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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공파 발차취 > 선영 > 원리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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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선영

원리는 세종시대에 남원공이 처음 내려와 정착한 곳으로 500백년 이상을 대대로 지켜온 참판공파(參判公派)의 유서 깊은 세거지(世居地)이다. 선조들의 세장지(世葬地) 또한 주변 인근에 산재되어 있다.

이조판서 문헌공 학년(文憲公 鶴年)은 처음에 수원의 장지산(長芝山)에 장사를 지냈다가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인 명고서원(明皐書院) 구터로 이장을 한 것은 1902년(광무5년)이다. 명고서원은 포저공(浦渚公) 조익(趙翼), 송곡공(松谷公) 조복양(趙復陽), 오재공(迂齋公) 조지겸(趙持謙) 3대(三代)가 제향된 사액서원으로 현종(顯宗)2년 신축년(1661)에 짓고 무신년(1668.12.5)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청으로 편액(扁額)을 하사 받는다. 그러나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명령에 따라 1868년에는 서원에 하사한 토지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지방 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도록 했으며, 1870년에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도록 하였다. 그때 명고서원은 훼철되고 만다. 그 당시 위패는 서원 터 뒤쪽 산기슭에 매안(埋安)하여 자손들이 수호하였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나 문헌공이 그 터로 후손들에 의해 이장이 된다. 이로 인해 명고서원은 다시 한번 훼손이 되는데 이것이 연유가 되어 그 파(派)의 후손들은 땅의 연고권까지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마저 보존을 못하고 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니, 묘소 또한 남의 땅이기에 송라리 선영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이 터의 아래자락은 증참판공(贈叅判公) 지진(之縝)의 생가 터 이기도 한데 그 자취는 주변지역 도시화로 인해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주춧돌 몇 개 만이 덩그러니 그 흔적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마저 알고 있는 후손은 몇 사람이나 될까? 안타깝고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130년이 지난 지금 뜻있는 후손 몇 사람들이 서원복원(書院復元)을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명고서원은 화성시에 하나밖에 없는 사액서원으로 이 지방의 뜻 깊은 문화유산이다. 그러한 유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쪽 산기슭으로는 송곡공의 둘째 아들 지성공(持成公)의 종택이 있는데 뒤쪽 선산에는 후대종손(後代宗孫)들의 묘소가 밀집되어 있다.

[筆者: 丙燮]


분묘목록

17世 학생만갑묘(學生萬甲墓)
18世 학생우년묘합부(學生禹年墓合祔)
19世 학생희용묘합부(學生熙龍墓合祔)
20세 학생명재묘쌍분(學生明載墓雙墳) 후배순흥안씨묘(後配順興安氏墓), 삼배전주이씨묘(三配全州李氏墓)
21世 학생돈흥묘합부(學生敦興墓合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