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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조맹의 묘역

시조조공휘맹의 묘역
시중공의 묘역은 생전에 사시던 「독정이」라는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약 2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곳을 일명 적성골이라고도 한다. 현 지명으로 묘소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5번지 이다.

이 묘소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달리던 한북정맥이 운악산에서 남쪽으로 분맥(分脈)하여 주금산을 세우고, 다시 철마산을 올려 세운 뒤 몸을 틀어 죽 이어진 산줄기에서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인 천마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좌청룡이 급하게 감싸고 우백호가 완만하게 에워 싸여 천연의 성벽을 두른 듯한 조그만 분지의 복판으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힘찬 높고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급하게 좌우로 구불구불하며 내려오다 다시 몸을 휘어 흔들듯 잘록하게 학의 목과 같이 부드럽고 깨끗하고 힘차게 결인속기(結咽束氣)하며, 다시 몸을 틀어 멈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혈장(穴藏) 가까이에 몇 번을 몸을 뒤틀어 그 기세를 더욱 떨치는 듯한 대단한 명당 자리라고 풍수지리가들은 감탄하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깊숙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구불구불 골짝을 지나고 들을 건너 왕숙천으로 흘러 들고, 앞으로 멀리 바라보면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더 멀게는 삼각산과 도봉산의 그림자들이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진다.

본래의 봉분 모습은 지면에 가까운 석관형식의 고려시대 사각봉분이 아니었을까 추측되지만 조선 후기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恭嬪)의 묘 사건으로 인해 봉분이 깎기고 평장(平葬)이 되었다가 인조시대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여러 번의 개축을 통해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활개를 갖춘 원형봉분으로 최근에 12지신상 조각이 양각된 높이 104cm의 호석을 둘렀고 그 위에 70cm 가량 봉분을 얹었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장대석, 향로석 등의 석물을 새로 만들어 놓았으며 봉분 중앙의 새로 만든 묘표는 전면에 2열로 "고려개국공신문하시중 조맹지묘(高麗開國功臣門下侍中趙孟之墓)"라 써 있다.

시조 시중공의 묘비명은 문장이 뛰어나 조선중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혔을 뿐 아니라 인조시대 대제학을 지냈으며 평장공파 언국공(彦國公)의 외손이기도 한 계곡 장유(張維)선생께서 찬했으며, 포저공(浦渚公)이 지은 묘비음기에서는 묘소의 복원에 대한 경과 및 시조 이하 세계(世系) 실전에 대한 변(辯)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포저공의 아드님이신 송곡공(松谷公)이 강화유수로 있을 때에 돌을 장만하고 회양공파의 판서공 형(珩) 및 창강공 속(涑)과 합심하여 표석을 세웠다는 송곡공이 지은 묘표음기가 있다.

지금부터 1100여 년전의 천마산(天磨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태종이 풍양에서 사냥하다 환궁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꽤나 숲이 우거지고 깊은 산중이었을 것이다. 당대의 학자이며 문필가인 서거정이 풍양현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역원(驛院)에 머물면서 한수 읊은 서정적인 한시 한편을 소개한다.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번 웃으니
수 없는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 이루었네
돌아오고자 부질없이 십 년을 귀래시(歸來詩)만 지으니
백발(白髮)은 다정하게 짐짓 재촉하는구나

[筆者: 丙燮]


[참고문헌] 『포저집』『송곡집』『동국여지승람』『조남권, 풍양조씨문헌고』『선역도가 풍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