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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촌선영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가 계신 곳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학성산이다. 공은 도산공(道山公) 내양(來陽)의 지차(之次)로 온양에 세거(世居)하며 일족을 이룬 온양파 파시조(派始祖)이기도 하다.

공(公)께서 이곳과의 연(緣)은 거슬러 올라가 증조부인 포저공(浦渚公) 익(翼)이 1613년(광해 5년)과 1634년(인조 14년) 두 번에 걸쳐 관직을 버리고 우거(寓居)를 하면서 비롯된다. 조부인 도산공(道山公)은 이곳에서 1648년(인조26) 6월에 젊은 나이인 35세에 요절한 땅이기도 하다. 포저공은 그 해 7월 인조께서 역마(驛馬)라도 타고 올라오라며 채근(採根)을 하여, 몇 번 사체(辭遞)를 하다 마지못해 10월에 좌참찬에 임명되어 이곳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나 1700년 전후하여 도산공의 손자인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는 이곳에 되돌아 온다. 공께서 여기에 왜 다시 돌아왔는가에 대해서는 집성촌 온양편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공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도산서원(道山書院)으로부터 직선거리로 4Km 남직한 곳인 초사동 사래마을 부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식(漢寔), 한숙(漢淑), 한철(漢哲), 한덕(漢德), 한일(漢逸), 한길(漢吉) 6 형제를 낳으며 온양파 가문의 발흥(發興)을 위한 초석을 닦는다. 한숙은 1727년(영조3), 한철은 1740년(영조 16) 각각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위현령(振威縣令)과 태능직장(泰陵直長)을 지낸다. 세중공께서는 한숙을 중형(仲兄)의 계대(繼代)를 잇게 하고, 맏아들을 비롯한 나머지 4형제는 공의 대를 잇게 한다. 그러나 대를 이어 이곳에서 같이 뿌리를 내리며 번창을 한 후손 중 68%는 진위공의 자손들이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를 잡으며 중기(中期) 이후 예학(禮學)을 중시하면서부터 백골양자(白骨養子)라도 하여 소목지서(昭穆之序)의 원칙을 지키려는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들이다.

세중공이 계신 학성산 선영에는 직장공(直長公) 한철(漢哲), 흥숙공(興叔公) 정림(庭臨)도 함께 3대가 계시다. 자시공(子是公)인 한식(漢寔)이 후사가 없어 직장공의 후손들이 승계하여 종손 역할을 하였는데, 본격적인 위선사(爲先事)는 1923년 상지공(尙之公) 경재(慶載)가 주축이 되어 시사(時祀)는 물론 선영수호를 위한 종회를 결성하고부터 이다. 공은 선영유지는 물론 시사(時祀)를 받들기 위한 온양일가 전체가 참여하는 신창읍 인사동 계(契)를 조직하고 봉사조(奉祀條)를 만들기 위한 기틀을 다진다. 1958년 다소 지지부진한 종회를 경빈공(敬賓공) 건재(建載)가 중심이 되어 재 결성하였으나 이 또한 도중에 중단된다. 특히나 직장공파 종가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데 흥숙공(興叔公) 정임(廷臨) 이후부터 3대(代)에 걸쳐 후사(後嗣)가 없어 양아들로 대를 잇는다. 이러다 보니 종가가 올바로 될 리가 만무하다. 가세(家勢)는 기울고, 있는 재산조차 제대로 보존이 안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학성산일대 선산도 일제강점기 신고하지 않고 방치하였다가 시유지(市有地)가 되어 국가에 귀속된 것이다. 1975년 종손댁 차손(次孫)인 명재(明載)씨는 그 동안 종가(宗家)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죄스러움과 가문의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종회조직을 재정비하고 위선사(爲先事)에 앞장을 선다. 그 중에 첫 번째 사업은 주변지역이 도시화로 점점 매몰되어 가고, 흩어져 있는 선영을 한곳으로 모으는 일이었다. 특히나 향후 분묘(墳墓)의 유지는 어렵다고 보고 종인(宗人)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납골묘(納骨墓)를 만들기로 합의를 본다. 그리고 계유공(季儒公) 한길(漢吉)의 종손인 돈면(敦冕)종인이 소유하고 있는 임야 일부를 희사(喜捨)하여 2001년 5월에 아산시 초사동 산58-1번지에 봉문형 납골묘를 건립한다. 납골당의 건립으로 온양의 종인들은 새로운 분묘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곳에는 세중공(世仲公) 명재(命才)를 비롯하여 그 후손인 20세(世) 재자(載字) 항렬까지 현재 87기를 안치하였다. 그 외에도 아산시 문산(현 신인동), 공산(현 송악면 역촌리), 초사동 등지에는 선영이 있었다.

