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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분묘수호의 역사

우리의 시조인 시중공 묘소가 평장이 되어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기가 막힐 왕조(王朝)의 횡포가 있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선조(宣祖) 10년에 후궁인 공빈(恭嬪) 김씨가 죽는다. 재색이 출중했던 그녀는 선종의 총애를 받으며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가 어머니와 이별한 것은 세 살 때였다. 그 당시 조정은 공빈 김씨의 장지를 풍양현 적성동에 있는 우리 시중공 묘소로부터 30보쯤 뒤쪽으로 정한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었다. 전직공파의 사예공(司藝公) 정추(廷樞)는 장지가 시중공의 묘소와 너무 가깝다며 소를 올려 그 부당성을 호소한다. 그러나 선조는, “공빈의 선대가 조씨의 외손이니 그대로 장사하라" 명한다.

그러다가 광해는 선조에 이어 조선조15대 임금이 된다. 왕위에 오른 뒤 광해는 생모인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고 묘호(墓號)를 성릉(成陵)으로 올리며, 시중공의 묘소를 파낼 것인지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은 “조맹은 고려 초의 재상이며 문벌가문으로 내외손 또한 많으며 공빈도 원파(遠派)에 관련이 있으니 평평해진 무덤은 파낼 것 없이 나무를 심어 치산만 하는 것도 무방하다”하니 이원익, 윤승훈 등 대신들도 동조하였다. 그 후 좌의정 이항복(봉능도감제조)이 묘소를 와보고 파낼지 여부를 조속히 결정할 것을 주청하니 왕은(광해3년, 1611년) 파내지 말 것 명한다.

그 후 시중공 묘소의 봉분은 헐리고, 평토(平土)로 방치된다.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종원들은 삼척부사 조희보(趙希輔), 홍문관교리 조즙, 전수찬 조익(趙翼), 예빈시참봉 조수이(趙守彝), 진사 조척(趙滌) 뿐이라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3년(1611년)편에 기록하고있다.

1624년 즉위 16년만에 서인들에 의한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폐위가 된다. 따라서 왕후로 추존되었던 김씨도 공빈으로 강등되고 마침내 능호(陵號)도 원상회복된다. 그러나 시중공의 무덤은 여전히 봉분이나 표석도 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종원들이 각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단합된 힘을 과시하기는 어려웠지만 인조 8년(1630년) 5월 20일 포저공 익(浦渚公 翼)이 글을 짓고 부호군 수이(守彛) 등 13명의 이름으로 상소를 한다.

상소문에서 포저공은 공빈의 묘가 이제는 국능(國陵)이 아니니 조맹의 묘가 평장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복원시키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간곡이 호소한다. 인조는 그 문건을 예조에 내려보내 처리하라고 하니 곧 예조로부터 복원해도 된다는 회답을 받았다. 포저공 익을 비롯한 4인 등은 인조8년(1630년) 전국에 있는 종원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복원에 따른 경비협조를 요청한다.

이러한 변고를 겪으면서도 우리의 시조 시중공 조맹은 아직도 위풍당당하게 천마산 적성골에 고려의 개국공신의 품위를 져버리지 않고 계시다. 이것 또한 후손들의 큰 홍복(洪福)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는 분묘변고의 사연, 임금께 올리는 글, 조척 [趙 滌, 1573 ~1616]의 분묘봉변 알림문, 포저공 조익 [趙翼, 1579~ 1655]의 분묘복원 상소문, 판서 김상용 [金尙容, 1561~ 1637]의 예조의 회답문, 포저공 조익 등의 분묘복원 통지문, 포저공 익의 분묘복원 제문, 교리 조수익 [趙守翼, 1565~ 1602]의 성묘기, 동강공 조상우 [趙相愚, 1640~ 1718]의 성묘록 서문, 학암공 조문명 [趙文命, 1680~ 1732]의 분묘사초 제문 등의 글(원문, 번역문)들을 소개하고 있다.

[筆者: 丙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