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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공빈봉능도감계사(辛亥年恭嬪封陵都監啓辭)


공빈 김씨의 묘 전경
신해년 광해3년(1611)에 봉능도감(封陵都監)1 계사(啓辭)2 에서 말하기를 “신등(臣等)이 아뢰려고 하면서도 말머리가 돌지 않아 감히 경솔하게 계품(啓稟)3 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능(成陵)에서 100보도 못 미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조맹(趙孟)의 묘라고 합니다. 조맹은 선후(先后)4 에게도 친족이 되므로 전에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선왕(선조)께서 이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현재는 봉분이 삭쳐지고 묘역이 펑퍼지어 예전 묘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고 평지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있는 고총(古塚)이요 외간(外間)5 에서 하는 말을 감히 가타부타 할 수는 없으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미 이와 같이 신등도 감히 함부로 처리할 수 없기에 상감의 윤허를 기다립니다.”하였다.

상감께서 전교하기를 “조맹의 묘는 도감(都監)에서 상의하여 처리케 하라”하니 도감에서 계(啓)하기를

“조맹의 묘는 가까이 있는 언덕이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선후(先后)의 묘소와 같은 원혈(原穴)6 인데 다만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애초부터 신등은 늘 죄송하게 생각하던 중인데 다만 밖에서 전하는 말을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감히 쉽게 처리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신등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리하라는 상감의 전교(傳敎)7 를 받자오니 신등의 의사(意思)로는 오직 조속히 이장(移葬)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자손들을 찾아 의논해서 기안 내에 이장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이에 전교하기를 “조맹의 자손이 있느냐? 먼저 방문하고 나서 아뢰어라.”

답하기를 “조맹의 자손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난리(임진왜란을 가리킴)를 겪고 난후는 대부분이 멀리 산재(散在)에 있고 일부는 외임(外任) 중에 있으며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은 삼척부사 조희보(趙希輔), 교리 조즙(趙濈), 전수찬 조익(趙翼), 예빈참봉 조수이(趙守彝), 유학 조척(趙滌) 뿐입니다.”

이에 전교하기를 “지관과 다시 상의하여 아뢰어라.”

지관 김여견(金汝堅)이 말하기를 “옛날에 범월봉(范越鳳)8 이 이르기를 「묘가 총상(塚上)에 있는 것은 가장(家長)이 침능(侵凌)하는 형상」이니 총(塚)이라는 것은 새로 쓰는 묘혈(墓穴)을 이루는 말입니다. 조맹 묘가 신혈(神穴;공빈의 묘혈을 의미함) 아래로 30여보에 있는데 그 사이에는 또한 조그마한 둥그런 봉우리가 막고 있고, 거의 800여년이 되어감에 따라 무덤의 형체가 없어지고 해골도 이미 흙이 되었을 것이니 재앙과 복으로 따져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개 옛날의 현철(賢哲)들은 풍수상의 길흉은 지리(地理)9 에 돌리고 고묘(古墓)를 파내는 것은 천리(天理)10 돌렸으니 그렇다면 지리(地理)에 대해서는 진달(陳達)한 바와 같으며 천리의 이치(理致)는 신(臣)이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申誼)는 말하기를 “묘의 새 것과 묵은 것은 재앙과 복에는 상관이 없으므로 지가서(地家書; 지술(地術)에 관해 적은 책)에도 파내라는 말이 없습니다. 조맹의 묘는 신혈(神穴) 아래 30여보(餘步)에 있는데 묘의 모습이 이미 삭쳐져서 지면(地面)처럼 평평하니 파내던 그냥 나두던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국능(國陵)에서 정해진 거리 내에 있는 모든 묘를 파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규정이니 이것은 신이 무엇이라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직접 현지답사를 하지 못했고 복서(卜筮)에도 어두우니 단지 이일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잘 처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다만 외간(外間)에서 혹 말하기를 「조맹은 고려초의 재상(宰相)으로서 현국가의 문벌(門閥)들 중에는 계통은 멀지라도 그의 외손(外孫)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당초에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할 때에도 또한 먼 파(派)에 관련된다 하여 피(避)했다.」하오니 이 말의 진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하다면 반드시 평평해진 묘를 파낼 것 없이 단지 그곳에 나무를 심어 주변을 꾸미는 것도 무방한 것 같아오니 상감께서 허락하옵소서.”하였다.

영부사 윤승훈(尹承勳),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 청평부원군 한응인(韓應寅)은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의견과 같았고,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와병으로 함께 의논하지 못했으며,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은 봉능도감제조(封陵都監提調)였으므로 참석하지 않았다.

6월 12일에 좌의정이 능(陵)에서 돌아와서 고(告)하기를 “신이 능에 가보니 모든 작업이 이미 끝났습니다. 조맹의 묘는 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 산역(山役)이 끝난 후에는 출입이 어려우니 이장(移葬) 여부를 조속히 판단하소서.”하니 6월 16일에 「파내지 말 것(勿爲拔去事)」으로 판하(判下; 주안(奏案)을 임금이 윤가(允可)함)하였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