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집성촌 > 김포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김포 통진 집성촌

출계(出系)와 세거지(世居地)
풍양조씨 평장사공파의 한 지파(支派)인 판결사공(判決事公) 인국파(仁國波)의 경기도 김포 입향조는 판결사공의 7세손 한길(漢吉, 1789~1877)에 이르러서이다. 대략 추정하기로는 조선 고종(高宗) 때인 1867년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판결사공파의 후손은 모두 경기도 김포에 세거하게 되었으므로, 오늘날 김포파는 곧 판결사공파라 할 수 있다.
평장사공 신혁(臣赫)에서 남원공 계팽(季砰)을 거쳐 동추공 현범(賢範, ?~1538)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은 우리 문중의 주요 집성촌인 경기도 화성 ‘원리(院里)’의 소개글에 상세히 나와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동추공은 초배(初配) 파평윤씨와의 사이에서 두 분 아드님을 두었는데, 장남 언국(彦國)은 황해도 은율현감을 지냈고, 차남 한풍군 안국(安國, 1501~1573)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행주대첩에 큰 공을 세운 풍양군 경(儆, 1541~1609)과, 걸출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포저공 익(翼, 1579~1655), 송곡공 복양(復陽, 1609~1671), 오재공 지겸(持謙, 1639~1685) 등은 바로 한풍군 안국(安國)의 후손이다.
동추공은 또한 부배(副配)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한 분의 아드님을 두었는데, 이분이 바로 판결사공 인국(仁國)이다. 판결사공 인국(仁國)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달리 기록에 실려 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아버님인 동추공의 몰년(沒年)이 1538년(戊戌年)이고, 동추공의 차남인 한풍군 안국(安國)의 생년(生年)이 1501년(辛酉年)이므로 그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판결사공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부사과(副司果)의 벼슬에 있었으며 황해도 재령군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사후에는 판결사(判決事)로 추증되었는데, 판결사는 노비와 관련된 송사를 담당하는 관청인 장예원(掌隸院)의 장관으로서,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이었다. 판결사공께서 이처럼 고위관직을 추증받을 수 있었던 것은 풍양군 경(儆)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면서 공신의 3대 조상까지 높은 관직에 추증되었던 당시의 예법에 따른 것이었다.
판결사공파와 관련된 사적은 현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다만 포저공 익(翼)이 말년인 1651년(辛卯年)에 쓴 동추공의 묘표(墓表) 끝머리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 언급에 따르면, 판결사공의 자손 10여 인은 당시 경기(京畿)와 해서(海西) 지역에 흩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대동보의 판결사공 조목에 따르면, 공의 묘소는 오늘날의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었다. 또한 판결사공의 아드님인 준(俊)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에, 준(俊)의 손자이신 직(稷)의 묘소는 안산(현재는 시흥시)에 있었다. 그 외 판결사공 후손들의 모든 묘소는, 1867년 무렵 김포 통진으로 세거지를 옮기기 전까지 수대에 걸쳐 거의 대부분이 경기도 양천 개화산에 일군(一群)을 이루고 있었다.
이상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판결사공의 후손들은 16세기 이후 경기 서부지역, 특히 현재의 서울 강서구 개화동 일대에서 주로 세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포저공이 1651년(辛卯年)에 쓴 동추공 묘표의 언급으로 미루어보아, 그 무렵에는 오늘날 황해도 지역에 일부 판결사공의 후손이 거주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김포 이주 원인과 정착과정
판결사공의 후손들은 대체로 조선 말기까지 양천 개화산 일대에서 세거하였는데, 1867년 무렵, 공의 7세손 한길(漢吉, 1789~1877)에 이르러 김포 통진 땅으로 세거지를 옮기게 된다. 그렇다면 대대로 선영이 있는 개화산 일대를 떠나 낯선 곳으로 옮겨간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 악재(惡材)로 인한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한길(漢吉)의 부인인 전주이씨와 며느님 창원황씨 두 분이 갑자년(甲子年), 즉 1864년 1월 11일에 함께 운명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아마도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고 같은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현재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황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깝다. 어쨌든 이런 가화(家禍)가 살림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은 자명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세거지를 옮기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당백전(當百錢)의 발행이었다. 당시는 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해서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당백전은 1866년 10월, 우의정 김병학(金炳學)의 제의에 따라 금위영에서 11월 6일 주조, 발행하여 1867년 6월 17일 중지될 때까지 주조총액이 약 1천 6백만 냥에 달하던 화폐였다. 당백전은 모양과 중량이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당백전 1매의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할 정도로 대표적인 악화(惡貨)였다. 대원군 정부가 이러한 악화를 발행한 것은 당시 국가재정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당백전의 발행으로 한길(漢吉)은 매우 커다란 재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국가정책의 애꿎은 희생양이 된 한길(漢吉)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날한시에 홀몸이 된 아드님 정수(廷秀, 1819~1878), 그리고 큰손자 성존(誠存, 1843~1914) 내외, 둘째손자 양존(養存, 1848~1898)을 이끌고 근 80에 가까운 노구의 몸으로 김포 통진 땅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었다.
