를 보내며 두 아들은 무후(无后)를 한다. 그마저 증손대(曾孫代)에 이르러 양자(養子)를 간 후손까지 모두 무후하니 역(逆)으로 풍양군 댁에서 한기(漢紀)를 양자로 삼아 언양공 종가의 대를 잇는다. 양손인 한기(漢紀)는 1755년 무과 급제하여 삼수부사(三水府使)를 지낸다.

그리고 외아들로 대를 이으며 들목에서 세거한듯 한데 존자(存字) 항렬 대(代)에서 어떤 사유인지 강원도 양구(楊口)로 이주(移住)를 한다. 그곳으로 간 자손들은 크게 번성하진 못했으며 현재 6가구 정도만이 그 지역에 살고 있다. 이분들이 군수공의 후손들이지만 몇 안 되는 풍양군(豐壤君)의 혈손(血孫)이기도 하다.

막내아들인 증군자정(贈軍資正公) 우(羽)는 충양(忠陽), 신양(信陽), 취양(就陽) 3형제를 두는데 맏아들인 충양공은 무후(无后)하며, 취양공은 무관직인 종4품 만호(萬戶) 벼슬을 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종형인 언양공(彦陽公)의 3자로 대를 잇지만 자손이 번성하지를 못하고 환존(桓存) 대에서 후손무후 한다.

오직 대를 이어 번창한 집안은 증공조참의공(贈工曹參議公) 신양(信陽)의 후손들이다. 참의공의 손자인 명벽(命璧)은 1699년(숙종25)에 태어나 81세까지 장수를 누리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하였다는 기록이 세보(世譜)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는 공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전해지는 사록(史錄)이 전무해 그 행적을 소상히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풍양조씨의 세보는 역대 서•발문과 범례에서 소상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엄격한 심사기준에 의해 가문(家門)의 역사를 수록하였기 때문에 어느 씨족의 족보보다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족보의 공의 행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정확이 밝히지 못하는 사록의 유실을 원망할 뿐이다. 공의 생전에 남긴 교지, 서찰, 유물•유묵 등이 있었을 텐데 정성스럽게 간수를 못한 후손들에게 책망을 해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2품 이상의 문•무관들에게는 죽은 부(父)•조(祖)•증조(曾祖) 3대를 그 자손의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관직이나 품계를 주던 증직제도(贈職制度)가 있었는데, 이 관례에 따라 증조부 우(羽)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조부 신양(信陽)은 공조참의(工曹參議), 부 지의(持義)에게는 공조참판(工曹參判)로 동추공(同樞公) 명벽(命璧)의 귀현(貴顯)으로 추은(推恩)되었다.

군자정공 우(羽)는 당시 팔탄(八灘) 공허(空虛)마을에 정착을 하는데, 한웅(漢雄), 한걸(漢傑), 한준(漢俊) 대에 이르러서야 자손이 번성을 하며 군자정파의 기틀을 다진다. 그리고 조선말기에 더욱 번창하여 팔탄 일대에 군자정 일족의 세거지지(世居之地)를 형성한다.

온갖 풍상과 역경 속에서도 한 마을에 일족(一族)이 모여 세(勢)를 형성하며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후손의 번창은 물론 명인(名人)도 배출이 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재력도 구비되어야 한다. 명문가문의 세거지지는 그런 역사와 전통이 그곳에 배여 대를 이어 보존된 것이다. 평택, 양구 및 팔탄에 뿌리를 내린 군시공파 후손들은 더욱 번창하고 대대로 명인(名人)과 석덕(碩德)이 끊임없이 배출되어 명문거족으로 거듭 태어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안는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조익저 이상현역, 포저집, 민족문화추진회 2006」「豐壤趙氏世譜 1996」「풍양조씨세록1권, 1981」「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