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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서원(明皐書院) 복원사업

개요(槪要)
명고서원(明皐書院)의 규모
명고서원사록(明皐書院史錄)


개요(槪要)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창적으로 자신의 경학사상(經學思想)을 펼쳤으며, 애민정신과 민본중심의 실천적 사상을 확립한 대학자 포저(浦渚)의 학문을 이어받아 지역인재를 키우며, 공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지역유생들은 현종(顯宗) 2년 신축년(1661)에 명고서원(明皐書院)을 창건한다. 공이 돌아가시고 6년 후의 일이다. 이곳은 공의 5대조(五代祖)이신 증참판공 지진의 고택이 있던 자리였으며, 주변지역은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조씨 가문의 세거지지(世居之地)이기도 하다.

뒤이어 공의 제자이며 당대 대학자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청으로 기유년(1669) 편액(扁額)이 내려지며 사액서원으로 위엄을 갖춘다. 그리고 공의 아들인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송곡(松谷) 조복양(趙復陽;1609~1671), 공의 손자이며 소론의 거두 중 일인자인 부제학 오재(迂齋) 조지겸(趙持謙;1639~1685)이 배향된다. 이 서원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게 한 가문이3대(三代) 성현(聖賢)의 제향(祭享)을 모시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19년(1795) 윤2월 9일과 순조 10년(1810) 8월 28일 명고서원에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나고 임금은 명한다. 당시에 제문 중 정조대왕께서 내린 치제문(致祭文)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사모의 미감을 담은 율조가 삼대성현(三代聖賢)의 우아한 자취를 듬뿍 자아내고 있기에 여기소개한다.
명고서원(明皐書院) 치제문
한 서원에 삼대(三代)를 제향한 것은 / 一院三世
듣고 보기 힘든 일이니 / 聞稀見刱
재상의 숙덕이었으며 / 台扉宿德
예원의 종장이었네 / 藝苑宗匠
가학(家學)을 통하여 가르치고 배움에 / 家庭授受
깊은 학문과 호방한 문장을 이루었으니 / 邃學宏詞
봉황이 되고 기린이 되어 / 爲鳳爲麟
우의의 자취를 이었네 / 接武羽儀
여씨 집안의 공저이고 / 呂氏公著
범씨 집안의 순인이었으니 / 范家純仁
유풍과 여운이 / 遺風餘韻
밝게 빛나고 매우 높았네 / 炳烺嶙峋
손자가 함께 배향되니 / 有孫配食
소탈한 성품으로 명망이 있었는데 / 雅望疎襟
무엇으로 나의 뜻을 부치려나 / 何以寄意
한 편의 제문과 석 잔의 술일세 / 文一酌三


그러나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민폐를 줄이는 한편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는 정책의 하나로, 서원철폐 작업에 착수했다. 1868년에는 서원에 나누어준 토지도 세금을 낼 것이며 서원의 장은 지방 수령이 맡아 서원을 주관하는 조처를 시행했다. 1870년에는 1868년의 명령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라 하고, 1871년에 "사액서원이라도 1인(一人) 1원(一院) 이외로 첩설(疊設)한 것은 모두 철폐하라"고 하면서 서원철폐를 단행했다. 이 조처로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사묘(祠廟) 등이 모두 훼철되었다. 그 후 많은 서원들이 지방자치단체 또는 문중에 의해서 문화재 발굴의 일환으로 복원되고 있다.

명고서원도 그 당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러나 이 서원이 훼철된지 1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복원을 못 시키고 있다. 특히나 몰지각한 후손들에 의해 그 터가 남의 수중으로 넘어갔기에 그 복원은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 그 터에는 옛 위엄은 간데없고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동추공종중에서 최근 명고서원 복원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일은 한 집안의 영광을 복원하는 사업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포저공 조익은 우리 모두에 정신을 풍요롭게 해준 대학자이며, 경세제민의 사상가이시다. 또한 당대에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며 민생이 곤궁해지고 군병이 쇠잔에 지는 것을 걱정했던 민본주의자이셨다.