한길(漢吉)이 김포로 이주하였을 때 처음 자리잡았던 곳은 현재 하성면 하사리(霞沙里)였다. 이후 일가는 현 통진읍 동을산리를 거쳐 통진읍 귀전리(歸田里)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 한길(漢吉)의 큰손자인 성존(誠存)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당시 통진 인근에서 한학자(漢學者)로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말년에는 하성면 원산리(元山里) 일대의 명문세족인 평양조씨(平壤趙氏) 사랑방에서 그 자제일족을 가르쳤다. 또한 이런 인연으로 가솔들도 이곳 원산리쪽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성존(誠存)의 가세(家勢)는 김포로 이주하던 시절과 마찬가지여서 빈한을 면치 못하였다. 평양조씨 일족으로 성존(誠存)에게 배운 제자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스승의 집에 인사차 들렀는데, 반상에 내놓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고 전한다.
성존(誠存)에게는 두 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큰아드님은 만욱(萬勗)이고, 둘째아드님은 만정(萬靖)이다. 그런데 만정(萬靖)은 한규(漢奎) 이래로 대가 끊긴 큰집의 양자로 들어가 가계(家系)를 이었다. 당시 셋째집은 한원(漢元)의 증손인 만선(萬善)이 온전히 대를 잇고 있었다. 둘째집인 성존(誠存)의 가계는 큰아드님 만욱(萬勗)이 이어 그대로 하성면 원산리에서 살게 되었지만, 양자를 가서 큰집의 가계를 이은 만정(萬靖)은 통진 귀전리를 떠나 비교적 농토가 광활한 곳인 한강 건너 고양(高陽) 땅 송포(松浦)로 이주하였다. 당시 만정(萬靖)에게는 세 분 아드님이 있었는데, 큰아드님은 성년(性年), 둘째는 보년(普年), 셋째는 수년(壽年)이었다.
만정(萬靖)은 송포에서 1924년에 작고하였다. 그런데 집안의 커다란 환난이 그 다음 해에 찾아왔으니, 바로 1925년 을축년의 물난리였다. ‘을축년대홍수’는 당시 경성부 1년 예산의 절반이 수해복구비용으로 책정될 만큼 한강 하류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엄청난 물난리였다. 이 물난리로 만정(萬靖)의 부인 양성이씨와 큰며느님, 즉 큰아드님 성년(性年)의 부인 진천송씨가 얄궂게도 또다시 한날한시에 운명하였다. 진천송씨가 저고리에 가승(家乘)을 묶어두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을 뻔했다고 하니, 그 미증유의 환난을 짐작할 만하다.
한편 세 아드님은 겨우 통나무에 의지하여 한강 하류인 파주 교하까지 떠내려갔다가 천만다행으로 뱃사람의 손에 의해 구조되었다. 삼형제분은 그곳의 부호인 순창조씨 조동훈(趙東勳)씨 집에서 약 열흘간 구호를 받은 후, 송포의 수몰현장을 수습하고 본래의 고향인 통진 귀전리로 돌아왔다. 이후 성년(性年)은 통진 개곡리(당시 가마골) 파평윤씨와 다시 가약을 맺어 그곳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보년(普年)은 1930년 무렵 고양땅 행주로 가서 벽진이씨와 혼인한 후, 1년 남짓 처가살이를 하다가 다시 김포 통진의 고정리(高亭里)로 귀향하였다.
