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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이야기 > 분묘수호의 역사 > 분묘변고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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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묘의 전경
시조의 묘소는 풍양 적성동 신향원(申向原)에 있다. 산맥이 천마산으로 부터 연연기복(連延起伏)하여와서 적성동이 되었는데 좌청용(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엄연하고 앞에는 수락산(壽樂山), 도봉산(道峯山)과 문필봉(文筆峰)이 그림과 같다. 대대로 초목(樵牧)을 금하고 때때로 향불을 올려왔는데 선조10년(1577)에 공빈김씨(恭嬪金氏)를 같은 산록(山麓; 산기슭)에 장사 지내게 됨에 자손들이 부당함을 고하였지만 분묘(墳墓) 앞에 석물(石物)이 모두 철거되었다.

광해2년(1610)에 이루어서는 공빈의 묘호(墓號)을 성능(成陵)이라 칭하고 성내(城內)에 있는 개인의 분묘는 모두 파내게 하였다. 이로 인해 자손들이 몹시 당황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장(移葬)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당시 대신(大臣)들의 도움으로 이장하는 화(禍)는 면(免)하였다.

그러나 봉분(封墳)은 평탄하게 하고 수목(樹木)을 심었으니 주변에는 댓돌만이 풀섶에 덩그러니 흩어져 있어, 보는 사람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러다 인조 원년(1623)에 이루어 성능의 호(號)가 혁파(革罷)되었다. 이에 자손들은 소(疏)를 갖추어 상달(上達)하고, 인조 8년(1630) 10월 모일 묘하(墓下)에 모여 글을 짓고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기에 이루었다. 그리고 묘역을 파보니 광중(壙中) 안의 네 모서리가 분명히 식별이 가능하였다. 드디어 동서간(東西間)에 거리를 재고 다시 봉분을 짓고 앞에는 돌을 다듬어 석축(石築)을 하여 자못 옛 모습과 같이 복원시켰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1 묘소가 변을 겪었던 곡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