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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기(省墓記)

교리 조수익(趙守翼) 지음

시중조공휘맹의 묘역
경자년(庚子年; 선조33년, 1600) 2월 2일에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치고 동쪽 근방의 교외(郊外)로 나가 잘은 모르지만 조광찬(趙光璨)이라는 일가사람을 찾았는데 그의 서속(庶屬) 풍두(豐斗)란 사람이 있었으니 그 또한 같은 혈통의 종족(宗族)이다. 곧바로 경두(慶斗; 또한 종인(宗人)인데 풍두와 형제간인 듯 함)와 더불어 풍양 적성동에 올라가 시조 묘를 참배하였다. 묘소는 댓돌이 흩어져 있고 봉분은 무너졌으며, 수목(樹木)이 그 위에 나고 석인(石人) 같은 것도 없으니 경두의 가리켜줌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벼슬을 한 분의 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여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뒤로 30척(三十尺) 거리가 곧 공빈김씨의 묘소였다.

산밑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이 지역에 사는 촌사람들이 가져다가 맷돌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석인도 공빈김씨를 장사 지내며 쓰러뜨려 버렸는데 그 후론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못난 우리 자손들의 죄가 극도에 달했다고 하겠다.

술 한잔 올리고서 절을 하고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조수익 [趙守翼, 1565~ 160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시보(時保). 홍문관응교 정기(廷機)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자립하여,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홍문관부수찬·부교리, 임천군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뒤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죽었다. 사후 1603년에 호성선무종훈녹권(扈聖宣武從勳錄券)이 내려졌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조용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생활이 청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