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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보(世譜; 족보(族譜))의 역사

세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세보가 등장하고 있다. 1152년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의 묘지명에 “옛날에는 세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기술한 점으로 보아 당시에는 세보나 가승류가 작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보의 연원을 살핌에 있어 세보의 편성•간행을 촉진시킨 우리 나라 고유의 사회적 정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보는 서양에서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의 세보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세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세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으로는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풍양조씨 남장동 보각
『고려사』나 고려시대의 묘지명 등의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세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세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가 최초의 세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전하는 것은 1476년에 안동권씨의 외손 가닥인 서거정에 의해 편찬 간행된 『안동권씨(안동권씨) 성화보(성화보)』가 가장 오래된 세보며 1565년에 편찬 간행된 문화유씨 『가정보 (嘉靖譜)』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들 세보에는 권씨 유씨 성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딸을 통해 이들 가문과 혼인관계를 가진 여러 집안의 세계가 적혀 있어 종합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후대세보의 타성 기록은 혈연적 관계가 있는 가닥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세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세보가 있으며, 17세기 이후부터 양반가문에서 세보의 편찬 간행은 보편화 되기 시작한다.

풍양조씨의 대동보(大同譜)는 영조7년(辛亥年1731)에 처음으로 편찬 간행된다. 창강공 속께서 초본을 편찬하고 귀록공 현명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영조 36년(1760)에 두번째로 간행하였으며, 순조 26년(1826)에 세번째로 다시 간행을 하게 되며, 광무4년(1900)에는 4중간, 1978년에 5중간, 그리고 2006년 8월에 6번째로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 주관으로 대동보가 간행이 된다.

평장공파(남원공파)의 파보(派譜)는 을해년(乙亥年, 1935)에 처음으로 간행되며 계유년(甲辰年, 1964)에 두번째, 병자년(丙子年, 1996)에 세번째로 간행이 되었다.

신해보를 비롯한 당시의 판목은 총 934판 가운데 깨지거나 훼손된 판목 260장을 제외한 674장을 경북 상주시 남장동 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신해보를 간행했던 판목은 원래 상주 청계사(淸溪寺)에 소장하였는데 경진보 때에 남장사(南長寺)로 이관하였다. 그 후 갑자년(1924년)에 보각은 또 내서면 남장리(內西面 南長里)로 이건(移建)되어 현재에 이르는데 해당 지역의 호군공파(護軍公派)에 의하여 수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