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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현(豊壤縣)지명의 변천사

참조: 동국여지도(윤두서작, 조선숙종36년)
풍양현은 대략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과 진접읍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의 옛 고을 명칭이다.

조선조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풍양현(豊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년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천(抱川)에 옮겨 붙였으며, 조선조 세종 원년(元年)에 다시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 내에 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진건읍을 중심으로 한 남양주시의 변천사를 고대부터 현대사회까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사회]
「광개토왕릉비」내용중 고리성(古利城)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의 남양주시 진접읍·진건면 일대로 추정되는 고구려 때의 골의노현(骨衣奴縣)과 음이 근사(近似)하다. 즉 골의(骨衣)→고리(古利)→고리(古離)는 음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아차산성 다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진접읍·진건면 일대를 마한의 고리국(古離國)이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즉 고리국은 한강을 경계로 백제국과 인접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남양주의 진접읍·진건면 일대는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주(漢州)에 속하며, 757년(경덕왕 16)에는 고구려 때부터 불려졌던 골의노현을 황양현(荒壤縣)으로 개칭했는데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었다. 신라가 점령한 후에도 역시 고구려 때의 명칭인 골의노성으로 불려졌으리라 짐작된다. 신라 때 현이 설치된 시기가 통일 초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양주지역은 주치인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도 가까웠기 때문에 신라나 통일신라 때에도 문화적으로 완전히 소외된 곳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방 9개 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 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남양주는 이 때에 한주 한양군 황양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양주가 고려 지방통치체제 내에서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983년(성종 2)이다. 성종때 처음으로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하나인 양주목의 규모는 지방통치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문종대의 남경유수관에 설치된 주·부·군·현의 숫자인 31개의 지방 행정조직과 그 규모가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의 범위는 『고려사』 지리지 남경유수관조에 의하면 풍양현(豊壤縣 : 남양주시 진접·진건), 교하군(交河郡 : 파주), 견주, 포주(抱州 : 포천), 행주, 봉성현(峰城縣 : 파주), 고봉현(高峰縣 : 고양), 심악현(深嶽縣 : 파주), 사천현(沙川縣 : 양주)의 3군 6현이었으며, 관할지는 1부 2군 1현이 있었다.

양주목에서 절도사로, 절도사에서 지주사로 강등되었던 양주는 1067년(문종 21)에 남경으로 다시 승격된다. 남경은 서경(평양)·동경(경주)과 더불어 3경 체제를 이루어 지방제도상 최고의 지위이며 지금의 남양주시를 포함하여 양주·포천·의정부·수원·인천·시흥·평택·화성·파주·고양·김포·강화·안성·안양 등 경기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후 남경은 고려 지방행정의 근간으로 200여 년간 존속하다가. 고려 말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격하되었다. 한양부로 바뀐 양주는 3속군·6속현을 지배하는 하급 관청으로 지금의 서울·남양주·양주·포천·고양 등 서울과 그 주변 일대만을 다스리게 되었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을 배제하는 강력한 반원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옛 제도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치에 힘입어 한양부는 남경으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
태조는 1394년(태조 3) 10월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1395년 양주 일부지역을 한성부(漢城府)로 정하였다. 그리고 1396년 9월 여러 궁전을 위시하여 종묘와 사직·관아·도성 등의 축조 공사를 마쳤다. 이로써 양주를 중심으로 한 남양주지역도 새로운 지역편제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초기 양주는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지양주사(知楊州事 : 오늘날의 서울 근처)로 강등되었다가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치고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면서 양주군(楊州郡 : 오늘날의 양주)이라 하였다. 1397년에는 군에서 부(府)로 승격되었는데,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서는 도호부가 되었다. 그리고 1466년(세조 12) 양주는 목으로 승격되었고, 군제 편제에 따라 진(鎭)이 설치되었다. 연산군대에는 양주목이 폐지되고 일부가 사냥터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511년(중종 6)에 다시 복주(復州)되었다. 1393년 11월 각 도에 계수관을 정하였는데, 경기좌도는 한양·철원이며, 경기우도는 연안(延安)·부평(富平) 이었다. 이에 남양주지역은 한양에 속하게 되었다


현 남양주시의 행정구역
[현대]
현재 남양주시는 6개 동(지금동, 도농동, 양정동, 금곡동, 평래동, 호평동) 5개 읍(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화도읍, 와부읍) 4개면(별내면, 퇴계원면, 수동면, 조안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풍양현이라는 지명이 어제부터 쓰지 안는지 알 수 없으나 근대이후 행정구혁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없어진 것 같다. 우리 시조 시중공이 태어나 노년까지 사신 진건면 송릉일대의 근대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진건읍 지역은 한말에 건천면과 진관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관면의 “진”자와 건천면의 “건”자를 따서 진건면이라 하였으며, 팔현, 오남, 송능, 용정, 사능, 양지, 신월, 진관, 배양리의 9개 리로 구성되었다.

송능리는 건천면 송정.성능.상독정리 각 일부를 합했으며 용정리는 하독정리 전부, 오룡동. 상독정리 각 일부를 병합하였다.

진건면은 1980년 4월 1일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에 의거 양지. 팔현. 오남리를 진접면으로 이관하였고, 2001년 9월 12일 남양주시 조례에 의거 진건읍으로 승격되었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남양주시』『조남권, 풍양조씨문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