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참판공파 발차취 > 선영 > 숙곡리선영


+ 중시조 이야기


+ 집성촌


+ 선영


+ 인물열전

+ 행장 및 묘도문


+ 고전문학


+ 잊혀진 이야기



숙곡리 선영

풍양군(豐壤君)께서는 선조(宣祖)의 승하로 상심(傷心)을 하며 채식(菜食)만 하다가 위장병이 생겼으며, 악성 종기로 광해 원년(1609) 3월 8일 동문(東門) 밖 자택에서 돌아갔으니 향년 69세이었다. 조정에서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祭祀)와 부의(賻儀)를 하사했다. 그 해 4월 21일 국장(國葬)으로 광주군 하도면 동천촌에서 봉행(奉行)되었으니 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양좌(良坐)이다.

공(公)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에서 큰 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이였지만 청렴하고 근면하며 가정은 항상 빈한(貧寒)하여 높은 벼슬하는 집 같지않게 살았다고 한다. 돌아가서도 그러했으니 공은 묘역(墓域)을 호화롭지 않게 하라는 유언(遺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임난(壬亂) 때 불호령을 치던 행주대첩(幸州大捷)의 명장군이 머물러 있는 곳 치고는 너무도 초라하게 그곳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표석(表石)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곳은 공이 영원히 머물 수 없는 유택(幽宅)이였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공은1998년 9월 반월 직동선영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출토된 장군의 복식유물(服飾遺物)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을 하였으며, 특히 해치흉배(獬豸胸背) 는 조선중기 흉배사 정립에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한다. 공이 돌아가시고 390년 만에 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그 묘역을 새롭게 단장을 하였으니 종손(從孫)인 좌의정 익(翼)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도 그때야 비로서 묘도(墓道)의 안내자가 되었다.

[筆者: 丙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