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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조들의 선양업적(구포의 역사)

1. 들어가며
2. 1600 년대
3. 1700 년대
4. 1800 년대
5. 1900 년대
6. 2000 년대


1. 들어가며

송곡공 휘복양(復陽)이 찬(撰)한 남원공의 묘표음기에 “참판부군의 고택은 광주 송나동(현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에 있으니 포저공의 서원(明皐書院)이 그 터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을 미루어 유추하면 우리 집안의 구포역사(鷗浦歷史)는 참판부군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하여도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죽계공(竹溪公) 조응록(趙應祿)의 죽계일기(竹溪日記) 1593년 6월 14일 기록에 다음과 같이 관심을 끄는 내용이 있다. “저녁에 광주 구포에 투숙하였다. 이곳은 바로 강서 현령 조간(趙侃)의 농장이 있는 곳이다. 즉시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어 보았으나 이제 막 전염병을 겪은 뒤라 만나 볼 수가 없었다. 매우 서운하였다. 그 내간(內間)에서 밥을 지어 보내왔다 / 暮投廣州鷗浦 此卽趙江西侃之農舍也 卽使人間候 以纔經染病 無以相見 極愴 自其內間炊飯而送” 이 일기는 선조25년(1592)부터 광해군 7년(1615)까지 23년간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역사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는 문헌이다. 이 자료는 우리집안과 전직공파가 교류한 흔적을 밝힐 수 있는 최초의 문건이기도 하다. 죽계공은 전직공 휘지린(之藺)의 후손으로 회양공 신리파에 속하며, 1579년 문과급제하여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강직한 벼슬살이를 하신 분이다. 당시는 전란(戰亂) 중으로 군량(軍糧) 모집을 위하여 호남지방을 순행하던 중 구포에 들른 것 같다. 찬성부군이 강서현령을 임진년 봄에 사직하고 고향에 계실 때 이다.

죽계일기의 흥미가 있는 대목은 “강서현령 조간의 농장……” 이라고 한 부분이다. 농장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당시 구포에는 우리집안의 전답(田畓)이 꽤있었던 것 같다. 참판공께서 이곳에 세거(世居)하시며 장만한 재산을 상속받기도 했을 것이며, 동추공 한풍군으로 이어지며 기틀을 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대로 벼슬살이를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 또는 외직에 계신 것을 제외하고는 포저공 이전 선조님들의 근거지는 구포였다. 이렇게 우리 조상은 찬성공에 이르러 자손이 번성을 하며, 구포에 뿌리를 내리는 정착단계에 이른다.


포저공과 송곡공이 계셨기에……

직동국내(直洞局內)의 묘역 단장(丹粧)은 포저공 대에 이르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포저공 휘익(1579~1655)은 세상을 뜨시기 4년 전인 효종2년(1651)에 고조부 동추공 휘현범( ~1538), 증조부 한풍군 휘안국(1500~1573), 조부 찬성공 휘간(1535~1603)의 묘표(墓表)를 찬한다. 공은 비문에서 묘도(墓道)의 글을 아직도 기술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지체한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불초 익(翼)의 나이가 73세나 되었으니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이 일이 끝내는 잘못되고 말 것이다. 이에 삼가 이전 3세의 관봉(官封)과 역임한 관직과 평생의 인덕(仁德) 중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익히 보아 왔던 것들을 서술하여 이를 묘비로 세움으로써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 그리고 묘표글씨는 기오당공(奇傲堂公) 김우형(金宇亨; 1616~1694)과 전면글씨는 공의 문인인 동춘당공(同春堂公)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게 부탁을 하여 묘도에 세운다. 당시 포저공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들목으로 낙향하여 기거하고 있을 무렵이다.

그러나 동추공(同樞公)은 포저공(浦渚公)의 고조부이시니 공께서 5대 봉사를 하였다면 직동국내에 계신 분들은 모두가 기제사 대상이었다. 따라서 직동향사(直洞享祀)는 그 후대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포저공의 다섯 아드님은 대부분 요절하고 단양공(丹陽公)과 송곡공(松谷公)만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는데 단양공마저 4년 후 단양 임지(丹陽任地)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따라서 초기의 구포종사(鷗浦宗事)는 송곡공 휘복양(1609~1671)이 홀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포저공의 일대기를 정리한 가장(家狀)을 손수 작성하여 동춘당공에게 시장(諡狀)을 부탁을 하며, 평소에 절친한 벗이었던 미촌공(美村公) 윤선거(尹宣擧; 1610~1669)에게는 묘지명을 청하여 완성한다. 명고서원(明皐書院)은 포저공이 돌아가시고 6년만인 1661년 구포(현 매송면 원리)에 건립이 되는데, 동춘당의 청으로 1669년 사액을 받는다. 물론 서원을 건립하는데 지역 유생들의 공로가 컸겠지만 송곡공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공은 시중공 휘맹과 남원공 휘계평의 묘표음기(墓表陰記)를 찬(撰) 하시고, 빗돌까지 손수 장만하여 묘도에 세운다. 그리고 포저공 생전 가장(家藏)되어있는 초고에 부록문자들을 실어 포저집을 간행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년보(年譜)도 만들어 훗날 년보편찬의 초본이 된다. 그러나 공이 1671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일은 일단 중단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