주추돌만 덩그러니 있는 명고서원의 현모습

포저는 송준길, 조극선, 유계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포저학맥(浦渚學脈)을 형성하였으며,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경학사상을 펼친 용기있는 학자였다. 조선중엽 이후 당쟁이 격렬해 지면서 유교의 교리 자체를 반대하지 않더라도 그 교리의 해석을 주자(朱子)의 방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였다. 아직도 학계에서 포저의 사상은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학문적 가치성을 인정하여 후학들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포저사상의 학문적 요람인 명고서원은 복원되어야 한다. 이곳이 성역화 되어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키워주는 수련의 장이 되고, 이 고장만이 갖는 다양하며 질박한 문화창달(文化暢達)의 표상(表象)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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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서원(明皐書院)의 규모

명고서원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단지 현재 남아있는 주춧돌과 터의 모양으로 추정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고건축을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터의 모양, 주춧돌, 건축규모 등으로 복원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사료는 약천공(藥泉公) 남구만(南九萬)의 명고서원중수기에 나온다. 그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러 유생들이 합의하여 강당의 명칭을 ‘충효당(忠孝堂)’이라 하고 주자(朱子)의 유필로 집자(集字)하여 그곳에 현판을 걸었다. 또한 동재(東齋)는‘사물재(四勿齋)’, 서재(西齋)는 ‘삼성재(三省齋)’로 하였고, 바깥문은 ‘입덕(入德)’, 전사청은 ‘비사주(毖祀廚)’, 별당은 ‘양정재(養正齋)’라고 하였다. 또한 그 남은 재목을 써서 전사청(典祀廳)의 좌측에 별당을 지었는데, 이는 여러 유생들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原文) 諸生合議。名講堂曰忠孝。而集朱夫子遺筆揭之。名東齋曰四勿。名西齋曰三省。名外門曰入德。名典祀廳曰毖祀之廚。名別堂曰養正之齋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추정해 보건대 명고서원의 규모는 결코 적지 않는 규모이었던 것 같다. 여기 전문을 수록한다.


藥泉集第二十八 記 明皐書院重修記 己丑

明皐書院在廣州鷗浦。卽浦渚趙先生之所享祀。玆實先生之松楸也桑梓也。於先生杖屨息游之處。作後人尸祝藏修之地。惟我先生之如在與夫後人之瞻依。固將千百世如新矣。蓋聞刱建院宇。在顯廟元年庚子。奉薦俎豆在二年辛丑。賜以額號在十年己酉。以當初事力之未裕也。結構或有疏略。以其後歲月之浸久也。棟宇或有撓圮。院之諸生任弼周宋經周等。糾率同志。經營累年。乃得以修改。傾者正危者安陊者完䵝者明。寢廟孔安。庭除載肅。又以其餘材作。別堂於典祀麗之左。以爲諸生燕息之所。至若庖廥之頹廢者。亦皆次第葺之。工旣訖。諸生合議。名講堂曰忠孝。而集朱夫子遺筆揭之。名東齋曰四勿。名西齋曰三省。名外門曰入德。名典祀廳曰毖祀之廚。名別堂曰養正之齋。皆所以寓意進學。必欲其顧名思義也。於是焉讀生又合議曰。院之設蓋久。而尙未有記事。以視于後。宜速圖之。乃具事始末。請文于余。余作而曰今諸生之意甚盛。將以何言答之哉。我先生道德之高。忠孝之篤。國史之紀載。朝家之褒錄。後賢之稱述備矣。今何敢復加以僭說。至若海嶽環擁。溪山拱揖。天作而地藏之。以爲揭虔妥靈之所。與廬阜之白鹿並稱者。非但余不得歷謁而登覽。無可以爲言。設令想像而詳言之。亦何足爲斯院之重也。又若諸生慕賢而建祠。刱前修後。經紀董事之勤。誠有足尙者。然亦必非諸生今日所請以爲記。若乃自古建國君民。以敎學爲先。則誠有可言者矣。禮曰家有塾黨有庠術有序國有學。今京都之太學。郡邑之鄕校。皆所謂學。所以公之於邦國。領之於官府者也。若書院則乃是黨庠術序之類。而比之家塾。稍公而加重者也。雖其大小有等。廣狹有差。其於古之建國。以敎學爲先者。同一意也。然則塾庠序學。如是其備置者。凡以敎士爲急。至於先聖先師之釋奠釋菜者。亦是始敎之一事。非建學之原本也。然則爲士而入學校庠序之中者。只知其始敎皮弁示敬之道。而不知其孫業蛾子時術之義。則亦何益於爲己之學。亦非所以報國家設敎之意也。且學校之所祀。乃是孔孟以下群聖賢。書院之所享。乃是近代鄕邦之名賢。不無輕重之殊。而今之爲士者。乃有緩於學校而急於書院人。或以此相訾謷。余意則有不然者。孟子言君子之澤。斬於五世。其論見知與聞知。亦以居之近遠爲言。是以孔孟之訓天下無不誦讀。而鄒魯獨稱多士。陽城居晉鄙。薰德而善良幾千人。此豈非世不遠而居之近故耶。陽城且然。而況不但爲陽城者乎。以此今世之士。乃於鄕邦之賢。薰陶私淑。感發興起。其所得之效。或多襯切於身心者。故其爲之尊奉於祠院也。不藉公家之力。各以其士林通共鳩聚者成之。人之褊心淺見者。反以此爲譏。若以國家敎七之方言之。亦恐當奬而不當禁也。雖然孟子論友士。自一鄕推之至於一國天下。猶以爲不足。又必至於尙友古人。今之爲士者。若能尊師鄕邦之名賢。知行日進於高明。則又將必以古聖賢爲期。此乃自東山而登泰山。由江河而達于海之說也。豈非諸生所當勉者乎。是爲記。

