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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조들의 선양업적(구포의 역사)

1. 들어가며
2. 1600 년대
3. 1700 년대
4. 1800 년대
5. 1900 년대
6. 2000 년대


5. 1900 년대(年代)

1900년대 들어서 구포종중의 유업(遺業)은 도산공의 9대손인 참봉공 휘용재(龍載)(1858~1934)와 아들인 휘돈석공(敦錫公)(1882~1938), 풍양군 종손댁 휘희삼공(熙三公)(1866~1947), 생원공의 종손인 진사공 휘덕재(悳載)(1869~1951), 그리고 6.25 사변 당시까지 종중의 도유사(都有司)를 담당하신 송곡공의 9대손 휘명재공(明載公)(1890~1983)께서 이어받으며, 이분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강점기 강포한 식민지 수탈정책과 한민족 말살정책 속에서도 가문의 전통과 종토(宗土) 수호를 통해 종족보존(宗族保存)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 암울했던 시기 1935년에는 남원공파 파보(派譜; 乙亥譜)가 최초로 간행되는데 이 일이야 말로 종족말살정책(宗族抹殺政策)에 정면으로 대응한 씨족보존운동(氏族保存運動)이라 볼 수 있다.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분들은 발문유사(發文有司)로 들목의 휘희삼공과 휘돈석공, 송곡공파 생원공 휘영재(永載)(1868~1937), 경기도 개성의 휘덕재공(悳載公)이시며, 발문은 참의공파인 강원도 양구의 휘돈철공(敦轍公)과 들목의 휘돈석공께서 찬하였다.

1950년대는 한국도 자본주의체제의 도입과 함께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구포종중 역시 현대적인 종중 규약인 종약(宗約)에 의해 종사(宗事)가 운영되며 변모(變貌)되어가고 있었다. 당시의 도유사는 송곡공파의 휘 명재공(明載公)(1890~1983)이며, 생원공파의 휘돈원공(敦元公)(1909~1991)이 총무유사, 도산공파의 휘돈철공(敦轍公)(1913~1996)이 감사유사로 1980년까지 종사를 이끌어 온다.

1963년 12월 남원공파 파보인 갑진보(甲辰譜) 발행을 위한 통문이 전달된다. 이 파보 발행의 발기인은 화성에 휘명재공(明載公), 휘돈원공(敦元公), 수원에 휘돈갑공(敦甲公)과 휘돈철공(敦轍公)이었다. 이 파보는 우리 문중에서 최초로 현대적 인쇄기술에 의해 발행된 족보이며,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완성이 된다. 통신 및 인쇄기술이 그 만큼 발전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발문은 포운공(浦雲公) 돈철(敦轍)이 기술하였다. 그 당시 이 사업이 조속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예전(禮錢; 성금)을 낸 기록이 남아 있는데 구포종중 1만원, 김포 휘보년공(普年公) 2만원, 평택 휘영묵공(泳默公) 5만원, 유구파(維鳩派) 1만원, 인제파(麟蹄派) 5천원, 시흥에 휘두년공(斗年公) 3천원, 서울 휘돈석공(敦奭公) 3천원을 추렴하였다. 휘보년공과 휘영묵공은 당시 재력을 바탕으로 각종 위선사에 성금을 많이 내셨으며, 종사 일에도 적극 참여하여 몸소 실천하신 종회발전에 공로가 지대하신 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농지개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조상님들이 위토수호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1906년 통감부 개설하며, 1918년 11월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는데 이 시기는 일제가 조선 농민의 농토를 강탈하여 근대 무산자 계급을 창출하고, 그들의 손안에 토지를 집중한 시기였다. 그 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에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산미증식(産米增殖) 노력을 기울인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휩쓸며 일본은 물론 조선의 농촌경제가 파탄을 맞았던 시기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일본, 만주, 사할린 등으로 이주를 한다. 이 무렵 1936년도에는 휘돈석공(敦錫公)과 휘명재공(明載公)은 돈석공의 외종(外從)이 되는 사법서사 홍종욱(洪鐘旭)씨와 일제시대 판사를 역임한 정존수(鄭存洙) 변호사에 위탁하여 문중 종재(宗財; 전답 및 재실) 전부를 위토소유권등록(位土所有權登錄)으로 재산권 확보를 법적으로 마련한다.

