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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이야기 > 분묘수호의 역사 > 분묘사초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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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사제문(改莎祭文; 사초를 한 후의 제문)


학암조공휘문명의 영정
유세차(維歲次) 을미년(乙未年; 숙종41년, 1715) 4월 병인 삭(朔) 초5일에 후손 사인(舍人) 대수(大壽) 등은 감히 시조 고려국 통합삼한 벽상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부군의 묘에 고하옵니다.
여러 갈래의 물줄기도 원천(源泉)에 근원하고 여러 자손이 퍼져 있어도 한 몸에서 나온 것이니 아버지 윗대라 해서 근본(根本)을 잊을 수 있습니까? 높고 아름답습니다! 우리 시조께서는 고려조를 보좌하시었으니 공(功)이 크고 덕(德)이 많으셨습니다. 끼치신 경사스러운 복이 넘쳐 흘러 번성한 나무와 잎이 칡 덩굴 얽히듯 하며, 수달피도 조상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하든데 어찌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 묘소는 적성동의 발자취입니다. 의관을 영폄(永窆 ; 장사 지냄)한지 800여 년이 되었습니다. 묘소를 새롭게 단장한 것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비바람에 씻기어 묘소만이 가까스로 남아 있고 잔디는 모두 죽었으며, 풀 덤불에 가려 있으니 땔나무 하는 일과 가축 기르는 일을 금(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찌 후손이 적어서 입니까? 서럽고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이에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고 단출하게 일을 주선하였으며, 새롭게 떼를 입히고 봉분을 옛모습과 같이 하려고, 길일을 잡아 작업을 위해 모두들 묘 주변에 모였습니다. 서울은 물론 시골에서도 왔습니다. 먼 곳에서 가까운 곳까지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옛날에는 가깝게 지내던 사이것만 소목(昭穆)을 가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정성껏 한마음으로 엄숙하게 절을 올리고 꿇어앉아 이 변변치 못한 제수(祭需)를 올리오니 흠향(歆饗)하시옵소서.

[編輯: 丙燮]


[참고문헌]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