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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현 도고산 아래 우거하였다! - 온양의 후손들 -


포저공이 온양에 우거(寓居)를 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613년(광해군 5, 계축)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살이의 뜻을 접으며 관직을 버리고 광주(廣州; 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로 내려간다. 그러나 조정에서 관직을 계속 제수하자 나아가지 않고 1618년(광해군 10, 무오)에 처가가 있는 호서(湖西)의 신창현(新昌縣) 도고산(道高山) 아래로 피한다. 공이 40세 되든 해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와 글을 주고 받으며 격물(格物)에 대한 설을 강론하며 종유(從遊)한다. 1622년에는 공이 젊어서부터 시작한 경학연구서인 대학곤득(大學困得), 중용곤득(中庸困得), 논어천설(論語淺說), 맹자천설(孟子淺說) 등을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고 보완하여 하나의 책으로 완성한다. 공이 신창 도고산 (道高山) 아래 모옥(茅屋)을 떠나 조정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1623년 인조가 즉위하고 이조좌랑에 임용되며 이다.

포저공의 도고산 두번째 우거는 1636년(인조14, 병자) 병자호란이 일어 났지만 미처 호가(扈駕)를 못한 죄로 1638년 탄핵을 받고 이다. 당시 지천공(遲川公) 최명길(崔鳴吉)과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은 공의 충효(忠孝)와 절조에 대해서 극력 진달(進達)하였다. 이에 인조는 「이 사람은 독서인(讀書人; 학자)이 아니냐. 나는 본래 그가 현인(賢人)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공은 그 일로 노친(老親)을 모시고 초야(草野)로 물러나 그 후로 몇 번 상의 부름이 있어지만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지혜를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섰다. 오로지 경전(經傳) 읽기에만 진력을 다하였으며, 찬집(撰輯)하고 토론하는 일로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더불어 계고(戒告)하고 논설한《서경》의 말들을 깊이 탐구하고 음미하여 이에 대한 설을 지었으니, 이것이《서경천설》이다. 또 주역을 읽고서 괘상(卦象)을 총론하고는 그 이름을《역상개략(易象槪略)》이라고 하였다. 공께서는 거처하는 서재에 독론재(讀論齋)라는 편액(扁額)을 내 걸고 거실명(居室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가 없고, 공간적으로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양심을 지녔다고 말했고 보면 누구에겐들 이런 도리가 없겠는가. 이에 삼가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선현처럼 되겠다고 뜻을 세웠다. 마음속에는 천고의 심법(心法)이요, 거실 안에는 유가(儒家)의 서책이라. 이를 앙모(仰募)하고 연찬(硏鑽)하면서, 밥을 먹거나 다급할 때에도 행하리라. 오직 하늘을 받들어 섬길지니,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어찌 의혹을 품으리오 // 時無古今 地無遐邇 旣曰秉彛 誰欠此理 乃竊不量 先民是企 方寸千古 一室洙泗 是仰是鑽 終食造次 惟天是事 夭壽何貳

평온함도 잠깐! 당대의 석학으로서 구도의 길에서 고뇌하고 있던 그 무렵 공은 삶에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는다. 1643년 11월부터 1648년까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현씨부인, 아들 세 명, 딸, 사위 그리고 손자 등을 잃는다. 공의 사위인 이상주(李相胄)는 연양부원군의 손자인데 1643년(인조21, 계미) 9월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 문병을 위해 남쪽지방에 내려가 죽는다. 당시에 사위는 딸과 함께 신창에와 거처하였다. 공의 다섯째 아들인 생원공께서는 그해 11월에 병 치료를 위해 청주로 의원을 찾아갔다가 돌아오지도 못하고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역시 운명을 한다. 1644년 9월에는 딸마저 죽는데 포저공은 제문에서 “내가 너를 낳고 너를 기를 적에 유일한 소망은 네가 훌륭한 남편을 만나 부부간에 다정하고 화목하게 살면서 함께 장수를 누리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세간의 복을 향유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중략- 네가 지하로 들어갈 즈음에 내가 찾아와서 너와 영결을 하며 통곡을 하노라니 간장이 찢어지는 듯한데 산천도 기색이 참담하기만 하다”라고 지극한 딸 사랑을 글로 남겼다.