광복과 함께 민주의식과 평등의식이 고조되면서 사회구조도 큰 변화를 겪는다. 소작인들에게는 혁명이라 할 수 있는 농지개혁법이 1949년 6월 21일에 제정되며, 1950년에 실시를 한다. 당시 농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는 8·15광복 직후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민주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데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 농지의 소작비율은 전농지 222만6000㏊의 65%인 144만7000㏊가 소작지였다. 그와 같은 많은 소작지에서 가혹한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던 농촌경제는 매년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법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와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정부에 귀속했다. 농가가 아닌 자의 농지, 자경(自耕)하지 않은 농지, 본법 규정의 한도를 초과하는 부분의 농지(3정보 이상), 종묘포(種苗圃)·상전(桑田) 등 숙근성(宿根性) 작물 재배 토지를 3정보 이상 경작하는 자의 소유인 숙근성 작물 재배 이외의 농지 등은 적당한 보상으로(해당 농지생산물의 150%) 정부가 매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정부가 취득한 농지는 현재 해당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경작능력의 비하여 과소한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농업경영에 경험을 가진 순국열사의 유가족, 영농력을 가진 피고용농가, 국외에서 귀환한 농가의 순으로 분배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에 귀속된 농지 중 일부가 남원공파보(南原公派譜)인 갑진보(1964) 발간에 즈음하여 위토환수특별조치법(位土還收特別措置法)의 제정과 발효로 소작인으로부터 환매(還買)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1965년도 대일청구권구상(對日請求權求償)에 즈음하여 위토소유권(位土所有權) 부실기재확인신청증명(不實記載確認申請證明)을 위한 특조법 제척기간(除斥期間)이 1969년도에 공고되었다. 이 때 휘돈원공(敦元公), 포운 휘돈철공(敦轍公), 풍양군파의 13대손이신 휘돈근공(敦謹公)(당시 매송면사무소 근무)과 송곡공파의 독립투사이신 문기(文紀)종원 제씨 등은 이 법을 근거로 제반서류와 남양, 반월직동, 남양주 등의 종중회의록을 첨부하여 1969년 5월10일자로 수원지방법원에 위토확인등기등록(位土確認登記登錄)을 하게 된다.

1981년도에는 파종손 중심으로 공동명의로 되어있는 토지등록대장을 종중명으로소유권 이전을 한다. 이 일은 종중재산을 오늘날까지 보존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당시만해도 공동명의자 중 어느 한 분이라도 돌아가시면 재등록을 해야 하는 번잡함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공동명의자 또는 그 후손이 소유권 주장을 하여 그 지분을 매도라도 하면 소유권분쟁소송으로 비화될 수 있는 여지이다. 이 일을 사전에 차단하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들은 당시 도유사 휘명제공(明載公), 그 손자 되시는 총무유사 한묵종원 그리고 포운 휘돈철공 등이다. 토지대장에 등록되어 소유권은 1981년 6월 3일에 되는데 꽤나 긴 종중명은 “풍양조씨증병조참판동추공현범파매송지구종중”이다. 살아생전 포운공께서는 후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매각해서는 안되며, 후손들은 조상의 행적은 물론 관직명까지도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긴 작명을 하였다고 한다. 영원토록 가문이 번성하고 위선봉사가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선대부터 이어온 유업(遺業)의 메시지이다.

1986년도에는 용담뿌리와 건지미 일대 도로변에 있는 일부 토지를 88올림픽을 대비한 “농어천주택 개량사업과 취락구조개선사업”의 일환으로 국가로부터 토지보상을 받게 되며, 1990년 12월에 서해안 고속도로착공으로 인하여 반월직동 선산 일부의 땅 보상을 받게 된다. ***년 **월에 산업도로 확장으로 일부 땅 보상을 받으며, ***년 **일에는 경부고속전철이 직동 뒷산으로 통과하므로 인해 선산일부가 철도청에 귀속된다. 오늘날 동추공종중의 현금종재는 그 당시 받은 보상비이다.