(번역문)
명고서원은 광주(廣州) 구포(鷗浦)에 있으니, 바로 포저(浦渚) 조선생(趙先生 조익(趙翼)을 가리킴)을 제향하는 곳인데, 이는 실로 선생의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다.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거닐며 쉬고 노시던 곳인데, 후인들이 신위(神位)를 모시고 수학(修學)하는 곳으로 삼으니, 우리 선생의 영혼과 후인들이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것이 진실로 장차 천백 세(世)가 지나도록 새로울 것이다.

내 들으니 서원을 창건한 것은 현종 원년 경자년(1660)이고 조두(俎豆)를 받들어 올린 것은 2년 신축년(1661)이며 명고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린 것은 10년 기유년(1669)인데, 당초에 사세와 물력이 여유가 없었으므로 집을 지은 것이 혹 소략하였고, 그 후 세월이 점점 오래됨에 따라 기둥과 들보가 혹 흔들리고 무너졌다.

서원의 제생(諸生)인 임필주(任弼周)와 송경주(宋經周) 등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느리고 다년간 경영하여 마침내 수리하고 고쳐서 기울었던 것이 바로잡히고 위태로웠던 것이 안정되며 무너졌던 것이 완전해지고 그을렸던 것이 선명해져서 침묘(寢廟)가 매우 편안하고 뜰이 정돈되었다. 또 그 남은 재목을 가지고 전사청(典祀廳) 왼쪽에 별당(別堂)을 지어서 제생들이 편안히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고, 음식을 만드는 주방과 여물을 보관하는 광이 무너진 것에 이르기까지 또한 차례로 수리하였다.

공사가 끝나자 제생들이 합의(合議)하여 강당을 충효당(忠孝堂)이라 이름하고 주부자(朱夫子)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하여 게시하였으며, 동재(東齋)를 이름하여 사물(四勿)이라 하고 서재(西齋)를 이름하여 삼성(三省)이라 하고 외문(外門)을 이름하여 입덕(入德)이라 하고 전사청을 이름하여 비사주(毖祀廚)라 하고 별당을 이름하여 양정재(養正齋)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진학(進學)에 뜻을 붙여서 반드시 이름을 돌아보고 의의(意義)를 생각하고자 해서였다. 이에 제생들이 또 합의하기를 “서원이 세워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줌이 없으니, 속히 도모해야 한다.” 하고, 마침내 일의 본말을 갖추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이에 나는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제생들의 뜻이 매우 거룩하니, 내 장차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포저선생의 높은 도덕과 돈독한 충효는 국사(國史)에 기재된 것과 조정의 찬양한 기록과 후현들의 칭술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이제 어찌 감히 다시 참람한 말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바다와 산이 빙둘러 에워싸고 시내와 산이 두 손을 마주 잡은 듯이 읍하여,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영령(英靈)을 편안히 모시는 곳으로 삼아 여산(廬山)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과 함께 일컬어짐으로 말하면 비단 내가 차례로 보고 올라가 고증하지 못해서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상상하여 자세히 말한다 한들 또한 어찌 이 서원에 보탬이 되겠는가. 또 제생들이 선현을 사모하고 사당을 세워 앞에서 창건하고 뒤에서 수리하여 경영하여 일을 감독한 노고로 말하면 진실로 가상히 여길 만하나 이 또한 반드시 제생들이 오늘 나에게 청하여 기록해 달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릴 때에 가르침과 배움을 우선으로 삼음에 있어서는 진실로 말할 만한 점이 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25가(家)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주(州)에는 서(序)가 있고 국도(國都)에는 태학(太學)이 있다. 하였으니, 지금 경도(京都)의 태학과 군읍(郡邑)의 향교(鄕校)는 모두 이른바 학(學)이라는 것이니, 나라에서 공적(公的)으로 하는 것이고 관부에 소속된 것이다.

