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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선영

묘역실전(失傳)의 사유
판결사공파의 묘소는 모두 경기도 일대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판결사공 인국(仁國)으로부터 근 10세(世), 약 300여 년 간에 걸쳐 형성된 묘소들 대부분이 안타깝게도 실전되었고, 공(公)의 7세손 한길(韓吉, 1789~1877)을 비롯하여 그 직손(直孫)들 유해만 현재 김포와 시흥 선영에 계시다.

판결사공 인국(仁國)의 몰년(沒年)은 160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대동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 묘소는 ‘양주이담황희대(楊州伊淡黃喜臺)’로 되어 있다. 공(公)의 묘소가 있었던 양주군 이담면은 현재 동두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옛 명칭이다. 황희대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이 얼마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와 관련 누각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 후 이곳 지명은 점차 와전되어 ‘황아터’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공(公)의 11세손 보년(普年, 1908~1984)은 과거 수차례에 걸쳐 동두천을 찾아가 고을 원로들에게 황희대를 탐문하고 공(公)의 묘소를 찾았으나, 애석하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판결사공의 아드님 준(俊)의 묘소는 대동보에 의하면, ‘장단서면(長湍西面)’으로 되어있는데, 이곳은 현재 임진강 북쪽이어서 찾을 도리가 없다. 한편 준(俊)의 손자이신 직(稷)의 묘소는 ‘안산구지정(安山九池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 역시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현재 ‘구지정’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시로 편입되어 있는데, 아직까지도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상 판결사공을 포함한 세 분의 묘소를 제외하면, 공의 후손들은 준(俊)의 아드님인 천유(天裕) 이후 8대에 걸쳐 양천 개화산 인근에 살며 그곳에 선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이곳 선영은 모두 실전되었다.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상고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곳은 당연히 판결사공파의 가장 큰 묘역이었다. 선영이 실전(失傳)된 까닭은 1936~1941년에 걸친 일제의 김포 비행장 건설 때문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중국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가기 위해 우리나라를 병참기지화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중간기지로서의 비행장이 필요했는데, 여의도비행장은 당시에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러 사용할 수 없었다. 이에 일제는 여의도비행장 크기만한 비행장을 현재의 김포공항에 건설하였다. 한편 그즈음 김포 통진 쪽에서 세거하고 있던 판결사공의 후손들은 사상 유래가 없는 1925년의 을축년 물난리를 겪으며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조상의 묘소조차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일제에 의한 김포비행장 건설과 확대로 인해 개화산의 선영이 완전히 파훼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연유로, 현재 김포 통진 귀전리의 판결사공파 추원묘역에는 김포로 세거지를 옮긴 한길(漢吉) 이후의 후손들 유해만 온전히 안장되어 전할 뿐이다.


추원묘역(追遠墓域)의 조성
비록 양천 개화산의 선영이 훼손되는 것을 보존하지는 못하였지만, 한길(漢吉, 1789~1877) 이후 판결사공 후손의 묘소는 김포 하성면 일대에 흩어진 채로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묘소가 여기저기 산재하다보니 성묘와 보존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1976년 3월, 판결사공의 11세손 두년(斗年) ․ 성년(性年) ․ 보년(普年) ․ 수년(壽年) 등의 자손들은 김포 입향조인 한길(漢吉) 이하 여러 선조들의 흩어진 묘소를 김포시 통진읍 귀전리 산95번지(일명 忠襲山 또는 택뫼)로 옮겨 면봉(緬奉)함으로써 가족묘역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가족묘역을 조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30년이 지나다보니 이 묘역 역시 세월의 변화로 나날이 퇴락하여 다시 가다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 보년(普年)의 묘소는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가족묘역과는 별도로 양지바른 산속(통진읍 귀전리 산15번지) 묘역에 20여 년 동안 부인 벽진이씨와 함께 단기(單基)로 안장되어 있었다. 이에 판결사공 12세손 희철(熙喆) ․ 희삼(熙三) ․ 희갑(熙甲), 13세손 원재(元載) ․ 영재(英載) 등이 숙의(熟議)하여 기존의 가족묘역을 이곳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하고, 동시에 실전 선조의 추원영단(追遠靈壇)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서기 2005년 3월 29일, 후손 일동은 한길(漢吉) 이하 선조 열위의 묘소를 파분(破墳)하여 삼가 화장하고, 그 유해를 새롭게 조성한 보년의 묘역 상하에 면봉하였다. 또한 판결사공 이하 10대에 걸쳐 동두천, 장단, 시흥, 개화산 일대에서 실전된 선조 열위(列位)의 지석(誌石)을 묘역 상단에 안장하고 합동추원영단(合同追遠靈壇)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판결사공의 후손들은, 둘째집 묘역(경기도 시흥시 방산동)에 안장된 두년(斗年) 외 2기(基)의 묘소를 제외한, 판결사공파 모든 선조들의 혼령과 유해를 빠짐없이 한곳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서기 2006년 11월 26일, 후손 일동은 450여 년 남짓 공(公)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온 내력을 간추려 기록한 ‘추원묘역조성기(追遠墓域造成記)’의 표석을 건립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선조 열위의 묘역 실전 이후 그토록 간절히 바래왔던 판결사공파 선영이 온전히 조성되고, 그 경위 또한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후손 일동은 새롭게 마련한 추원묘역의 상석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아울러 판결사공 이하 모든 선조 열위에 대한 시제(時祭)를 읍혈(泣血)로써 봉행하였다.

[筆者: 판결사공 13세손 민재(敏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