1645년 3월에는 현씨 부인마저 돌아가시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집안의 운세가 험난하기 그지없어서 자녀와 여서(女壻)와 손자 등 모두 8인을 잇따라 잃었다며 부부로서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5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며 회안(悔顔)과 석별의 아픔을 제문에 남겼다. 1946년 5월에는 부친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한다. 포저공께서는 장례 전에는 오직 콩가루로 죽을 쑤어 마시고, 장례 후에는 오래도록 물에 만 밥을 들다가 자제(子弟)들이 울며 간청하자 비로서 그쳤다고 한다. 상복을 벗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보내면서 노쇠했다고 하여 조금도 해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효도를 몸소 실행하었다. 그 해 12월에는 맏아들 홍산공께서 타계한다. 공은 제문에서 처음으로 얻은 아들에 대한 기쁨과 뛰어난 재덕(才德)으로 가문의 영광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건만 그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수명도 50세를 넘기지 못했다며 가슴이 쓰리고 아플 뿐이라며 이 모두 하늘의 뜻이요 운명이라며 탄식하고 있다. 장지를 아직 정하지 못하여 아산(牙山)의 우거하는 마을 뒷산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홍산공도 신창부근에 기거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1648년(인조26, 무자)에는 넷째 아들인 도산공 내양께서 운명한다. 향년 38세이다. 포저공께서 지은 묘지문에 의하면 모친상을 당하고는 그 이듬해 봄에 병을 얻었다가 가을에 차도를 보였는데, 또 이듬해 봄에 다시 병을 얻어 6월 14일에 신창 동면 광촌(廣村)의 우거하던 민사(民舍)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공께서는 재주가 뛰어 났던 것 같다. 포저공이 때때로 글을 짓노라면 공이 옆에서 부족한 점을 말해주면 그 말이 항상 옳았으며 그래서 듣고는 참고하여 고치곤 하였다고 술회한다. 포저공은 그런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 내 아들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느냐. 너는 어째서 나의 곁에 있지 않느냐! 어째서 너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며, 어째서 너의 말소리를 들을 수 없느냐! 이제는 더 이상 너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며, 너의 말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냐! 이제는 너와 영원히 헤어진 것이냐!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이냐! 아! 슬프다.”라고 시작되는 제문은 참아 읽기가 민망스럽다. 포저공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해 8월 자부(子婦)인 연안이씨가 남편과 사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통곡을 멈추지 않다가 끝내는 함께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편 포저공이 신창에 머물며 서울에 올라가기를 거부하지만 7월에 아버지 상복을 벗자 인조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임명하고 특명을 내려 역마(驛馬)를 타고 급히 올라오라고 채근을 한다. 기축년(1649) 3월에는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한다.

포저공은 이렇게 신창현 도고 땅에 두 번에 걸쳐 은거(隱居)를 하는데 그곳은 처가가 있어 그 인연으로 선대(先代) 대대로 살던 구포(鷗浦)를 피해 내려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딸에게도 균등하게 재산상속을 하는 풍속(風俗)이 있었는데 그곳에 분재(分財) 받은 재산이 있어 가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별급문기(別給文記)는 물론 그에 대한 기록도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사적(史蹟)을 밝힐만한 문건이 없다.