그 뒤로 세 형제분은 모두 귀전리(歸田里)에 다시 모여 자수성가로 일가(一家)를 일으켰으니, 오늘날까지 김포 통진 지역에서 풍양조씨 판결사공파가 세간의 주목과 칭송을 받는 까닭은 모두 세 분의 각고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판결사공파의 세계(世系)
판결사공파의 세계(世系)는 크게 세 집으로 나뉘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이 세 집은 판결사공의 5세손인 국장(國章) ․ 태장(泰章, 1716~?) ․ 세장(世章, 1727~1793) 등 세 분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 이후 판결사공의 7대손 한규(漢奎, 1777~1815) ․ 한길(漢吉, 1789~1877) ․ 한원(漢元, 1794~?) 등 세 분의 후손들은 각각 큰집, 둘째집, 셋째집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그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큰집인 한규(漢奎), 셋째집인 한원(漢元)의 가계가 끊기게 되자 둘째집인 한길(漢吉)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두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끊어진 세계(世系)를 이었다. 따라서 실제로는 세 집이 모두 한길(漢吉)의 직손(直孫)이며, 더 나아가 현존하는 판결사공파의 후손은 모두 한길(漢吉)의 손자이신 성존(誠存, 1843~1914)의 직손이 된다.
판결사공파의 큰집에 해당하는 한규(漢奎)의 가계는 양자로 들어간 친조카 정학(廷學, 1814~1844)이 후사가 없어 다시 끊어졌다. 두 분의 묘소가 개화산이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큰집은 양천 개화산 일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둘째집 정수(廷秀, 1819~1878)의 차남 양존(養存, 1848~1898)이 양자로 가서 큰집을 잇게 되자 큰집의 세거지는 자연스럽게 김포 통진이 되었다. 한편 양존(養存) 역시 후사가 없자, 그 친형님인 성존(誠存)의 차남 만정(萬靖, 1869~1924)이 또다시 양자로 가서 잇게 되었다. 이로써 결국 둘째집의 만정(萬靖)이 큰집을 잇게 되었는데, 그분의 세 아드님인 성년(性年, 1900~1989) ․ 보년(普年, 1908~1984) ․ 수년(壽年, 1910~1981) 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1930년대 들어서면서 통진 귀전리에 정착하였다. 이후 성년(性年)과 보년(普年)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김포와 그 인근 지역에서 각각 일가(一家)를 이루어 큰집의 명맥을 잇고 있다.
판결사공파의 둘째집은 처음 자리잡은 하성 하사리로부터 통진 귀전리에 정착하기까지 한길(漢吉)-정수(廷秀)-성존(誠存)으로 온전히 이어졌다. 성존(誠存)은 말년에 가솔을 거느리고 하성면 원산리로 옮겨갔는데, 이후 둘째집은 그곳에서 장남인 만욱(萬勗, 1867~1902)-두년(斗年, 1892~1977)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졌다. 두년(斗年)은 말년에 서울의 영등포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은 현재 경기도 부천지역 일대에서 각각 일가(一家)를 이루어 둘째집을 잇고 있다.
판결사공파의 셋째집은 한원(漢元)-정하(廷夏, 1817~?)-경존(敬存, 1843~1896)-만선(萬善, 1892~1936)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이어졌다. 그 세거지를 묘소의 소재로써 추적해보면, 셋째집은 선대(先代)로부터 경존(敬存)까지 양천 개화산 일대에 거주하였다가 만선(萬善)에서부터 김포에 정착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만선(萬善)에게 아드님이 없어 세계(世系)가 끊기게 되자, 둘째집에서 큰집에 양자로 간 만정(萬靖)의 셋째 아드님 수년(壽年, 1910~1981)이 그 후사가 되었다. 수년(壽年)은 당초 두 분 형님들과 함께 통진 귀전리에 정착하였으나, 이후 가솔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주한 이래, 그 후손은 오늘날 포천 등지에서 각각 일가(一家)를 이루어 셋째집 계보를 잇고 있다.
이상으로 판결사공파의 세계(世系)를 개괄해보았다. 2007년 2월 현재, 생존해있는 판결사공파 후손은 모두 62명에 이르는데, 그 중 남자는 32명, 여자는 30명이다.
판결사공파의 후손들은 선대의 뼈앞은 역사를 가슴 깊이 되새겨 김포에 새롭게 조성한 추원묘역을 성실하게 보전할 것이다. 또한 숭조(崇祖)의 전통을 바탕으로 창조적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만남과 교육의 장도 차츰 갖추어나갈 예정이다.

서기 2007년 2월 판결사공 13세손 민재(敏載)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