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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단절(世系斷絶)에 대한 소고(小考)

해시계
씨족의 역사는 인물사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 없이는 한 집안의 가계를 기술하기 쉽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가문의 역사는 그 집안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문신, 무신 및 학자 등)이 있을 때 그들의 행적이 기록으로 보존되며, 그 인물의 중심으로 한 가계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성씨를 대표하는 시조(始祖)치고 높은 관직에 있지 않았던 분이 드물다.

그러나 그 시기가 언제이며 어느 곳에서부터 출현하여 우리가 생존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시조이전의 역사도 존재하고 있다. 현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류의 기원과 함께 세계(世系)는 단절 없이 이어져 왔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슬기사람(네안데르탈인)이 서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퍼진 것이 약 10만~3만5천년 전 이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그렇지만 씨족사회에서 시조의 탄생기원은 전통이 있는 몇 성씨를 제외하고 고려 중기에 몰려 있다. 대부분 1천년 이내의 기록이다.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역사라고 한다면 고증적 고찰 없이 역사를 경망하게 기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조 이전의 뿌리의 근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천지창조라도 되었단 말인가! 민족의 기원은 문화에 따라 세상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 혹은 어떤 원리에 의하여 세상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대부분 신화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씨족의 역사는 그와 유사하게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고증할만한 근거 없이 기술할 수는 없다. 근거가 희박한 세계(世系)를 어떻게 단절 없이 계대(繼代)하였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문은 불행하게도 시조(始祖) 이후 조차도 한동안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뿌리의 계통을 계대하여 기술하지를 못하고 있다. 단지 고려 때 밀직사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되었던 전직공파의 석간공 운흘(石磵公 云仡)1 이 쓴 자술묘지(自述墓誌)에 고려왕 태조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라 기록하고 있지만 이마저 불확실한 기록이다. 이를 두고 포저공(浦渚公)은 시중공 묘비음기에서 “타성의 세보(世譜)를 보면 고려가 끝날 때까지 모두 20대쯤 되니 30대라 함은 틀린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영조(英祖) 7년(1731)에 간행된 신해 창간보(辛亥 創刊譜)에서는 중간세계 실전이라 명시하고 그 사유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9년 후인 영조 36년(1960) 중간(重刊)된 경진보(庚辰譜)에서 전직공파(殿直公派)는 6대 실전(失傳)으로 수정을 하니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석간공 묘지명(墓碑銘)에 나오는 시조의 30대손(三十代孫)이란 여러 각도로 추론하건대 믿기 어렵고, 20대를 30대로 잘못 기록하였다고 하기에도 역사를 임의로 수정하는 억측이 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창강공 속(滄江公 涑)2 의 조카인 종운(從耘)3 이 저술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 시중공 밑에 「7대손 천화사 전직공(天和寺 殿直公) 모(某)」라고 쓰고 석간공 밑줄에는 주석(註釋)을 달아 그의 자술묘지(自述墓誌)에 기록되기를 「평장사 시중공 조모의 13대손」이라 하였다. 따라서 30대 운운은 고려사 석간전(石磵傳)과 여지승람(與地勝覽)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저자의 자료 방증(傍證) 부족으로 신뢰도가 떨어지며, 씨족원류는 후손이 기록한 것이니 믿음이 간다는 것이다.

경진보 족보 간행을 주관한 분은 옥천군수 지명(祉命)과 경상감사 엄(曮)이었다. 그 당시도 족보를 수정하는 데는 엄정한 고증 및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했다. 노심초사하다 족보간행을 주관한 분들이 세계수정 근거로 삼은 것은 안음공 종운(安陰公 從耘) 이 쓴 “씨족원류”였다.

그러나 영호공 엄(永湖公 曮)의 종제인 하서공 경(荷棲公 璥)4 이 세계실전 수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서공은 서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30대라고 쓴 고려사의 기록도 틀린 것이 확실하며, 20대나 10대도 근거가 없다. 안음공 종운이 쓴 씨족의 원류도 믿음이 덜 간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창강공 집에 조금한 족보가 있는데 이것은 공(公)이 직접 쓴 것이다. 그 족보에 시중공의 7세손이라는 말은 없다. 안음공도 가보(家譜)가 있어 신해보를 할 때 공의 가보를 참고하여 많은 부분 수정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보 역시 보계(譜系)에 관해서는 실전됐다고 만 기록되었고 세대는 언급이 없다”. “중략”

그리고 시중공 묘비의 음기는 우리 종문의 포저공5 께서 지으신 것이다. 그 글에서 “보계가 실전 되었다”고만 하는데 두 분(창강공, 안음공)과 포저공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진실로 두 분이 전직공이7세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포저공에게 정확히 가르쳐 주지 안았겠는가? 더욱이 두 분 이름이 그 비문에 실려 있으니 포저공이 짓은 묘비음기는 그분들도 확인했으리라 믿는다.」


이 내용은 하서집(荷棲集)에 실린 서신(書信) 전문 일부를 소개한 것으로 매우 타당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시대 견개(狷介)한 선비의 기상을 엿보게 하는 글이다. 영호공은 이 서신을 받고 즉시 7세손을 삭제하고 후손이라 기록했다고 한다.

