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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조들의 선양업적(구포의 역사)

1. 들어가며
2. 1600 년대
3. 1700 년대
4. 1800 년대
5. 1900 년대
6. 2000 년대


2. 1600 년대(年代)

그 대를 이어 종사를 주도하였던 분들은 해주목사공 휘지항(1638~1707), 오재공 휘지겸(1639~1685), 공주목사공 휘지정(1641~1701), 정랑공 휘지헌(1642~1684)이다. 오재공은 송곡년보를 작성하며, 그 권미에 언행총략(言行總略)이 있는데 이것을 기초로 하여 명제공 윤증(尹拯; 1629~1714)은 송곡행장을 완성한다.

해주공과 공주공 형제분께서는 주도적으로 포저문집을 간행하는데 이 일이야 말로 당시 인쇄술로는 대역(大役)이었으며, 포저공의 학문을 세상에 전파하고 우리가문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한 대 업적(大業績)이다. 그 당시 가장(家藏)되어 있던 문집 15권과 나머지 가장 초고(家藏草稿), 〈심법(心法)〉 12장, 〈개혹잔어(開惑淺語)〉 1책, 〈도촌잡록(道村雜錄)〉 1책 등을 합하여 35권으로 편차하여 「포저집(浦渚集)」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포저유서(浦渚遺書)」는 〈중용곤득(中庸困得)〉ㆍ〈대학곤득(大學困得)〉 각 1권, 〈논어천설(論語淺說)〉ㆍ〈맹자천설(孟子淺說)〉 각 3권, 〈서경천설(書經淺說)〉과 〈역상개략(易象槪略)〉 합 2권을 편차하여 10冊으로 이어서 간행한다. 명제공께서 지은 포저유서(浦渚遺書) 발문(跋文)에 의하면, 선산부사 휘지항과 대구통판 휘지정이 함께 문집을 간행하고 이어 유서(遺書)를 간행하여 인본(印本) 1질을 가져와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포저집의 서·발문은 없어 그 시기를 정확이 알 수 없으며 다만 포저유서의 발문을 쓴 년대가 숙종18년(1692)으로 되어 있으니 이를 미루어 그 간행년도를 짐작할 뿐이다. 집안에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휘지정부군께서 공주목사로 계실 때 마곡사(麻谷寺)의 스님들에게 부탁하여 목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포저유서, 송곡집 목판은 마곡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송곡집(松谷集)은 오재공이 수습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하고 숙종 11년(1685)에 젊은 나이로 졸(卒)한다. 그 뒤 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휘지항부군(諱持恒府君)과 휘지정부군(諱持正府君)이 명곡공 최석정(崔錫鼎; 1645~1715)에게 찬차(纂次)를 부탁하여 정고본을 만들어, 지정부군이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부임하였을 때에 간행을 시도하였는데 역시 일을 끝마치지 못하고 졸하였다. 뒤이어 지항부군이 능주목사(綾州牧使)가 되어 간역(刊役)을 계속하여 목판으로 간행을 마치고 1705년에 명곡공에게 서문을 받는다.

도산유서(道山遺稿)는 공의 아들인 정랑공 휘지헌(諱持憲)이 수습하여 1664년에 동명공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서문을 받아두었던 것으로, 공이 돌아 가신지 52년 만에 생원공 김일진(金一振)에게 시집간 딸이 그 아들인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이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 부임하였을 때에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1700년(숙종 26) 목판으로 간행을 하게 된다. 이후 송곡집이 간행되자 그 뒤에 부록으로 첨부한다. 경은부원군은 휘지항부군이 부탁으로 의정공 휘영중의 묘표도 역시 찬한다. 지항부군이 능주목사(陵州牧使)로 계실 무렵이므로 1701년경으로 짐작이 된다.

가문이 다소 침체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지만 문중을 주도적으로 이끈 분들은 포천현감공 휘명휘(1656~1724), 참의공 휘명인(1657~1704) 대흥군수공 휘명흥(1663~1724), 삭령군수공 휘명정(1663~1723), 진사공 휘명적(1670~1723) 등 이시다. 1709년 서원의 제생(諸生)인 임필주(任弼周)와 송경주(宋經周) 등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명고서원을 대대적으로 수리와 증축을 하는데 문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 분들은 앞에 언급한 종인일 것으로 추측을 해본다. 그 당시 약천 남구만선생은 제생들의 명고서원 중수기문을 청하자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지금 제생들의 뜻이 매우 거룩하니, 내 장차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포저선생의 높은 도덕과 돈독한 충효는 국사(國史)에 기재된 것과 조정의 찬양한 기록과 후현들의 칭술(稱述)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이제 어찌 감히 다시 참람(僭濫; 분수에 넘침)한 말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어떻든 약천선생은 이 중수기를 통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명고서원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