이에 앞서 암울한 시기에 종사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종재(宗財)를 반석 위에 올리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신 도유사 명재공께서 1983년에 돌아가신다. 그 대를 이어 포운 휘돈철공께서 도유사로 취임한다. 포운공께서는 한학에 밝았으며 보학 및 예학의 전문가이시기도 하다. 그 당시 집안의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사항은 공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1986년 10월 교통수단의 발달로 문중회을 참석하는 종원이 날로 증가하고 기존의회의 공간이 비좁아 묘전(墓前)인 용담골 종중 터에 재실을 건립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토지보상으로 인해 불러난 종재관리를 위해서는 현대적 법규에 근거한 규약이 필요했다. 종약(宗約)이라는 것은 문서형식을 갖추어 지지 않았어도 선대부터 오랜 전통을 통해 형성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진 불문법(不文法)이지만 씨족사회의 가치관도 변하고 사회도 다변화 됨에 따라 종장(宗匠)의 권위로만 종사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600년 이상을 이 고장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들목조씨 후손들의 현대적 종회는 1988년 1월 31일에 출범을 한다. 이 종회의 명칭은 풍양조씨 증병조참판 행동지중추부사공 휘 현범(賢範)파 종회(宗會)라 하였으며, 약칭 동추공파종회라 한다. 제1회 정기총회와 함께 초대회장에는 포운 휘돈철공이 선출되었으며, 총무에는 현대적 교육을 받으신 돈빈종원이 선임되었다.

1990년 말에는 직동궁내 선영에 대한 대대적으로 분묘단장을 한다. 상석을 비롯하여 동자석, 망주석 등은 있으며, 묘표는 동추공, 한풍군, 증좌찬성, 도산공, 정랑공, 증참의공까지 되어있다. 그러나 시사(時祀)를 받드는 분묘 중 일부는 표석도 없어 어쩌다 선영을 찾은 후손들이 산소의 구분도 잘 못하였으며, 사토를 한지도 오래되어 선영주변이 잡초가 무성하였다. 따라서 각 분묘마다 봉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호석(護石; 둘래석)하고 봉분 앞에는 표석을 새롭게 세웠다. 사토(莎土)를 하고 주변에는 연산홍 등 묘목을 심어 묘역을 정결(淨潔)하게 단장하였다.

1994년 6월에는 직동 골짜기를 가로질러 서해안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동추공을 비롯하여 장자(長子)인 은율공 휘언국(彦國), 해주목사공 휘지항(持恒), 포천공 휘명휘(命徽), 진사공 휘명적(命迪)의 배(配) 풍천임씨, 안경공 휘희평(熙平)의 분묘를 짧은 산등성에서 한풍군이 계신 긴 산등성으로 면봉을 하였다. 은율공께서 원래 있던 분묘는 동추공의 묘소보다 윗자리에 계셨는데 왜 도장(倒葬; 역장)으로 모셨는지는 특별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다. 단지 풍수의 결함을 보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이 때 산역(山役)을 하다 자기(磁器)로 만든 증정경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의 묘지문이 발견되어 포저유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포저공께서 아버지보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묘지를 쓴다며……” 시작하는 이 묘지문에는 어머님에 대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듬뿍 담겨 있다.

1996년 4월 25일 직동(直洞) 궁내에 매년 세일사(歲一祀)를 받들기 위해 사우(祠宇) 기공식을 갖는다. 이 건물은 순수전통 목조한옥양식으로 긴날 끝자락 나지막한 공터에 터를 잡고, 7개월만인 그해 11월 9일에 준공을 한다. 일반적으로 사우라 함은 선조 또는 선현의 신주(新主)나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 연 수차에 걸쳐 제향을 행하는 장소로서 명칭은 곳에 따라 향현사(鄕賢祠)·향사(鄕祠)·영당(影堂)·별묘(別廟)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당(祠堂)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건평 58.3㎡이며, 대지는 200평(661.2㎡)으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전면에는 일각문이 있으며, 주위에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화강암 기단에 삼문과 담장을 설치하였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겹 처마에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지붕 양 측면에 풍판(風板)을 달아 비바람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기둥이나 난간 부분에는 붉은색을 칠하고 그늘진 천장이나 추녀 안은 녹색으로 칠하는 등 단청의 명암효과를 높여 사당의 품격이 더 한층 빛난다.

