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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조들의 선양업적(구포의 역사)

1. 들어가며
2. 1600 년대
3. 1700 년대
4. 1800 년대
5. 1900 년대
6. 2000 년대


3. 1700년대(年代)

송곡공과 오재공께서 언제부터 명고서원에 제향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숙종실록(1714. 8. 6)에 “경기 유학(幼學) 이세만(李世萬) 등이 고(故)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명고서원에 그 아들 고(故) 판서(判書) 조복양(趙復陽)을 추향(追享)하는 것과 그 손자 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을 철향(綴享) 하라는 명을 정침(停寢)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소를 해조(該曹)에 내렸는데, 해조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이 간다. 여기에서 구포종사는 시중공 및 남원공 위선향사의 도통(道統)을 이어 참판공 이하의 위선사(爲先事)를 위해 결성되었지만, 포저공 후학들이 주축이 되어 춘추(春秋)로 제(祭)를 올렸던 『명고서원』의 향사(享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포지역 일대에 세거하던 송곡공과 도산공, 생원공 후손들이 포저공을 비롯하여 송곡공, 오재공 삼대향위(三代享位)를 봉사(封祀)하던 후학유생(後學儒生)들과 협력하며, 종원 간에 잦은 교류로 의기투합이 되며 위선사를 위한 협력이 강화됐을 것으로 추측이 가기 때문이다.

구포 직동에 도산공 및 정랑공, 참의공 3대분의 묘표를 빗돌에 새기는 시기도 이 무렵이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하신 분은 삭령공 휘명정이다. 1702년 도산공의 묘표는 외손인 김주신의 부탁으로 서계공 박세당(1629~1703)이 찬하며, 정랑공 휘지헌의 묘표는 아들인 명정과 참의공 휘명인의 묘표는 아들인 한위의 부탁으로 경은부원군 휘김주신이 찬한다. 그리고 삭령공은 1708년 해주통판(海州通判)으로 받은 녹봉(祿俸; 옛날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곡식(穀食)ㆍ돈 따위를 일컫는 말)을 덜어 마련한 돈으로 3위(三位)묘표를 빗돌에 새기지만 묘도에 세우지는 못하시고 돌아가신다. 삭령공은 오재공의 대를 잇지만 친가 조부, 부모님, 그리고 형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우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5세기말과 16세기에 주도적으로 종사를 이끌었던 종인들은 대사간공 휘한위(1679~1740), 참의공 휘한보(1690~1748), 생원공 휘한사(1693~1742), 이천부사공 휘한필(1699~1768), 생원공 휘한숙(1701~1763), 생원공 휘한철(1707~ 1749)일 것으로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당시 종사활동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많지 못하다. 대과급제를 하여 중앙무대에 출사를 하신 분 역시 우리 문중에서는 대사간공 뿐이었다. 그런 속에서 대사간공은 도산공파 종손의 막중한 책무도 있었겠지만 소싯적부터 직동(直洞)의 위선봉사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구포종중(鷗浦宗中)의 탄생도 이 무렵부터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직동국내(直洞局內) 향사(享祀)를 위한 위선사(爲先事)를 본격적으로 펼친 것도 이때이다.

또한 종사(宗事)일에 활동적인 사적을 남기신 분은 문음(門蔭)으로 전주판관(全州判官)을 하신 한보부군(漢輔府君)이다. 포저공의 묘표는 약천선생이 1707년도에 찬(撰)하는데 어느 분이 부탁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단지 소고공(嘯皐公) 서명균(1680~1745)은 비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추기의 사유를 밝히고 있는데 “선생의 현손 한보가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봉록(俸祿)을 덜어 돌을 새기게 되는데 서명균에게 상의하기를 약천옹(藥泉翁)이 지은 이 글은 입론(立論)에만 치중하고 세계(世系)와 자손이 누락되어 있으니 공이 기왕에 붓을 잡은 김에 이를 아울러 기록해주기 바란다.”하였다. 따라서 이 묘표가 세워지는 시기는 자손 중 한위(漢緯)의 관직이 대사간이라 밝히고 있으니 1736~1739년 사이로 추정되며, 대사간공 등의 협력으로 참의공이 주도적으로 하신다. 이 외에도 참의공 한보(漢輔)는 귀록공 휘현명(1690~1752)에게 찾아가 송곡공 신도비명을 1738년에 부탁을 하며, 오제공의 가장(家狀)을 직접 찬하는데 이 글을 바탕으로 체천공(棣泉公) 오수채(1692~1759)는 외종형(外從兄)의 행장(行狀)을 짓는다. 그러나 이 글은 문중에 널리 전해지지는 않았으며, 최근에 송곡공 종가댁에서 보관하고 있던 3대(三代; 浦渚, 松谷, 迂齋)행장이라 명(名)한 고문서에서 발견하였다.

이시기 회양공종중(淮陽公宗中)의 한평군파와 청교파는 자손이 번성을 하며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데 숙종조부터 정조시대까지 80여명의 과거급제자가 탄생한다. 조선말기 풍양조씨가 한동안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틀을 닦은 시기이다. 이 무렵 대동보가 간행되는데 창강공 휘속(1595~1668)이 초본을 편성하며 1678 년(숙종4) 명곡 최석정(1646~1715)선생은 서문을 쓴다. 그러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한다. 그 후 1715년(숙종 41)동강공 휘상우(1640~1718)께서 발문을 하고 귀락정 휘경명(1674~1726)이 주간을 하셨으며, 묵소공 휘석명(1674~1753)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간행하려 했으나 이인좌의 난으로 중단이 되고 귀록공 휘현명(1690~1752)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며 녹봉을 덜어 1731년(영조7) 완간을 하게 된다.

우리 풍양대동보(豐壤大同譜)가 동강공 등이 발의를 하여 완간 되기까지는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준비 부족으로 우리 평장공파(平章公派)가 창간(創刊) 신해보(辛亥譜)에 참여를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영호공 휘엄(1719~1777)과 부사공 휘지명 께서는 중간통문(重刊通文)에서 “포저공파가 처음부터 동보(同譜)하지 못한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인데 신해보 때에는 비록 그 댁의 보단(譜單)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동간(同刊)치 못하였으나 …중략…”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고 있다. 중간세보(重刊世譜)는 1759년(영조35)에 통문을 하며, 서발문을 1760년에 쓰는 것으로 보아 신해보가 발간(發刊)된지 29년 만에 경진보(庚辰譜)가 간행된 것이다. 이 시기 우리 문중에서는 어느 분이 두드러진 활동을 했는지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