서원으로 말하면 바로 당(黨)의 상(庠)과 주(州)의 서(序) 따위인데, 가(家)의 숙(塾)에 비하면 다소 공적이어서 더 소중하다. 비록 크고 작은 등급이 있고 넓고 좁은 차이가 있으나 옛날에 나라를 세울 때에 가르침과 배움을 우선으로 삼음에 있어서는 똑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숙(塾)과 상(庠)과 서(序)와 학(學)이 이와 같이 구비된 것은 모두 선비를 가르치는 것을 시급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석전(釋奠)과 석채(釋菜) 로 말하면 또한 처음 가르치는 한 가지 일일 뿐이요 학교를 세운 본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선비가 되어 학․교․상․서에 들어간 자가 다만 처음 가르칠 때에 피변(皮弁)을 사용하여 공경하는 도(道) 만 알고, 학업을 공손히 익히며 아자(蛾子)가 때로 익히는 의(義)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어찌 자신을 위하는 학문에 보탬이 있겠는가. 이는 또한 국가에서 학교를 설치함에 보답하는 뜻이 아닐 것이다.

또 학교에서 제사하는 바는 바로 공맹(孔孟) 이하 여러 성현들이고, 서원에서 제향하는 바는 근세 지방의 명현들이니, 경중의 차이가 없지 않은데, 지금 선비들이 마침내 학교는 느긋하게 여기고 서원은 급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혹 이것을 가지고 서로 비방하고 꾸짖으나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군자의 유택(遺澤)도 5세(世)면 끊긴다.’ 하였고, 보고서 아는 것과 듣고서 아는 것을 논할 때에도 또한 거주지의 원근을 가지고 말씀하였다. 이 때문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천하에 외고 읽지 않은 자가 없으나 추로(鄒魯) 지방만이 유독 선비가 많다고 알려졌으며, 양성(陽城)이 진(晉) 땅의 시골에 있을 때 그의 덕(德)에 감화되어 선량해진 자가 몇 천명이었으니, 이는 어찌 세대가 멀지 않고 거주한 곳이 가깝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양성도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단지 양성의 일을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닌 자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마침내 지방의 현자에 대하여 훈도(薰陶)하고 사숙(私淑)하여 감발(感發)하고 흥기해서 얻은 바의 효과가 혹 몸과 마음에 간절함이 많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에 받들어 모실 때에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각각 사림(士林)들이 공동으로 모은 재물로써 이루는 것이다. 편협한 마음과 얕은 소견을 가진 사람들은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으나 만약 국가에서 선비를 가르치는 방법을 가지고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장려해야 하고 금해서는 안될 듯하다.

그러나 맹자가 선비를 벗삼는 것을 논할 때에 한 지방으로부터 미루어 나가서 한 나라와 천하에 이르고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또 반드시 위로 고인을 벗삼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선비된 자들이 만약 지방의 명현(名賢)을 높이고 스승으로 삼아 지(知)와 행(行)이 날로 고명한 경지에 나아간다면 또 장차 반드시 옛 성현을 가지고 기약할 것이니, 이는 바로 ‘동산(東山)으로부터 태산(泰山)에 올라가고 강하(江河)를 통해서 바다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어찌 제생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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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서원사록(明皐書院史錄)

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서원편(書院編)

○ 명고서원(明皐書院) 서쪽 20리 송동(松洞)에 있다. 현종(顯宗)2년 신축년(1661)에 짓고 기유년(1669)에 사액하였다. 조익(趙翼) 자(字)는 비경(飛卿)이고 호는 포저(浦渚)이며 풍양(?壤) 사람이다. 벼슬은 좌의정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복양(趙復陽) 자는 중초(仲初)이며 조익의 아들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 전문형(典文衡)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지겸(趙持謙) 자는 광보(光甫)이고 호는 우재(迂齋)이며 조복양의 아들이다. 벼슬은 부제학이었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2.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명고서원(明皐書院) 신축년에 세웠으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익(趙翼)ㆍ조복양(趙復陽)ㆍ조지겸(趙持謙)


3. 조선왕조실록 자료(朝鮮王朝實錄 資料)

3-1 현종 15권, 9년( 1668 무신 / 청 강희(康熙) 7년) 12월 5일 기사 3번째 기사 유희춘, 김상용, 김상헌, 김장생, 조익의 서원에 사액하다.