그 동안 많은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실전(失傳)없이 분묘를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은 선세(先世)에서 효제(孝悌)를 닦으신 덕업(德業)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매년 10월12일되면 세중공(世仲公)의 후손들은 조상의 음덕(蔭德)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곳에서 제(祭)를 받들고 있다.


봉안목록

13世 휘명재(諱命才) 배(配) 파평윤씨(坡平尹氏)
14世 휘한철(諱漢哲) 배(配) 청송심씨(靑松沈氏)
14世 휘한길(諱漢吉) 배(配) 안동김씨(安東金氏). 후배(后配) 연안이씨(延安李氏)
15世 휘정임(諱廷臨) 배(配) 전의이씨(全義李氏)
15世 휘정준(諱庭俊) 배(配) 남평문씨(南平文氏)
15世 휘정복(諱庭復) 배(配) 함평이씨(咸平李氏)
16世 휘심존(諱心存) 배(配) 김해김씨(金海金氏)
16世 휘행존(諱行存) 배(配) 언양김씨(彦陽金氏)
16世 휘양존(諱亮存) 배(配) 공산김씨(公山金氏) 16世 휘의존(諱義存)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후배(后配) 공산김씨(公山金氏)
17世 휘만수(諱萬綏) 배(配) 청주한씨(淸州韓氏)
17世 휘만철(諱萬喆) 배(配) 안동김씨(安東金氏)
17世 휘만수(諱萬秀) 배(配) 무주김씨(茂朱金氏)
17世 휘만식(諱萬植) 배(配) 여흥민씨(驪興閔氏). 후배(后配) 덕수이씨(德水李氏). 삼배(三配) 영천이씨(永川李氏)
17世 휘만헌(諱萬憲) 배(配) 전의이씨(全義李氏). 후배(后配) 청송심씨(靑松沈氏)
18世 휘유년(諱有年) 배(配) 덕수이씨(德水李氏). 후배(后配) 경주김씨(慶州金氏)
18世 휘우년(諱友年)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후배(后配) 담양전씨(潭陽田氏)
18世 휘재년(諱在年) 배(配) 광주이씨(廣州李氏). 후배(后配) 남양홍씨(南陽洪氏)
18世 휘구년(諱龜年) 배(配) 양천허씨(陽川許氏)
18世 휘성년(諱星年) 배(配) 평택임씨(平澤林氏)
18世 휘영년(諱英年) 배(配) 파평윤씨(坡平尹氏)
18世 휘항년(諱恒年) 배(配) 연안이씨(延安李氏). 후배(后配) 전주이씨(全州李氏)
18世 휘강년(諱康年) 배(配) 순흥안씨(順興安氏). 후배(后配) 부여서씨(扶餘徐氏)
18世 휘혁년(諱赫年)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19世 휘희복(諱熙福) 배(配) 평택임씨(平澤林氏). 후배(后配) 청주곽씨(淸州郭氏)
19世 휘희창(諱熙昌) 배(配) 반남박씨(潘南朴氏)
19世 휘희작(諱熙綽) 배(配) 반남박씨(潘南朴氏)
19世 휘희선(諱熙善)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후배(后配) 안동김씨(安東金氏). 삼배(三配) 평산박씨(平山朴氏). 사배(四配) 교하노씨(交河盧氏)
19世 휘희성(諱熙性) 배(配) 평택임씨(平澤林氏)
19世 휘희범(諱熙範) 배(配) 광산김씨(光山金氏)
19世 휘희문(諱熙文) 배(配) 반남박씨(潘南朴氏). 후배(后配) 경주김씨(慶州金氏)
19世 휘희상(諱熙翔) 배(配) 영해박씨((寧海朴氏)
19世 휘희준(諱熙俊) 배(配) 전주이씨(全州李氏)
19世 휘희천(諱熙天) 배(配) 김해김씨(金海金氏)
20世 휘춘재(諱春載) 배(配) 온양정씨(溫陽鄭氏)
20世 휘일재(諱鎰載) 배(配) 강화최씨(江華崔氏)

[筆者: 丙燮]


[참고문헌]「조익저 이상현역, 포저집, 민족문화추진회 2006」「豐壤趙氏世譜 1996」「趙明載, 개화촌종회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