포저공께서 1차로 우거하였을 때 다섯 아들인 홍산공 몽양은 22살, 단양공 진양은 13살, 송곡공 복양은 10살, 도산공 내양은 6살, 그리고 생원공 현양은 4살이었다. 당시 공께서는 많은 명사들과 왕래를 하고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그리고 10년 후 2차로 우거를 하는데 포저공이 60세 일 때의 일이다. 초기에는《서경천설》 등 책도 찬술하고 서재에 독론재(讀論齋)라는 편액을 내걸며 의욕을 보이지만은 병술년(1646) 《대학곤득(大學困得)》 외에는 중반 및 후반기 가정의 잇따른 애사(哀史)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신다. 그 험난한 시기 곁에 있었던 아들은 도산공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 공께서 상복을 벗고 임금의 부름을 받아 도고를 떠나는 그 해 6월 죽는다.

그러고 나서 이곳을 다시 찾은 후손은 도산공의 손자인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이다. 세중공께서 언제 내려 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이 알 수는 없다. 아버지인 정랑공이 1685년 8월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다. 공이 9살 어린 나이었으니 형님인 증참의공 명인(命仁)과 당시에는 함께 살았다. 당시 장조카인 대사간공 한위(漢緯)와는 2살 차이였다. 대사간공은 33세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는데 그 사마방목의 기록에 의하면 거주지는 서울로 나온다. 따라서 공이 어렸을 때는 서울에서 함께 살았으며 참의공께서 1704년 53세로 세상을 뜨시니 1700년도를 전후하여 분가했을 것으로 추측이 간다. 공의 아들인 진위공 한숙(漢淑)이 1727년(영조3, 정미) 생원에 합격하는데 거주지가 온양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분가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한듯하다.

도산공의 후손인 세중공께서 이곳에 왜 다시 내려왔는지 그 또한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송곡공 장손댁에서 발견된 화회문기(和會文記)에 의하면 포저공이 돌아가시고 약 50년이 지나 5남1녀 후손들이 분재(分財)를 한다. 그 문건에 의하면 신창에 포저공 후손들의 전답질이 꽤 나타나고 있다. 최근 화성시에서 발간한《들목조씨 소장 고문서, 2006》에 수록된 소록(사진-19)에 의하면 「저희 집의 여간한 농장은 온양 등지에 있습니다. // 弟家如干庄壑在於溫泉等地」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은 문헌공 학년(鶴年) 대의 기록이고 보면 당시에도 마름을 두어 송곡 종손댁에서는 원거리 농장경영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온양현 서면(西面) 방축리(防築里) 희안(希安)마을 일원에 선산이 있으나 선영경관을 수호 및 송추(松楸)를 보호하기 위하여 윤씨와 김씨로부터 주변 산을 사들였다는 기록도 있다. 문정공 만원(萬元)의 선영경관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유추하여 보건데 온양 등지에는 도산공이 상속받은 재산도 꽤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가며, 특별히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던 세중공께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이 있는 이곳으로 낙향을 하신 것 같다. 또한 구전에 의하면 초사리 사래마을 일대의 30여만평 임야가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사패지지(賜牌之地)로 도산공이 처가로부터 상속받았다고 한다. 이곳은 아직도 여통공(汝通公) 명형(命亨) 및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 일족의 先塋地이다.

연양부원군 이시백은 도산공의 빙부이며, 포저공의 4우(四友)중 한 분이시다. 공께서는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며,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지만 청빈한 선비이었다고 한다. 공의 묘지는 천안에서 623번 국도를 따라 태화산쪽으로 가다가 대덕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매당리가 나온다. 이 마을 뒷산에 계시다. 도산공의 후손들의 선영지인 초사리와는 직선거리로 10Km 정도가 된다. 공께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우셨기 때문에 이 지역 일대에 임야를 사패지로 받은 것으로 추정이 되며, 공주일대에 부원군의 선대선영이 있는데도 불고하고 이곳에 계신 것으로 보아 공의 대에 이르러 선영이 조성된 것 같다. 따라서 그 중 일부의 임야를 딸에게 분재를 한 것이 아닌가 추정을 해본다. 그러나 상속받은 임야의 대부분은 악산(惡山)이라 산소로 쓰지 못하였으며, 초사리 사례마을 끝자락 5만여평 일대만이 명형공과 명재공 후손들 선영지로 조성이 된다.

