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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집성촌(集姓村)

성(姓)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을 집성촌이라고 한다.
남원공 계평(南原公 季砰)이 광주 하도 송동(廣州 下道 松洞; 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 야목리 일원)으로 이주하여 세거지지(世居之地)를 이룬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묘소가 남양부 북소교촌 수작리(南陽府 北小嬌村 壽作里; 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송림리 산154번지)에 있고부터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추측이 간다. 남원공은 여흥이씨와의 사이에서 5남 1녀를 두는데 이들의 분파(分派)과정을 통해 집성촌의 형성과정을 살펴본다.

첫째, 전직공 지완(殿直公 之完)은 3남2녀를 두지만 세온(世溫), 세양(世良), 세공(世恭) 모두 후손이 무후(无后)한다.

둘째, 참의공 지부(參議公 之孚)는 7남1녀인 참판 세보(參判 世輔), 진사 세필(進士 世弼), 세좌(世佐), 세우(世佑), 생원 세호(生員 世豪), 세준(世俊), 사성 세영(司成 世英) 두는데 세보와 그 아들인 인규(仁奎), 세영은 현달(顯達)을 하여 송동지역의 사대부로 발돋움하지만 손이 끊겨 대를 잇지 못했으며, 세필의 후손은 강원도 춘성, 세우는 경상도 김해, 세호는 부근인 반월 초평리 등으로 흩어져 번성을 하게 된다.

셋째, 참판공 지진(參判公 之縝)은 2남1녀를 두는데 장남인 현전(賢傳)의 후손은 번성하지 못하고 10세(十世)에 이루어 후예무고(后裔无考)로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 차남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현범(賢範)은 3남을 두는데 은율현감(殷栗縣監) 언국(彦國), 한풍군 안국(漢豐君 安國), 판결사 인국(判決事 仁國)이다. 참판공파(參判公派)라 함은 이들 세분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은율현감(殷栗縣監) 언국(彦國)의 장손(長孫)은 무(无)하고 지손(支孫)인 덕남(德男)의 아들 대(代)부터 황해도 옹진일원(甕津一圓)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는데 1935년 발생된 을해파보(乙亥派譜) 이후로는 남북분단으로 그 연고(緣故)를 확인할 길 없다.
한풍군 안국(漢豐君 安國)은 승사랑 엄(承仕郞 儼), 좌찬성 간(左贊成 侃), 풍양군 경(豐陽君 儆) 3남1녀를 두는데 장손인 엄은 후사가 없어 간의 2남인 진사 성중(進士 省中)1 으로 대를 잇지만 그 역시 무후하고 만다. 이곳 송동(원리, 들목)에 유일하게 뿌리를 내려 세거지지(世居之地)를 이루며 수원지방의 대표적인 사족(士族)으로 명망을 얻는 후손은 한풍군의 자손들이다. 공의 아들 좌찬성공은 종손(宗孫)인 포저 익(浦渚 翼) 대(代)에 이루어 5남1녀를 두며 번창을 하는데, 이들 중 송동(松洞)에 정착은 단양군수 진양(丹陽郡守 進陽), 송곡 복양(松谷 復陽), 도산 내양(道山 來陽), 생원 현양(生員 顯陽)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며 일가(一家)를 이루게 된다.
이들은 다시 분파(分派)하여 간·영중·익·몽양으로 이어지는 장손(長孫)들이 의정공 영중(議政公 瑩中)과 포저공(浦渚公)의 묘소가 있는 예산(禮山)일원에 정착을 하며, 익·내양·지헌·명형으로 분파되는 후손들은 포저공이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잠시 은거(隱居)했던 온양(溫陽)일대에 번성을 한다. 또한 간·위중·휘로 이어지는 후손들은 평택(平澤)일대에 대성(大姓)을 이루며, 위중·우·신양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은 화성 팔탄일원(八灘一圓)에 터전을 잡는다.
판결사공 인국(判決事公 仁國)은 양주이담화희대(楊州伊淡黃喜臺) 지금의 동두천 부근으로 이주를 하나 11세인 성희(聖希)와 성운(聖雲) 형제분부터 양천 개화산(開花山)일원에 정착을 하며, 14세인 한길(漢吉) 이후부터 김포(金浦)일원에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며 부흥을 한다.

넷째, 지밀(之密)은 세범(世範)·언규(彦奎)·욱(旭)·경립(敬立)·숙(䎘)까지 독자로 대를 잇지만 10세부터 그마저 세계(世系)가 단절이 된다.

다섯째인 지식(之寔)은 세창(世昌) 대에서 세사(世嗣)을 잇지 못하고 무(无)한다.

한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며 가문의 역사를 만들고, 그 주변지역에 문화를 꽃피우는 것은 우리 씨족사회(氏族社會)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21세기 글로벌화 추세에 따라 가난한 국가의 경제는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에 예속되듯이 문화 역시 물이 흐르듯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우리에게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가문문화(家門文化) 역시 우리의 무관심과 몰이해(沒理解)로 매몰되고 사라지는 수난을 당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화와 함께 집성촌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으며 이제 그 흔적마저 없어지는 위기에 처해있다. 우수한 문화유산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씨족의 전통과 조상의 얼이 담긴 가문문화의 보존은 우리 후손들의 목임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참판공파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송동(松洞; 원리, 들목)을 시작으로 예산(禮山), 온양(溫陽), 평택(平澤), 팔탄(八灘), 김포(金浦) 세거지지(世居之地)의 분파과정(分派過程)을 소개하고 있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풍양조씨세록1권, 1981」「풍양조씨세보」



1 성중(省中)이 큰아버지인 엄(儼)에게 양자를 간 기록은 세보(世譜)에는 없으며 선조21년(1588) 진사시에 합격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