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login
Top home
풍양조씨이야기 > 분묘수호의 역사 > 성묘록 서문


+ 풍양의 유래


+ 시조 맹이야기


+ 분묘수호의 역사


+ 세계도

+ 항렬표


+ 명문가 풍양




성소록서(省掃錄序)


현성암에 있는 기록문
종법(宗法)이 무너지고부터 시조의 제사가 폐지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각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섬길 줄 알면서도 그 조상이 어느 곳으로부터 유래하였는지 모르니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이 이를 걱정하고 탄식하여 온지 오래이다. 무릇 사당(祠堂)을 지어 받들고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것은 시왕지제(時王之制; 현행법률)로는 저촉되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묘소가 있어 다행히도 성곽을 쌓거나 개간하는 것 같은 재난(災難)를 면하여 전승(傳承)되어 오고 있다. 따라서 그 초목(樵牧)을 금지시키고 때때로 성소(省掃;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하는 것)하여 무너지거나 손상(損傷)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세상 형편에도 어긋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시조 시중공(侍中公)의 묘소는 실로 풍양(豐壤)의 적성동(赤城洞)에 계신데 자손들이 대대로 수호하여 왔다. 광해 2년에 공빈묘(恭嬪墓)를 성능(成陵)이라 추숭(追崇)하고 난 후부터는 시조묘가 가깝다 하여 평장(平葬) 시켰었고 인조 경오년에 비로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우리 조씨는 보첩(譜牒)이 중간에 실전되고, 문헌조차도 온전치가 못하지만 이 묘소만이 우뚝하게 800년 동안 큰 걱정 없이 보존되어 왔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이다. 또한 한번 무너졌다 한번 회복된 것이 나라의 성쇠(盛衰)와 무관하지 않으니 어찌 더욱 기이(奇異)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있는가? 돌이켜 보면 공(公)의 평생에 덕업(德業)은 더 이상 거론할 여지가 없지만 지금에 이루어 문벌이 번영하여 크게 빛나고, 서울에 올라온 3파(쌍동파(雙洞派), 청교파(靑橋派), 포저파(浦渚派))가 나타나 명재상(名宰相)을 배출했으니 평소 적선(積善)을 많이 하여 축복을 받았다고 한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경오년(庚午年) 이후로 묘소에 역사(役事)가 있으면 이 세 집이 꼭 책임을 도맡았다. 처음 비석을 세울 때 포저공(浦渚公)이 그 음기(陰記)를 지었으며, 그 후 30여 년 만에 선군자(先君子; 돌아가신 아버지) 취병공(翠屛公)이 창강공(滄江公)과 함께 논의하여 표석을 세웠는데 송곡공(松谷公)이 비문을 지었다. 그 외 무덤에 떼를 입히고 다듬고 성묘를 한일들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숙종41년(1715, 을미년)에 상우(相愚)가 여러 종인(宗人)들과 함께 논의하여 사초(莎草)를 하였는데 형님의 손자 석명(錫命)이 경기관찰(京畿觀察)로 총 책임을 맡고, 송곡의 손자 선혜랑청(宣惠郞廳) 명정(命禎)과 창강의 족손(族孫) 지평(持平) 상경(尙絅)이 보조하여 4월 경오(庚午)일에 역사(役事)를 했는데 참여한 사람이 수 명 된다. 이에 성소록(省掃錄) 한 권을 만들어 묘 근처에 있는 승사(僧舍; 현성암)에 비치하고, 이 뒤에 와서 성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하는 바이다.

오호라! 내 몸은 누가 낳았으며 내 부모의 몸은 누가 낳았는가?
모든 후손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 꽃과 축축한 곳에서 난 버섯은 근본(根本)이 없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를 계승하여 쇠퇴(衰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상우는 병이 들어 가보지 못했는데 여러 종인(宗人)들이 서문을 부탁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쓰는 바이다.

[編輯: 丙燮]


[참고문헌] 조남권번역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一」풍양조씨화수회, 1981



조상우 [趙相愚, 1640~ 1718]
1640(인조 18)∼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 예조판서 형(珩)의 아들이다. 이경석(李景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7년(효종 8)사마시에 합격한 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 되었다. 1711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호포법이 논의될 때 명분을 유지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뜻에서 사대부에 대한 군포징수를 반대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옥책문을 쓰는 데 선발되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의 사적비 등을 남겼다. 남평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