연양부원군과 포저공은 절친한 친구이며 겹사돈이라는 특수한 관계였지만 그 외에도 우리 집안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도산공의 외아들인 정랑공 지헌은 겨우 이(齒) 갈이를 할 나이(7살)에 잇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외갓집에서 성장을 한다. 부원군께서는 그가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운 도량(度量)과 행실이 기특하여 극진한 사랑을 베푸셨다. 부원군의 전실(前室) 아내는 세 아들을 두었고, 후실(後室) 아내 황씨부인(黃氏夫人)은 자식이 없었는데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부인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부원군이 만년에 이르러서 본인은 물론 자식들도 병들고 늙었으니 공에게 유언(遺言)을 하기를 황씨부인을 모시도록 하고, 여러 자식들은 번갈아 가면서 다니며 배알(拜謁)하도록 지시했다. 공은 이를 지키기 위해 황씨부인의 친정이 가까운 예안현감을 자청하기도 했으며 지극 정성으로 모신다. 그러나 타고난 목숨이 길지 못하여 부인을 곁에 두고 먼저 가신다.

도산공의 지차(之次) 예손들이 온양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이 뿐만은 아닐 것이다. 1670년(현종 11, 경술)에 포저공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기 위해 호서지방 유생들이 뜻을 모아 서원을 창건한다. 초기에 서원의 명칭은 도촌서원(道村書院), 또는 도고서원(道高書院)이라 한다. 이긍익(李肯翊)이 저술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보면 도봉서원(道峯書院)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물지(人物誌), 향사고(享祀考) 또는 지방지(地方誌)에 의하면 도산서원(道山書院)이라 칭하고 있다. 이 모두 이 지역의 지명 또는 산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곳의 지명은 도촌(道村) 도고(道高)라고도 하며 도산(道山)이라고도 하는데 포저집에 “아들 내양에 대한 제문”에 보면 옹촌(瓮村) 또는 점촌(點村)이라는 지명도 나온다. 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일원을 의미한다. 1720년(숙종 46, 경자) 공의 문인인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이 추가로 배향된다.

유현고(儒賢考)에 의하면 포저 조익의 문인(門人)으로는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 시남(市南) 유계(兪棨), 유학(幼學) 서한주(徐漢柱), 세마(洗馬) 경대준(慶大俊), 생원 임환(任喚), 참봉(參奉) 조순필(曺舜弼), 참봉 조유일(趙惟一), 송곡(松谷) 조복양(趙復陽), 오재(迂齋) 조지겸(趙持謙)이 있다. 그러나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명에 보면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늦게야 공의 문하에 들어가서는 마음 속 깊이 진정으로 열복(悅服)하며 항상 칭송해 마지않았다.」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준길 역시 문인으로 보아도 타당할 것 같다. 동춘당문집에 신창서원(新昌書院; 도산서원을 의미함) 석채(釋菜; 석전제) 축문(祝文) 한 점이 전해 지고 있기에 여기서 소개를 한다.

新昌書院釋菜祝文 院享浦渚趙先生

어진 마음은 만물에 이루고 / 仁及於物
효심은 옮겨가 충신이 되었으며 / 孝移爲忠
사문의 스승이 있어 / 斯文有師
영원히 우리 동녘을 밝히리라 / 永表吾東


