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풍양조씨이야기 > 시조 맹이야기 > 왕건과 만남의 설화(2)


+ 풍양의 유래


+ 시조 맹이야기


+ 분묘수호의 역사


+ 세계도

+ 항렬표


+ 명문가 풍양




왕건과 만남의 설화(2){제우시사적(際遇時事蹟)}

창강(滄江) 조속(趙涑)1 지음

창강공 필(筆) 금궤도
공(公)의 최초의 이름은 파회(破回;바우 또는 바위의 이두문자)이니 방언으로는 바위이다. 초기에는 풍양현(豐壤縣)에서 살았다. 어느날 마을의 한 농부들과 더불러 들에서 김을 매는데 고려태조의 행군(行軍)이 고개를 넘어 왔다. 공은 그 깃발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태조가 밭머리에 다가와 떨어진 신짝이 매우 큰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물었다.

「이것은 누구의 신인가?」
「조(趙)바위의 신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보고 싶으니 불러 오도록 하여라.」
「바위는 덩치는 크지만 실은 겁쟁이 입니다. 언제나 관인(官人)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늘 풀숲으로 달려가 숨었다가는 멀리 지나간 후에야 나옵니다. 더욱이나 대왕(大王)께서 여기 계신데 어찌 나오려 하겠습니까?」
「그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가서 만나야 겠다.」
「저기 몇 번째 오두막집이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필시 집에 있지는 않을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집 뒤에 있는 바위 굴속으로 가 보십시오.」하였다.

과연 태조가 찾아가서 만난 곳은 바위 굴속이었다
그리고 태조께서는 함께 대화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시며 입고있던 옷을 벗어 입히었다. 공은 자태(姿態)가 웅위(雄偉; 씩씩하고 뛰어남)하고 수염이 미호(美好; 모습이 아름다움)하였다. 의관(衣冠)을 새롭게 갈아 입고 병기(兵器)를 옆에 쥐고 말을 타고 나오니 엄연한 장군이었다. 마을 농부들이 하나같이 나배(羅拜; 여럿이 죽 늘어서서 함께 절함)를 하였다. 그 길로 태조를 따라 남쪽지방 정벌에 나섰으며, 여러 번의 공훈을 세운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三」풍양조씨화수회, 1981




1 조속 [趙 涑 , 1595 ~ 1668]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아버지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퇴하였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저서로 《창강일기 滄江日記》가 있으며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다. 위 그림은 창강의 금궤도(金櫃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