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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공백석병언선생공적비(豐壤趙公白石丙彦先生功績碑)

아아 白石先生이여 !

白石公의 諱는 丙彦이요, 字는 士國, 號는 白石이며, 豐壤人이다.
公은 1927년 11월 6일 先考 諱 鍾黙公과 順興安氏 사이에서 5남매 중 장자로 태어났으며. 공이 성장한 東華山기슭 백석골은 깨끗하고 지조있게 살다간 聖人 浦渚先生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로 포저선생의 학행과 효행의 자취가 묻어나는 사대부 집안의 엄중한 계율 하에서 家學의 전통을 전수받으며 성장하였다. 1946년 9월 최고의 명문인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에 합격을 하여 가족은 물론 향리사람들에게 영예로움을 안겨주었다. 1953년 공무원으로 첫발을 내딛어 인하공과대학에서 근무했으며 1968년 건축설계사무소를 경영하며 혈기왕성한 장년기를 보낸다.

1980년 낙향을 결심하여 쇠락해가는 宗家를 재건하고 포저선생의 가려진 위업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게 된다. 1983년 공의 주도로 여러 宗人들과 浦渚趙翼先生追慕事業會를 결성하여 1985년 재실인 慕渚齋를 지었으며, 弟 丙秀와 함께 公州 麻谷寺 공양간 다락에서 浦渚遺書 및 松谷文集 목판각을 찾아내어 1987년에는 이것을 충청남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받고, 浦渚趙翼先生의 묘와 이곳에서 출토된 白磁 墓誌銘을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았다. 그리고 1988년에는 추모사업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이 사업을 통해 사당, 유물전시관, 보호각을 준공하고 또한 道山書院을 복원하게된다. 도산서원은 포저선생과 冶谷 趙克善先生의 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道高面 道山里에 湖西유생들이 세웠던 것이며 현지에 복원이 불가능하여 주춧돌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또한 公의 큰 업적은 도처에 흩어져 있는 포저선생의 遺墨과 遺物을 수집 정리하여 유물전시관 전시뿐만 아니라 책자로 발간함으로써 포저선생의 삶과 사상 및 師友關係 등을 재조명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추모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白石公이 이들 사업을 수행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종인들로부터 기금 모금과 국고보조금을 지원 받는데 있었으니 이로 인한 공의 헌신적인 희생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운명하시기 직전까지도 군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六角亭을 준공하였으니 그 열정에 감탄과 경의를 표할 뿐 만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선후배들은 포저선생의 고귀한 학풍과 빛나는 업적에 의한 것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여기에 백석공의 훌륭하고 숭엄한 浦渚先生을 위한 추모사업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음이 실로 유감이다. 백석공께서는 생전에 大興鄕校 典校로서 선조들의 얼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동시에 후학 지도에도 열정을 바치셨다.

公은 婦人 淸州韓氏 壽喜女史와의 사이에서 元紀, 天紀, 恒紀, 淑賢 3男1女를 두셨다. 公은 이제 2006年 10月 5日 그토록 사모하던 포저선생의 곁으로 돌아가셨으니 공을 기리는 지인들은 백석의 고결한 정신에는 포저선생의 기품이 서려 있는 것만 같다고 회고한다. 오늘의 포저선생의 祠堂과 道山書院 복원의 아름답고 고귀함이 백석공의 손길에 있었고 가치있는 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이 어찌 후손에게 영광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세월은 흐르고 백석은 떠나셨지만 그 어른을 崇慕하는 後學과 후손들은 公의 생애와 경륜에 무릎을 조아리며 그 공덕을 黙想하게 되었음에 오늘따라 눈시울이 뜨겁다.


서기 2007년 10월 일


禮山 李 在 仁이 삼가 碑文을 짓고

一濤 朴 榮 鎭이 앞면에 글씨를 쓰다


浦渚趙翼先生追慕事業會長 文谷 明 載

文孝公浦渚趙翼先生宗會長 丙 俊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