물론 서원은 그 지역의 유생들이 성현을 모시고 공부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포저공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향사(享祀)를 받들 후손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의 포저공의 후손들은 관직의 진출이 현격히 줄어들었으며 자손이 귀하여 대를 잇기가 위태롭고, 집안은 쇠락해 가고 있었다. 포저공의 종손은 물론 송곡공 역시 네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대가 끊기는 기로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 젊은 나이에 요절한 도산공과 생원공의 후손들은 꺼져가는 포저가(浦渚家)의 횃불이 되었다. 오 형제 집안의 끊어진 대는 이 두 집안의 후손들이 대를 잇는다.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가 이곳 도산을 찾은 시기도 이 무렵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도산서원을 수호하라는 포저가의 결의에 의해 사명을 짊어지고 내려오셨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도산공이 정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2차에 걸쳐 포저공이 도고에 은거할 때 늘 곁에서 있었으니 도산공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 야곡공 조극선의 문인이었으며, 도산이라는 호(號)도 이곳 지명을 딴것이다. 도산은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포저공이 그렇게 아깝게 생각했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숨을 거둔 한스러운 땅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곳에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가 첫발을 내디뎠으며, 세중공은 도산에서 6형제를 낳는데 한식(漢寔), 한숙(漢淑), 한철(漢哲), 한덕(漢德), 한일(漢逸), 한길(漢吉)이다. 그 중 둘째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중형인 여통공(汝通公) 명형(命亨)의 후사로 대를 잇게 된다. 이분이 바로 진위공(振威公) 한숙(漢淑)이다. 맏아들인 자시공(子是公) 한식(漢寔)은 후사를 잇지 못했지만 지금 온양을 기반으로 세거지를 형성하며 포저공 후손 중 가장 번성한 일족은 세중공의 6형제 후손들이다. 참판공파 전체 자손 중 35%를 점하고 있다.

특히 여통공으로 양자를 들어간 진위공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을 했다. 진위공의 장자인 군경공(君敬公) 정인(廷寅) 후손들은 아산시 온양5동 초사동 사래마을을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했으며, 20세기 산업화 물결과 함께 도시로 많이 진출하였으며, 일부는 탕정면 호산리 범이부락에 살고 있다. 작은댁인 사광공(士光公) 정온(廷溫)의 후손들은 동편 산 넘어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와 월구리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직장공(直長公) 한철(漢哲)의 후손들은 세중공의 대를 이어 장손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안공(子安公) 한덕(漢德)은 년자(年字) 항렬에서 대가 끊겨 절손이 되었다. 천민공(天民公) 한일(漢逸)의 후손들은 충남 논산시 두마면 일대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거주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 육군본부 등이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 지역이 개발되어 정든 고향을 뜨게 된다. 지금은 대전 및 서울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막내이신 계유공(季儒公) 한길(漢吉)은 개화촌에서 거주하며 종손댁과 함께 개화촌종중을 결성하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선세(先世)에서 효제(孝悌)를 닦으신 덕업(德業)이 도산의 지손(支孫)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지 가히 뿌듯하게 자손이 번창을 하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온양의 도산후손들은 도산서원이라는 글을 배울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있었지만 이를 잘 활용치 못해 명인(名人)의 배출이 빈약했고, 이로인해 포저의 사상을 계승발전 시킬만한 후손도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많은 선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있었건만 보존시키지 못한 점도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결국 도산서원은 이곳에 있지 못하고 1988년 주춧돌을 수습하여 예산군 신양면 백석 포저공의 선영 내에 복원이 된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노성에 기반을 마련한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후손들은 종학당(宗學堂)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조선말기 명문 사족가문으로 위세를 떨쳤다. 앞으로 온양에 뿌리를 내린 도산의 후손들도 더욱 번성하여 대대로 명인(名人)과 석덕(碩德)이 끊기지 않기를 바라며 명문거족으로 우뚝 서주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350년전 포저공이 도촌(道村)에서의 아픈 상처를 덜어드리는 일일 것이다.

이 글은 「포저조익선생추모사업회」조명재회장님의 증언과 도움으로 완성하였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조익저 이상현역, 포저집, 민족문화추진회 2006」「豐壤趙氏世譜 1996」 「趙明載, 개화촌종회백서」「화성시, 들묵조씨소장고문서 2007」」「송준길, 동춘당문집」「김주신, 수곡집」「문숙자,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