어떻든 전직공파 (殿直公派)는 영조 36년(1960) 중간(重刊)된 경진보(庚辰譜) 부터는 시조 맹(孟)으로부터 7대가 실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평장공파 (平章公派)는 신해보 때에는 준비 불충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후 29년후인 경진보에 이루어서 동간(同刊)이 된다. 영조35년(1759) 세보이정통문(世譜釐正通文)에서 옥천군수 지명(祉命)과 경상감사 엄(曮)은 포저공파(浦渚公派; 포저공파란 평장공파를 의미함)가 처음 신해보부터 참여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라며, 서울 종중(宗中)에서 연락을 하여 경진보부터는 합보(合譜)하라고 종용할 것을 정중하게 건의한다. 문제는 평장공파 역시 세계가 실전되어 전직공파와 합보에 따른 통합에 어려움이 있었으니 족보간행 주관자들의 고층이 있었을 것이다. 경진보부터 합보에 따른 평장공파의 족보서문은 다음 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첨성대
경진보에 가로되 시조이하에 천화사 전직공 지린파(之藺派)와 평장공 신혁파(臣赫派)가 번창하고 현달도 하였는데 전직공파 세계(世系)는 실전한 세수(世數)를 고증할 수가 있어 시조의 멀지 않은 후손임을 알고 있으니 제1편 썼고, 평장공파 세계는 실전한 대수를 상고할 수 없으나 평장공의 손자 부정공(副正公) 우(玗)께서 조선조(朝鮮朝)에 벼슬을 하였으며 전직공의 6대손 회양공(淮陽公) 신(愼)은 태종(太宗)의 스승이었으니 부정공과 회양공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따라서 평장공은 시조로부터 먼 자손이 됨을 추지(推知)할 수 있으므로 제25권부터 시작하였다. 현재로선 서로간의 항렬(行列)은 따질 수 없으나 오직 시대성을 중요시 여겨 세계분파도(世系分派圖)를 합성하였고 보첩의 편명(編名)에서는 회양공의 조부인 낭중공(郎中公)을 을편(乙編)의 제5난에 기록하였으므로 부정공의 조부(祖父)인 평장공 또한 그렇게 함이 타당하다. 따라서 을편을 설치하되 제2(第二)라고 명하고 탄생년대를 고려하여 제5난(第五欄)부터 시작하니 이로서 `합종(合宗)의 의(義)를 표한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가계기록의 실물은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 시기에 과연 조선시대의 족보와 같은 형식을 갖춘 가계기록 자체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학계에서는 의견이 갈려있는 상태이다. 송준호는 “한국에 있어서의 가계기록의 역사와 그 해석”이라는 논문에서 고려시대에 한 개인이나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계보인 가승(家乘)은 존재했으나 족보는 15세기 이후부터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형태의 족보는 17세기가 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집안의 가계를 기록한 가첩(家牒)을 잃어버린다면 대(代)가 멀어질수록 복원은 불가능해진다. 그 시대에 뚜렷한 인물이 없으면 더 그러하다. 잦은 전란으로 많은 사적들이 불타 없어진 것도 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포저공은 시중공 묘비음기(墓碑陰記)에서 시조께서는 고려태조를 도와 삼한을 평정하여 동방에 큰 덕을 세웠지만 세대가 오래되고 고증할만한 문헌이 없어 사적을 뚜렷하게 전하지 못하며, 보첩 또한 망실하여 세계를 잇지 못하는 것이 실로 천재(千載)의 한(恨)이라고 그 아픔을 글로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의 몇 가문이나 세계의 단절 없는 자랑스러운 족보를 가지고 있을까? 자문을 해본다. 1000년의 역사도 제대로 고증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가문의 역사인들 더할 것이다.

[筆者: 丙燮]


[참고문헌]「풍양조씨세록1권, 1981」「조선왕조실록 태종편」「조남권, 풍양조씨문헌고」「 김용선, 고려금속문연구」



1조운흘 [趙云仡, 1332~1404] 본관 풍양(豐壤). 호 석간(石磵).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며, 창왕 즉위 후 서해도 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고, 밀직사첨서사사·밀직사동지사사·계림부윤을 역임하고, 1392년 조선 개국 뒤 강릉부사 때 선정한 후 신병으로 사직, 다시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물러나 광주에서 여생을 마쳤다. 문집에 《석간집》, 편저에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

2조속 [趙 涑, 1595 ~ 1668] 조선 후기의 서화가.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倫)의 아들이며,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퇴하였고, 효종 때 시종(侍從)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장령·진선(進善)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다. 저서로 《창강일기 滄江日記》가 있으며,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 老樹棲鵲圖〉와 〈매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 梅鵲圖〉 등이 있다.

3조종운[趙從耘, 1607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농(伯農), 호는 송창(松窓). 장령 속(涑)의 조카이다. 관직은 찬선을 지내고, 글씨를 잘 썼으며, 보학(譜學)에 밝아 《씨족원류 氏族源流》를 저술하였다.

4조경[趙璥, 1727(영조 3)∼1789(정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서(景瑞), 호는 하서(荷棲). 목사 상기(尙紀)의 아들이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부제학·대사성을 지낸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공조참판이 되었다. 1786년(정조 10) 우의정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으며, 파직되었다가 다시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5조익 [趙翼, 1579~1655] 조선 효종 때의 문신·대학자.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 예조 판서, 좌의정을 지냈다. 예학(禮學)도 밝았으며,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다. 저서에 《포저집》,《포저유서(浦渚遺書)》,《주서요류》 등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