그 동안 수백 년간을 묘전(墓前)에서 대개 추수가 끝난 음력 10월에 정일(丁日) 중 하루를 지정하여 묘제(墓祭)를 지냈다. 그러나 매년 선조숭배(先祖崇拜)를 위해 세일사에 많은 후손이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시제를 받드는 예절의 간소화 또한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또한 사우를 짓고 그곳에서 세일사를 모시자는 것은 종원들의 바램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사우는 그 해 11월 9일 완공되어 준공식을 가지며, 동지중추부사공 휘현범 이하 39 위(位)의 위폐가 봉안(奉安)되어 있다. 사우의 현판은 포운공 휘돈철이 풍결사(豐潔祠)라 명하는데 풍결사는 중국의 어느 선현을 모신 사당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운공께서는 풍결사가 준공되기 6개월 전인 5월 7일 별세를 하신다. 공께서는 유교적 전통사상을 몸소 체험하시고 실천적 삶을 사셨던 우리 문중의 최후의 종장(宗匠)이셨다. 상례, 제례, 혼례 등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밝아서 늘 문중 대소사의 예절(禮節)은 대부분 공께서 주도를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종사 일에도 적극적이셔 1964년도에 발행된 파보(派譜)인 갑진보(甲辰譜)를 주도적으로 편찬하였으며, 오늘날 동추공파 선산 및 위토, 종토를 공동명의에서 종중명의로 등기를 바꾸는데도 선도적 역할을 하셨다. 포운공의 별세와 함께 문중의 가례(家禮)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동추동파 2대 임원진으로 1996년 5월 29일 회장 돈환(敦煥), 총무 돈빈(敦斌) 종원이 선출된다.

1998년 11월 14일에는 숙곡리에 계시던 풍양군의 묘소를 직동선영으로 면례를 한다.
공께서는 광해 원년(1609) 3월 8일 동문(東門) 밖 자택에서 돌아갔으니 향년 69세이었다. 조정에서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祭祀)와 부의(賻儀)를 하사했다. 그 해 4월 21일 국장(國葬)으로 광주군 하도면 동천촌에서 봉행(奉行)되었으니 현 화성시 매송면 숙곡리 양좌(良坐)이다. 그러나 근대(近代)에 와서 후손들의 관리 소홀로 타인의 소유로 그 일대 선산이 넘어가고 공의 산소는 면봉(緬奉)을 하라는 독촉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재임시절 뒤늦게나마 공의 공로를 높게 평가하며 묘소가 있는 주변의 성역화 방안을 모색하라고 대통령은 지시를 한다. 이에 청와대에서 후손들을 급히 찾았고, 돈호(敦浩) 종인을 비롯한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이 일을 착수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묘역 성역화를 위한 마스터플랜 기획단계에서 대통령께서는 변란(變亂)으로 갑작스럽게 서거를 하신다. 그리고 이 사업계획은 중단이 된다. 결국 장군의 묘소는 면봉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구포종회는 이장에 필요한 경비일체를 지원하며, 묘표는 물론 포저공께서 찬(撰)한 신도비도 묘도(墓道)에 세운다. 임란이 발발하고 400여년 만에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대장군은 최소한의 격식을 갖춘 것이라고나 할까? 성품과 행실이 청렴 결백했던 장군이셨기에 원하지도 않는 화려한 단장이라고 꾸짖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이장(移葬)을 하며 숙곡리 유택에서 출토된 장군의 복식유물(服飾遺物)은 역사연구 사료로서 매우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단국대학교 복식연구 전문가인 고부자교수 등의 정성 어린 노력으로 복원이 되었다. 특히 해치흉배(獬豸胸背)는 조선중기 흉배사 정립에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한다. 출토 당시 비전문가가 유물을 수습한 관계로 훼손이 많이 되어 복원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이 유물들은 어렵게 복원작업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연고로 일체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을 하였으며, 서울시 민속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다. 2007년 봄에는 특별전시행사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