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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선영

조선시대에는 지방별 이해관계, 학문의 계통에 따른 견해차, 연령•직위의 고하에 따른 시국관의 차이 등에서 서로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들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그에 반대되는 집단과 대립•반목하기 시작한 것이 당쟁이며 붕당정치(朋黨政治)이다. 숙종(肅宗) 때에 노•소론(老•少論)의 당쟁은 학문적•사상적 기반의 차이에서 발생된 것으로, 주자절대론과 주자상대론 간의 차이에서부터 명분론•의리론과 실리론 간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문재(文才)가 있었고 처신에 청약(淸約)하여 인망이 두터웠던 오재공(迂齋公) 지겸(持謙)은 김익훈(金益勳)의 남인모반사건 조작과 선대(先代)부터 명재(明齋) 윤증(尹拯)과의 두터운 우의 관계로 인하여 소론의 거두 중 일인이 된다. 그러나 오재공은 숙종11년(1685) 향년 46세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제수되었으나 두 번이나 상소하여 체임(遞任)되고 그 해 7월에 돌아갔다. 고복(皐復; 초혼1 하고 발상(發喪)하는 의식)을 하고 나자 흰 빛깔의 구름이 옥상에 펼쳐있고 백조(白鳥) 한 떼가 집 주변을 맴돌다 날라가니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한다.

오재공을 광주 송동면 비늘치(鱗峙)에 장사 지내는 날 문상객의 행렬이 명고서원(明皐書院)이 있는 원리(院里) 초입까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구름 같은 인파로 공의 마지막 길을 애도(哀悼)하였다는 일화가 아직도 구전(口傳)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은 신도비에서‘청빙고벽(靑氷苦蘗)과 같은 청렴이 있고 은산록벽(銀山錄壁)과 같은 지조(志操)가 있었으니 한마디로 논하면「보지 못했던 강직한 사람」이다.’라고 오재공을 평하고 있다.

그러나 오재공께서 잠드셨던 ‘비늘치’ 마루턱이 공에게는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었나 보다. 지금은 그 후손들에 의해 정들었던 고향을 멀리하고 충남 논산시 노성면 하도리(성재동)로 이장을 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비늘치’에는 도적무리들이 많았다 하니 지조있는 선비가 누울 곳은 아니었던 것 같다.

[筆者: 丙燮]


1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허리에 대고는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