○命潭陽柳希春、定州金尙容ㆍ尙憲、安城金長生、廣州趙翼等書院賜額, 以左參贊宋浚吉之請也。 時書院遍一國, 而儒風不振, 徒自務勝, 有魚目混珠之譏, 識者病焉。 刑曹判書徐必遠捉越城人, 請斬以徇。 上從其言, 將行刑, 領議政鄭太和聞而大駭, 使人謂之曰: “急爲啓辭停止。 否者, 吾且箚論。” 必遠不得已啓請待啓?施行, 從之。 宋浚吉於筵中, 斥其非曰: “古人死中, 尙且求生, 今必遠於生中求死, 此人誤事必多。 願殿下察焉。”

담양(潭陽)의 유희춘(柳希春), 정주(定州)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안성(安城)의 김장생(金長生), 광주(廣州)의 조익(趙翼) 등의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서원이 온 나라에 두루 퍼졌는데도 유풍이 진작되지 않고 오직 이기기만 힘써서 생선 눈알과 진주가 섞였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도성을 넘어간 사람을 잡아 놓고는 참수하여 조리돌리도록 청하였다. 상이 그 말을 좇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영의정 정태화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필원에게 말하기를,

“급히 계사를 올려 정지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장차 차자로 논하겠소.”

하였다. 필원이 마지못해 사형을 재심리하기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그 잘못을 꼬집어 말하기를,

“옛사람은 죽을 사람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살릴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필원은 살릴 사람 중에서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은 반드시 일을 많이 그르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담양(潭陽)의 유희춘(柳希春), 정주(定州)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안성(安城)의 김장생(金長生), 광주(廣州)의 조익(趙翼) 등의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서원이 온 나라에 두루 퍼졌는데도 유풍이 진작되지 않고 오직 이기기만 힘써서 생선 눈알과 진주가 섞였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도성을 넘어간 사람을 잡아 놓고는 참수하여 조리돌리도록 청하였다. 상이 그 말을 좇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영의정 정태화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필원에게 말하기를,

“급히 계사를 올려 정지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장차 차자로 논하겠소.”

하였다. 필원이 마지못해 사형을 재심리하기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그 잘못을 꼬집어 말하기를,

“옛사람은 죽을 사람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살릴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필원은 살릴 사람 중에서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은 반드시 일을 많이 그르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3-2 肅宗實錄補闕正誤 四十年(1714) 八月 六日

○乙亥/京畿幼學李世萬等, 請寢故文孝公^趙翼明皐書院, 追享其子故判書復陽, 其孫故副提學持謙綴享之命, 上下其疏于該曹, 覆啓勿施。

경기 유학(幼學) 이세만(李世萬) 등이 고(故)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명고 서원(明皐書院)에 그 아들 고(故) 판서(判書) 조복양(趙復陽)을 추향(追享)하는 것과 그 손자 고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謙)을 철향(綴享) 하라는 명을 정침(停寢)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소를 해조(該曹)에 내렸는데, 해조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3-3 正祖實錄 十九年(1795) 閏二月 九日

○分遣閣臣承旨、史官、宗臣、宰臣、武臣, 致祭于愍懷墓延齡君、?嬪、讓寧大君、厚寧、秀川、靑杞、咸川、昌原、德津君墓及金?墓、忠賢ㆍ梅谷ㆍ明皐書院、靑海伯祠宇、八達山處士墓。

각신(閣臣), 승지, 사관, 종신(宗臣), 재신(宰臣), 무신을 나누어 보내, 민회 묘(愍懷墓)와 연령군(延齡君), 명빈(?嬪), 양녕대군(讓寧大君), 후령군(厚寧君), 수천군(秀川君), 청기군(淸杞君), 함천군(咸川君), 창원군(昌原君), 덕진군(德津君)의 묘소 및 김간(金幹)의 묘, 그리고 충현서원(忠賢書院), 매곡서원(梅谷書院), 명고서원(明皐書院)과 청해백(靑海伯)의 사당 및 팔달산(八達山) 처사(處士)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3-4 純祖實錄 十年(1810) 八月 二八日

○命?嬪、宜嬪墓, 遣內侍致祭, 愍懷墓, 遣禮堂致祭, 延齡君ㆍ永昌大君 ㆍ海昌尉墓、闕里祠及文正公^趙光祖ㆍ靑海伯^李之蘭ㆍ故學士李?祠版、梅谷ㆍ明皐書院, 遣禮官致祭。

명빈(?嬪)과 의빈(宜嬪)의 묘에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고, 민회묘(愍懷墓)에는 예조 당상을 보내 제사지내고, 연령군(延齡君)영창 대군(永昌大君)해창위(海昌尉)의 묘소와 궐리사(闕里祠) 및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 고 학사(學士) 이고(李皐)의 사판(祠版)과 매곡 서원(梅谷書院), 명고서원(明皐書院)에는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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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丙燮]